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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달만 바다를 임대할 수 있다면>
책 <한 달만 바다를 임대할 수 있다면> ⓒ 북랜드
시인은 꿈꾸는 사람이다. 시인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꿈꾸고 그것을 마술적인 언어로 표현한다. 그들이 존재하는 일상이야 어떻든지 간에 시인들이 꿈꾸는 세상은 제각기 다른 색깔을 뿜어낸다.

시를 읽는 이들은 시인들의 마술적 언어에 매료된 사람들일 것이다. 시인들이 뿜어내는 온갖 언어의 마술은 읽는 이들의 마음 속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고, 또 그 상상력의 세상 속에서 새로운 삶의 활력과 기쁨을 얻게 한다.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꾸는 시인 김용화의 시집은 이러한 시인들의 꿈을 반영한다. 시인은 서문에서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이야기한다.

"세상의 추한 모습만 보고 노래하는 건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나는 적절한 때의 아름다운 장면을 포착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성이 더 깊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더 긴 상처의 여정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움이란 게 우리 마음 속에 있을진대,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끄집어내는 일이야말로 시인들이 처한 본연의 임무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이 시집은 이와 같은 서정성과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그것이 일상을 떠난 비현실성이 아니라 일상 속에 존재하는 미학이기에 가치가 있고 감동을 준다.

"전철 막차 풍경에 몸을 실었다./ 종말로 몰려가는 모든 것들은/ 느긋한 쓸쓸함과/ 피곤한 기대감을 끌고 간다./ 여자는 무서워진 세상을 잊어버리고/ 남자는 쓰러져 가는 시대를 모르고/ 깊고 싶은 숙면에 접어든다./ 흔들거리는 모든 것들은/ 추억의 뒷골목에 잠기어 가고/ 젊은 우리들 시대는/ 누군가에게 떠밀려 쓸쓸해진다./ 덜컹거리는 시대를 실은/ 막차 풍경은 피곤하지만/ 그가 남긴 뒷모습은/ 어련한 첫차를 향한 희망으로/ 꾸벅거린다." - <막차 풍경> 전문

흔들리는 전철 막차에서 무서운 세상과 쓰러져 가는 시대를 잊고 잠을 자는 사람들. 그들은 일상의 노곤함과 무거움을 잊고자 잠을 청한다. 무거운 어깨와 쓸쓸함, 추억의 뒷골목, 이런 소재들은 우리 삶의 무거움을 더해 준다.

피곤한 막차 풍경이 힘겹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남긴 뒷모습이 아련한 첫차를 향해, 희망을 향해 가기에 우리의 삶은 이겨낼 만한 힘이 있는 것이다. 이 시집은 그러한 희망을 꿈꾸고 노래한다.

시인은 서강대교를 미끄러지는 버스 속에서 밤섬을 보고 새떼를 본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깊은 그리움을 찾을 줄 안다. 일상 속에서 흘러가는 모든 것들은 시인의 언어로 녹아들어 독자들의 가슴에 다가 온다.

"두근거리듯/ 서강대교에 미끄러지는 버스 안에서/ 나는 하늘을 본다./ 강물을 본다./ 그 사이에 머문 밤섬도 본다./ 자유 속으로 비상하는 새떼,/ 그 정처 없는 무리들의/ 허허로움을 잊지 못한다./ 흘러가는 것이 저러하므로,/ 슬플 일이 없다./ 하늘이 은근 슬쩍 미소를 지으며/ 겨울 햇살을 쏟아내는 동안/ 아~ 밤섬의 새떼는 희미하다.// 흘러가는 것이 저러하다." - <밤섬 새떼> 전문

하루 하루의 무료한 일과의 반복에서도 하늘의 미소와 흐르는 강물의 자유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마음. 사실 우리는 이 간단하고 소중한 사실들을 잊고 지낼 때가 많다. 그래서 시집을 읽으며 답답해진 마음을 너그러이 달래 보기도 하는 것이다.

시인이 꿈꾸는 소박한 삶의 가치들은 시 <유언> 속에도 잘 드러나 있다.

"망초꽃과 소나무 가지가 흐드러진/ 오솔길 옆,/ 둥근 바위 위에 앉아/ 무던한 바람을 맞으며/ 졸고 졸고 졸다가/ 그대로/ 바람이 되었으면 해./ 이게/ 내 생의 마지막 모습/ 이었으면 해." - <유언> 전문

욕심을 부리자면 끝도 없이 무언가를 향해 치닫는 우리네 인생에서 가벼운 마음 한 조각을 갖고 살아가기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작가는 시 한 편을 통해 그 가벼운 소망을 전하고 독자로 하여금 삶의 무거움을 떨쳐 버리도록 유도한다.

그렇다고 하여 현실을 망각하는 것은 아니다. 시 <한 달만 바다를 임대할 수 있다면>은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어조로 아름다운 바다를 임대하고 싶은 소망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마지막 연에서 "그런데/ 임대료는 어디서 구하지?" 라는 풍자적 어조로 독자들에게 웃음을 던진다.

아무리 낭만적인 생각으로 꿈을 꾸어 봐도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자각한 것이다. 시 <추억 감상법> 또한 망각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 "80년대 열정으로/ 겨우 90년대를 먹여 살렸고..." 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이 시는 격동의 8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시인의 자기 성찰이 담겨 있다.

"회색 추억들이 넓은 공간으로/ 염치없이 쏟아지고/ 뒷켠에 남겨지는 묵직한 소리들이 수북수북,/ 자유로가 좁아지듯/ 내 갈길도 좁아지고/ 죽음의 공간이 문득문득 펄렁거린다.// 이제는 되돌아가야 한다./ 정 안되면 고개만이라도/ 180도 비틀고 서야 한다." - <추억 감상법> 중에서

80년대에 쏟아 부었던 젊음에 대한 보상은 없다. 하지만 거기서 얻은 인생의 쓰라린 고통과 교훈으로 세상의 다른 모습을 바라 볼 수 있다면 그 삶은 가치 있을 것이다. 아무런 느낌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180도 고개를 꺾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시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할 삶의 진실이 아닐까 싶다.

한 달만 바다를 임대할 수 있다면 - 시사랑 시인선 34

김용화 지음, 북랜드(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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