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김(64·한국명 김채곤)이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 1996년 군사기밀 누설 혐의로 미 연방수사국에 체포된 후 7년 8개월만의 귀가다.
김씨는 1일(미국시간) 집에서 50마일 떨어진 윈체스터의 교도소에서 자동차를 직접 몰고 집으로 향했다. 오는 7월 27일 만기 출소를 앞두고 모범수에 주어지는 가택 수감(Home Confinement)을 위해서다.
이날 낮 김씨는 버지니아주 애쉬번의 자택에서 모처럼의 자유를 맛봤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한국 국민들에 감사드립니다. 이제부터는 국민들에 진 빚을 갚는 게 급선무입니다."
가족의 품에 안긴 그는 환하게 웃었다. 건강도 좋아 보였다. 부인 장명희씨도 잃었던 웃음을 되찾았다.
7년여만의 '귀향'은 그러나 완전 자유의 길은 아니다. 이날 김씨의 자택을 찾은 감찰관(Probation Officer)은 그에게 만기 출소까지 문밖 출입 금지조치를 설명했다.
"현관과 베란다에도 나가지 못합니다. 외부인 방문과 편지, 전화통화는 가능합니다. 교회 출석과 병원 방문도 할 수 있습니다. 또 샤워는 할 수 있어도 목욕은 안됩니다."
유배지에서의 '위리안치'나 다름없다. 목욕이 허락 안된 것은 그의 발목에 채워진 감시용 전자 발찌가 물에 젖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택 수감은 형기가 끝나는 7월 27일까지. 그러나 그에게는 3년이란 보호관찰 기간이 남아 있다. 이 기간에는 자택 인근지역인 워싱턴 메트로폴리탄 외에는 방문이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 등 해외여행은 원천 불가하며 미국 내 여행도 담당 판사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하다.
김씨의 자택 앞에는 이날 한국 특파원 등 취재진들로 북적댔다. 전화 벨은 연신 울어댔다. 그러나 김씨는 "아직 완전히 석방된 게 아니기에 인터뷰를 사절한다"고 조심스레 손을 내저었다. 부인 장씨도 "아직 몸조심해야 한다"며 취재진에 양해를 구했다. 그를 감옥으로 넣었던 법의 두려움이 그네들의 정신을 옥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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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누구인가. 1940년생이니 올해 예순네 살. 그의 생애 전반부를 생략하면 1969년 미 우주항공국(NASA)을 거쳐 1978년 미 해군정보국(ONI)에서 컴퓨터 정보분석관(Computer Specialist)으로 근무했다.
분단은 1966년 조국을 떠난 한 이민 과학자의 노년기를 바꿔놓았다. 한반도의 현사(現史)와 개입한 '불운'은 1996년 9월 24일 문득 찾아왔다. 공간은 워싱턴 교외의 한 군기지. 기지에서는 국군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주미 한국 대사관 무관부가 주최하는 리셉션이 열리고 있었다. 그는 파티장을 나오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FBI와 해군 수사대에 의해 체포됐다. 미 해군 기밀을 한국 대사관 해군무관인 백동일 대령에 넘겨준 혐의였다.
97년 7월 연방법원은 그에 '간첩음모죄'란 무시무시한 죄목으로 9년형에 3년의 보호관찰형을 선고했다. 이후 환갑이 넘은 그의 외로운 거처는 펜실베니아주의 알렌우드 연방 교도소였다.
"로버트 김은 그의 고용주인 해군 정보국은 물론 미 합중국의 시민으로서의 중요한 책임을 저버리고, 타국(한국)에 대한 사랑을 택했다."
검사의 최후 논고 같이, 적어도 그는 미국에 충성을 서약한 시민권자로서 국가의 기밀을 빼돌린 스파이였다. '안데스 산맥의 이쪽에서 정의가 저쪽에서는 불의가 된다.' 한편으론 파스칼의 말처럼 그는 지구상의 반대편에서는 조국을 도우려 했던 애국자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 1월 그는 집에서 가까운 버지니아주 윈체스터 교도소로 이감됐다. 3월부터는 출소 전 사회적응 교육의 일환으로 밤에는 교도소에서 보내고 낮에는 인근 한인이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일했다. 주말에는 집으로 귀가 조치돼 일요일 저녁 다시 감옥으로 돌아왔다.
세탁소에서는 아침 7시15분부터 오후 5시45분까지 근무했다. 세탁물을 정리하고 손님들에 찾아주는 일이 일과였다. 육체노동은 그에게 처음이었다.
"기술이 없으니 다리미질 같은 일은 시키지도 않아요. 시끄러운 교도소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려고 일부러 오래 일했어요."
그리고 6월의 첫날이 찾아왔다.
- 불완전하나 자유를 찾은 기분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집도 이사를 해 길도 잘 모르겠고, 셀룰러폰에 인터넷 모두 낯섭니다. 빨리 한글 키보드를 익혀 인터넷을 배워야겠습니다."
- 가장 하고 싶은 일은.
"가족에 사랑을 베풀어야겠어요. 특히 손주들에 할아버지란 존재를 심어주고 친해지고 싶습니다. 이 녀석들이 아직은 내가 서먹서먹한가 봐요."
- 감옥생활은 어땠습니까.
"알렌우드는 괜찮았어요. 2명이 한 방을 쓰고… 오전엔 아시안 재소자들에 하루 2시간씩 영어도 가르치고 오후엔 주로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어요. 아시안 지역에 관한 도서와 항소를 직접 하기 위해 법률책을 읽으며 판례연구를 했어요. 저녁엔 건강관리나 건축 강좌를 의무적으로 듣고 오페라를 영상으로 감상하는 시간도 가졌어요. 하지만 윈체스터에선 한 방에 38명이나 수용돼 시끄럽고 시설도 나빴습니다."
- 가장 힘들었던 점은.
"집안 걱정과 정신적 압박감이지요. 아들 같은 간수들이 죄인 취급하고 별것도 아닌데 야단치면 견디기 힘들었어요."
- 김치나 밥 등 한식을 먹을 수 없는 고통이 대단했을 터인데.
"처음엔 그랬지요. 여기서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을 바꾸니 김치나 음식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데요. 지난 3월 처음 집에 와 김치를 먹으니 '아, 이게 김치 맛이구나'란 소리가 절로 나오데요."
- 오랜 수형생활을 이겨내게 한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동포분들과 국민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돈도 보내주시고 와이프한테 쌀과 김치를 담가 보내 주셨습니다. 한국에서도 말도 못할 정도로 격려편지가 쏟아져 왔습니다. 어떤 학교에서는 100여명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보내올 정도였어요. 일일이 답장했고 그 편지들을 모두 보관중입니다."
- 체포 전 궁금점입니다. 비밀 취급에 대한 보안교육을 철저히 받았을 텐데 정보를 건네주는 과정이 너무 허술하지 않았습니까.
"스파이가 아니기에 비밀리에 안했습니다. FBI가 나를 감시하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 백동일 해군무관에 정보를 건네주는 대가에 대해 서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 한국정부에 섭섭한 점은 없습니까.
"말을 안 하겠습니다. 앞으로 살 일이 까마득한데 지난 일을 생각하기 보다 다시 첫 출발을 하는데 신경쓰고 싶습니다."
- 미국의 동포들 중에는 김 선생님 사건으로 2세 자녀들의 미국 내 공직 취업이 어려워졌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압니다. 나 때문에 취업이 안된다는 등의 비판의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 생계는 어떻게 꾸려나갈 계획입니까. 연금은 받을 수 있습니까.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늙은 사람에게 일을 줄지 모르겠습니다. 18년간 해군에서 근무했는데 얼마 안되겠지만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볼 작정입니다."
- 회고록을 쓸 의향은.
"언젠가는 할 것입니다."
- 한국으로 영구 귀국할 생각은 있습니까.
"아직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