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이렇게 김춘수는 꽃을 노래한다.
세상의 향기
그는 빛깔과 향기가 있는 꽃을 노래한다. 빛깔과 더불어 향기가 없으면 꽃이 아니란다. 이런 향기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어떤 의미일까? 어떤 사람은 살짝 스치는 여인의 머리에서 나는 향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샤넬 number9'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어머니의 젖냄새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커피향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아카시아향을 좋아한다.
세상엔 참으로 향기가 많다. 꽃향기가 있는가 하면 풀향기가 있고, 그런가 하면 음악의 향기가 있다. 숲향기, 자연의 향기, 보랏빛 향기, 천년의 향기, 여름 향기, 고향의 향기, 흙의 향기, 절의 향기, 신록의 향기, 연인의 향기, 소주의 향기, 전통의 향기, 문학 향기, 입술의 향기, 아기의 향기, 먹향기, 누룽지 향기가 있는가 하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나눔의 향기도 있다.
어린 시절 저녁 무렵 굴뚝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볼 때마다 나는 부엌에 들어가 어머니가 새까만 가마솥 뚜껑을 여실 때 풍겨오는 구수한 밥냄새를 맡았다. 그 냄새는 나를 한없이 행복하게 했다. 어머니 냄새와 함께 이 세상에 어떤 부러운 것도 없는 순간이었다.
소나무 장작 냄새도 좋았다. 솔가지를 분질러 아궁이에 불을 때고 나면 손은 송진이 묻어 새까매졌지만 송진 냄새는 싫지 않았다. 또 어머니가 홍두깨로 옷을 두드릴 때 나는 무명 옷감 냄새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세상은 향의 천지다. 향기가 없으면 악취라도 나는 것이 세상이다. 누가 악취를 좋아하랴. 사람들은 예부터 향과 함께 생활해왔다. 그 예는 경복궁에서도 찾을 수 있다.
경복궁 안에는 1867년 고종이 건청궁 남쪽에 못을 파 향원지(香遠池)로 이름 지은 작은 연못이 있다. 못 가운데는 섬처럼 떠 있는 향원정(香遠亭)과 이 정자로 이어지는 구름다리 취향교(醉香橋)가 있다. 이곳은 이름마따나 온통 '향기'의 세상이다.
옛 사람의 향생활
그런가 하면 우리 선조들은 선비가 사는 집을 '난 향기가 나는 집'이라는 뜻의 난형지실(蘭馨之室)이라고 했다. 예로부터 선비들은 운치 있는 4가지 일(4예 四藝)로 차를 마시며, 그림을 걸고, 꽃을 꽂는 일과 함께 향을 피우고, 즐겼다고 한다. 심신수양의 방법으로 거처하는 방안에 향불을 피운다 하여 분향묵좌(焚香默坐)라는 말도 있다.
우리 옛 여인들의 몸에선 항상 은은한 향이 풍겨 나왔고, 향수, 향로제조기술은 어진 부인의 자랑스런 덕목이었다고 한다. 신라의 진지왕은 도화녀와 잠자리를 같이 할 때 침실에서 향을 사용했는데 그 향내가 이레 동안이나 지워지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신라 시대에는 아랍 지역에 사향과 침향을 수출하였고, 일본에도 용뇌향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향을 수출하였다고 한다. 중국 문헌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남녀노소가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향낭(향주머니)을 찼다고 한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고려에는 향을 끓는 물을 담아 옷에 향기를 쏘는 박산로(博山爐)가 있었다. 또 고려의 귀부인들은 비단 향주머니 차기를 좋아했으며, 흰모시로 자루를 만들어 그 속을 향초(香草)로 채운 자수 베개를 애용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고려인들은 난탕(蘭湯)이라 하여 난초를 우린 물로 목욕하거나 향수 물로 목욕해 몸에 향내를 발산시켰으며 초에 난초 향유를 혼합해 향내가 방안에 그윽하도록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향을 복용한 향낭(香娘;동정녀)을 부여안고 회춘(回春)를 기대했다는 기록을 보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일부 사람들은 향을 먹기도 한 것 같다.
조선시대엔 부부가 잠자리에 들 때 사향을 두고 난향의 촛불을 켜두었다. 모든 여자들이 향주머니를 노리개로 찰 정도였다. 부모의 처소에 아침 문안을 드리러 갈 때는 반드시 향주머니를 차는 것이 법도로 되어 있었다.
우리 조상들이 향생활을 즐긴 이유
우리 나라 옛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가장 즐겨 사용한 향은 사향이었다고 하는데 사향이 우리 나라 팔도 각지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상비 의약품으로 효용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사향은 응혈된 피를 용해시키는 작용을 하며 토사곽란(토하고 설사하며, 배가 아픈 병)을 진정시킨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흥분제로도 쓰인 것으로 보인다.
난초에서 얻는 난향은 우울증을 풀어주고, 흥분을 진정시킨다고 한다. 향유병을 비롯하여 향로, 향꽂이, 향주머니, 향집, 향갑 등 향구(香具)들도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이들 향은 시전에서 판매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가정에서 자가 제조되었다.
예부터 향은 건강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 다시 말해 향 생활이야말로 우리의 건강을 지키는데 좋은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이다. 부산교통공단은 높은 기온과 습도로 불쾌지수가 높은 여름철에 대비해 6월부터 11월까지 부산지하철 1, 2호선 모든 전동차에 레몬향 천연 허브방향제를 설치키로 했다고 한다.
그만큼 향생활에 대한 가치를 현대인들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향생활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향이 단순히 육체적인 약제로 쓰이는 것뿐 아니라 정신생활에 미치는 영향도 상당하다는 것이다.
'향기를 찾는 사람들' 박희준 대표는 선비의 향생활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여름철에 벌레를 쫓기 위해 피우는 모깃불도 이 향문화의 한 갈래이고, 추석에 먹는 솔잎 향기가 밴 송편과 이른 봄의 쑥과 한증막 속의 쑥냄새, 그리고 단오날 머리를 감는 창포물도 우리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향기의 하나였다.
또 장롱 안에 향을 피워 향냄새를 옷에 배게 하여 늘 옷에서 스며 나오는 향기를 즐기기도 하고, 옷을 손질하는 풀에 향료를 넣어 옷에서 절로 향기가 스며 나오게도 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향기를 잠자리에 끌어들이기도 하였는데, 국화로 베개를 만들어 사용하면 머리와 눈을 맑게 할 수 있고 탁한 기운을 제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향문화는 외국의 향과 향수에 밀려 촌스러운 것 또는 하찮은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도대체 그 향기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지금 우리 나라의 향은 지난 왜정시대와 6·25 그리고 개발독재시대를 지나 정신보다는 물질의 시대가 되면서 잊혀지게 되었다. 향을 수출하고, 천년 뒤 후손에게 물려줄 향을 묻던 고려인들의 마음은 이미 사라졌다."
향생활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
고려말, 조선초에 민중들의 염원이 담긴 매향의식은 향나무를 바닷가 개펄에 묻어두는 것인데 왜구의 침탈을 당한 서민들이 먼훗날 어떤 사람들이 쓸지도 모를 향나무를 묻는 의식이었다. 누군지 모를 어느 사람과 함께 향을 나눌 수 있는 그 뜨거운 마음이야말로 향생활의 진정한 의미를 이야기해주고 있지는 않을까? 또 남에게 악취가 아닌 기분좋은 향기를 나눠주는 것이야말로 '더불어 사는 삶'의 실천일 것이다.
한자의 '향(香)'이란 글자는 벼 '화(禾)'자에 날 '일(日)'자를 하고 있다. 벼가 익어 가는 냄새를 향이라 하는 것이다.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기가 우러나온다. 이 말을 우리의 삶에 도입해 보자. 삶이 내면에 향기를 품고 사는지, 아니면 악취를 안고 사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품격은 결정된다고 하겠다.
내 몸에서도 향기가 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남을 즐겁게 하고, 또 동시에 내가 건강할 수 있으면 좋겠다. 화학작용을 거쳐 추출된 서양식 향수보다는 한약재로 만든 우리의 천연향을 즐기는 슬기로움이 우리의 건강을 지켜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