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정상은 기술력을 활용하여 양국 군을 변혁시키고 새로이 대두하고 있는 위협에 대한 대처 능력을 제고함으로써 한미동맹을 현대화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2003년 5월 14일 공동성명에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한미동맹 재조정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점은 한미동맹과 노무현 정부가 주창한 '협력적 자주국방'이 마치 대립되는 개념인 것처럼 거론되고 있다는 것이다. 협력적 자주국방을 '한미동맹의 약화'로 받아들이고 있는 보수파들은 이를 정치 쟁점화하려 하고 있는 반면에, 노무현 정부는 '협력적 자주국방'을 통해 동맹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우리의 자주성이 증진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협력적 자주국방은 한미동맹의 약화를 전제로 한 것도 아니고, 동맹의 약화는 물론이고 자주성의 증진을 가져올 가능성도 낮다. 근본적으로 노무현 정부의 자주국방 노선은 새로운 형태의 '한미동맹의 강화'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서두에 인용한 2003년 5월 한미정상회담 공동성명은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의 지나친 '친미·반북' 발언에 가려져 그 내용이 잘 전해지지 않았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내용은 양국 정상이 합의한 '한미동맹의 현대화'에 있었다.
이 공동성명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한미동맹의 현대화'를 통해 "대한민국의 국력 신장에 따라 한반도 방위에서 한국군의 역할을 계속 증대하는 기회가 주어지고 있는 데 대해서도 유의하였다"라고 언급한 부분이다.
'동맹 현대화'의 두 축, 주한미군 변형과 협력적 자주국방
그렇다면 협력적 자주국방은 '한미동맹의 현대화'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선 협력적 자주국방은 독립된 개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동맹의 현대화'의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노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천명한 '동맹의 현대화'는 한국의 '협력적 자주국방 노선'과 미국의 '주한미군의 변형'이라는 두 축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자주국방 비전을 보면, 한미동맹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국은 대북억제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미군은 한국방위의 보조역할을 하면서 지역 안정 역할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역할 분담을 해"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즉, 한미동맹을 지역동맹 수준으로 강화시켜 나가되, 대북 억제력에서는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대중국 봉쇄 전략에서는 미국이 주도적 역할을 각각 해나가는 것이 한미동맹 현대화의 요체이다.
한미간에는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미래 한미동맹 정책구상'을 통해 지금까지 미군이 맡아온 10개 특정임무 가운데 9개를 한국군에게 조기에 이양하기로 합의했다.
여기에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경비책임, 북한 특수부대의 해상침투 저지, 후방지역 화생방 오염제거, 지뢰살포 작전 등이 포함된다. 또한 주한 미 2사단이 주로 맡아온 대포병 작전 계획도 한국군에게 조기에 이양될 전망이다. 이를 두고 정부와 대다수 언론은 자주국방 역량을 강화시킨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내용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하드웨어' 차원에서의 한국군의 역할이 강화되고 있는 반면에, '소프트웨어' 차원에서는 여전히 종속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JSA 경비임무를 이양 받으면서도 유엔군 사령부의 지휘체계는 그대로 유지하기로 한 것이나, 자주국방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전시작전권 환수 문제를 2005년 이후에나 '논의'하기로 한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005년 이후에 논의한다는 것은 '환수'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환수 여부를 그때 논의해본다는 수준이다. 이러한 일정에 따르면 설사 정부에서 '전시작전권 조기 환수'를 추진하더라도 노 대통령의 임기 안에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한국의 자주국방과 주한미군의 변형을 아우르는 한미동맹의 현대화가 '뇌'는 여전히 미국이 차지하되, 대폭적인 국방비 증액을 통해 한국군의 '팔·다리' 근육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한미동맹의 현대화를 통해 한국군의 군사력과 역할이 강화된다고 해서, 이것이 한국의 대미 종속성의 탈피나 미국의 대 한반도 군사전략의 약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한미연합방위체제의 총군사력을 크게 향상시키는 것이 한미동맹 현대화의 골자이기 때문이다. 즉, 지금까지의 한미연합방위체제의 총군사력을 '100'이라고 하고 한국과 미국이 각각 50씩을 맡았다고 가정하면, 앞으로는 총군사력을 '200'으로 높이고 한국과 미국이 각각 100씩을 맡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군의 역할이 '절대치'는 높아지지만 '상대치'에는 거의 변화가 없게 된다. 주한미군이 3-4년에 걸쳐 약 110억달러를 투자해 대대적인 전력증강에 나서고 있는 것이나, 노무현 정부가 국방비를 대폭 증액해 자주적인 대북 억제력을 확보하겠다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국이 노리는 것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이 한국의 '협력적 자주국방' 노선에 불쾌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부추겨왔다는 점이다. 부시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의 외교안보 수뇌부가 틈만 나면, 한국군의 역할 확대와 국방비 증액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부시 행정부는 이와 같은 '동맹의 현대화'를 통해 무엇을 노리고 있을까? 우선 미국은 대북 억제력에서 한국에게 주도적인 역할을 넘기고 주한미군을 '붙박이 형'에서 '신속기동군' 체제로 바꿈으로써 대북 억제력에 약화를 동반하지 않는 주한미군의 역할 변경을 꾀할 수 있게 된다. 동시에 대북한 선제공격 능력은 크게 강화할 수 있는 반면에, 유사시 미국이 입을 수 있는 인적 피해는 크게 줄일 수 있게 된다.
두 번째로 한국에 대한 무기 판매를 크게 늘일 수 있게 돼, 짭짤한 수익도 올릴 수 있게 된다. 연합방위체제에서의 상호운용성과 현재 논의 중인 한국군의 전력증강사업, 그리고 F-X 사업에서도 맹위를 떨친 바 있는 한미관계의 '정책적 고려'를 종합해볼 때, 협력적 자주국방에 필요하다는 수십조원대의 추가적인 예산은 상당 부분 미국의 군산복합체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가게 될 것이다.
세 번째로 미국의 강경파들이 꿈꾸고 있는 '사실상의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체제'의 기초를 닦을 수 있게 된다. 한미동맹의 지역적 역할을 강화한다는 것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동맹의 중심축인 '미일동맹'과의 연계성을 강화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최근 주일미군의 한미합동군사훈련 참가 수준이 크게 높아지고 있는 것이나, 이지스함과 패트리어트에 기반을 둔 '동아시아 미사일방어체제(MD)'가 주한미군의 전력증강 및 한국의 국방중기계획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추진되고 있다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끝으로 미국이 21세기의 전략적 중심 축으로 삼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전진 거점'을 강화하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수식을 달고 전개되고 있는 제국주의 전쟁의 '중간 기지'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전진 거점'은 주로 중국을 겨냥한 것이고, '중간 기지'는 주한미군을 수 일내에 다른 지역으로 차출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용산기지와 2사단이 통폐합될 예정인 '평택·오산'이 그 중심에 놓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대폭적인 군비증강과 한미연합군의 작전계획 변경에 기반을 두고 있는 '동맹의 현대화'는 오히려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미국의 군사적 기득권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주한미군의 병력수가 줄어들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한국이 국방비를 대폭 증액한다고 해서, 미국의 영향력이 줄고 한국의 자주성이 신장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지독한 역설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면 '전환기를 맞은 한미동맹'의 미래는 정치적 수사와 겉모습과는 달리 과거와 별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