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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탑에 헌화분향한 북파공작원들이 거수경례로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충혼탑에 헌화분향한 북파공작원들이 거수경례로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승훈
제단에 놓여진 국화꽃
제단에 놓여진 국화꽃 ⓒ 오마이뉴스 이승훈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실미도'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북파공작원들. 이들은 냉전과 분단국가의 가장 비극적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올초 '특수임무보상지원에 관한 특별법'의 국회 통과를 계기로 북파공작원 명예회복의 길이 열린 가운데 이들을 위해 건립된 '비밀 충혼탑'의 문도 빗장을 풀었다.

비밀 충혼탑은 임무를 수행하다 사망한 북파공작원(HID)들을 추모하기위해 세워진 것으로, 49회 현충일인 6일 처음으로 이곳에서 공개적인 추모행사가 열렸다.

사상 첫 공개 추모행사에 1000여명 발걸음 이어져

이날 충혼탑이 위치한 경기도 의왕시 청계산 중턱에는 전국에서 온 생존 북파공작원들과 그의 가족들, 사망한 북파공작원들의 유가족들 등 1000여명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생존한 대원들과 유가족들은 대리석 제단에 정성스럽게 향을 피워 올렸고 하얀 국화 한 송이씩을 바치며 고인들의 명복을 빌었다.

이들은 충혼탑 앞에서 거수경례를 하기도 했고, 몇몇 대원들은 큰절을 하며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충혼탑이 건립된 것은 김대중 정부시절인 2001년 9월. 지난 3년 동안에는 주로 군 관계자와 일부 북파공작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 추모행사만이 열렸었다.

그러나 이날 생존 북파공작원들은 가족들과 함께 충혼탑을 찾았다. 이들의 복장은 과거 북파공작원 시절처럼 검정색이나 국방색 군복을 입고 베레모를 쓰고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공작원의 모습이 아니었다. 백발이 성성하거나 얼굴에 깊은 주름이 져있는 노인들, 훈련이나 북파공작 중에 입은 부상으로 인해 목발을 짚은 이들도 있었다.

“이제는 많이 늙었네”
“우리들 명예회복과 보상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해"


추모행사를 마친 후 오랜만에 두 손을 마주 잡은 이들은 동료 대원들의 안부를 묻거나 건강을 염려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충혼탑이 세워진 청계산 중턱 일대는 과거 북파공작원의 훈련소가 있던 곳이다. 대원들은 당시 이곳의 이름이 ‘대성목장’이었다고 기억했다. 훈련소를 ‘목장’이라고 빗대서 부른 것.

충혼탑 세워진 곳은 과거 북파공작원 훈련소

경기도 의왕시 청계산 중턱에 세워진 북파공작원 추모 충혼탑
경기도 의왕시 청계산 중턱에 세워진 북파공작원 추모 충혼탑 ⓒ 오마이뉴스 이승훈
1968년 이곳으로 들어와 특수 훈련을 받았던 한 아무개(55)씨의 감회는 남달랐다. 한씨는 “68년 내 나이 18살 때 눈을 감긴 채로 여기로 들어와 어디인지도 모른 채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며 “훈련을 마친 후 다시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고 바로 이곳 충혼탑 앞 길을 걸어 임무수행에 들어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한씨는 “여기서 훈련을 함께 받았던 14명의 대원 중 나 혼자 살아남았다”며 “오늘 추모행사는 사실상 내가 상주”라고 눈물을 글썽였다.

충혼탑 안쪽 지하 방에는 1951년부터 1972년까지 육·해·공군 소속 공작원으로 북파돼 임무수행을 하다 사망한 대원들 2000여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헌화와 분향을 마친 대원들은 이 곳에 있는 동료 대원들의 이름을 확인하고 혹시 빠져있는 이름은 없는지 살펴보기도 했다. 정원조 HID설악동지회 고문은 “현재는 사망한 전체 대원들 중 72년까지의 명단만 정리가 돼 있는데, 하루 빨리 72년 이후에 사망한 대원들의 명단도 올려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HID동지회 “공개된 장소에 충혼탑 세울 것”

비록 공개적으로 추모행사가 열리긴 했지만 이날 자리를 함께한 북파공작원들은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북파공작원들의 실체가 인정됐고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정부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충혼탑을 세운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는 것.

정 고문은 “충혼탑이 세워진 사실이 한편으론 다행스럽지만 이렇게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비밀장소에 만들어 놓으면 누가 추모를 할 수 있겠느냐”면서 “현충일에만 빗장이 풀리는 충혼탑은 소용없는 것”이라고 섭섭함을 표했다.

정순호 HID설악동지회 회장은 “내년부터는 추모행사를 정보사령부가 주관하는 대신 HID동지회가 직접 주관하겠다”며 “국민 모두가 와서 참배할 수 있도록 서울 남산에 충혼탑 건립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추모행사에는 약간의 잡음도 있었다. 원래는 오전 10시로 예정된 공식추모행사의 시간이 군 일정상 9시로 바뀐 것을 두고 대원들이 불만을 터뜨렸던 것.

한상문 HID 특수임무완수회 본부장은 “전국에서 동지들이 행사시간을 맞추기 위해 새벽부터 올라왔는데 군 일정을 이유로 갑자기 시간을 9시로 바꾼 것은 우리를 무시한 행위”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1만3000명 양성된 북파공작원 명예회복 투쟁사
2004년 1월 8일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특별법 통과되기까지

북파공작원(HID)하면 떠오르는 것은 영화 '실미도'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가 일반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2년 3월, 가스통과 쇠파이프를 앞세운 격렬한 ‘광화문 시위’였다. 이후 이들에 대한 언론들의 집중적인 조명과 국민적인 관심이 영화 '실미도'가 천만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됐다.

그동안 북파공작원의 실체 인정은 곧 한국 정부 스스로 정전협정 위반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어서 공식적인 명예회복과 보상은 철저히 외면당해 왔다. 그러는 동안 이들은 살인적인 훈련과 극한 상황에서의 임무수행으로 사회부적응, 가정파탄 등의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까지 양성된 북파공작원의 숫자는 총 1만3000명. 국군정보사령부가 국회 국방위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북파공작원은 지난 51년 육군첩보부대(HID) 창설 이후 94년까지 1만3000여명이 양성됐고 이 중 죽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이 7800여명, 부상자는 200여명에 달한다.

이들은 2002년 3월의 시위 이후 북파공작원 실체 인정, 사단법인설립, 피해보상 등을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2002년 9월에는 프레스센터 19층에서 북파공작원들의 실태와 그들의 요구를 알리기 위한 공식적인 기자회견을 열고 북파공작원들의 인권침해 실태와 비인간적이었던 훈련과정 등을 공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요구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자 2002년 9월 29일에는 영등포역 앞에서 또다시 격렬한 대규모 도심 집회를 열었다. 경찰과 북파공작원 수백명이 부상을 입는 불상사가 발생한 이날 시위로 총 224명이 연행되고 124명이 사법처리 됐다.

그러던 와중 2003년 3월 국가인권위가 특별법 제정을 권고하면서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인권위는 “북파공작원 문제에 대해 정부의 피해구제 노력이 부족했고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 발생한 각종 사건의 피해자를 위한 법률이 제·개정되고 있다”며 특별법의 필요성을 설명했었다.

그 후 2003년 5월 국회에서 김성호 전 의원을 중심으로 특별법안이 마련됐고 이후 8월 법사위에 제출된 법안은 2004년 1월 8일 국회의 만장일치로 통과되기에 이른다.

특별법 통과로 일단 이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위한 길은 열렸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라 현안 해결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원조 HID설악동지회 고문은 "앞으로 보상액수 현실화와 제대로 된 시행령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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