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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먼 지하세상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얼마나 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는 손발이 묶여졌고 그 상태로 당나귀 등에 실린 채 흔들리며 가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자기가 당한 일을 실감할 수가 없었다. 왜 이런 일을 자기에게 왔는지 차근차근 되짚어볼 여유도 없었다. 그는 오직 지휘 검과 천둥이, 금괴와 함만 을 생각하고 또 갈망했다. 이미 자신의 손에 닿을 수 없는 그것들만 애절하게 불러댔다.

그러다가 그는 깨달았다. 자신에게는 모든 것이 떠나고 남은 것은 무력한 육신 하나뿐이라는 것을. 진실로 그것뿐이라는 것을. 그는 통탄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은 자신의 부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지휘 검에는 물이 들어가면 아니 되는 것을, 칼집만은 비조차 피해야 한다고 아버지가 일러주었거늘, 그런데도 그만 물속에 잠기게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들은 더 이상 그를 보호할 수가 없고, 묶이고 끌려가도 구해줄 수가 없는 것이다.

'아아, 태왕이시여! 제가 잠깐 정신을 놓아 이런 일을 당했나이다. 부디 용서해주소서.'

그는 애절한 마음으로 태왕께 빌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은장수와 책임선인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또 얼마나 절망할 것인가. 그리고 별읍장과 아버지는….

'아버님, 소자, 변명이라도 하고 싶사옵니다. 하오나 소자에겐 이 소식을 띄울 방도조차 없나이다….'

딜바트를 지나 셈족의 땅 티드눔 사막으로 들어섰다. 아직 여름도 아니건만 그 사막에는 불볕더위가 내려 쪼이고 있었다. 그는 목이 말랐다. 그러나 호송원에게 물을 간청할 마음이 없었다. 이처럼 햇볕과 갈증에 시달리다보면 마침내 자신의 육신은 어포처럼 말라들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라도 해서 신들과 태왕에게 자신의 죗가를 치르고 싶었다.

사막의 햇살은 이상했다. 타는 듯한 갈증을 주는가 하면 곧 또 수마를 안겨주는 것이었다. 그는 그 잠이 고마웠다. 사막에서 맞는 수마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것이 길면 죽게 된다는 것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더 그 잠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포효와 같은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번쩍 눈을 뜨고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저만치 복사열 속에서 어른거리며 달려오는 물체, 역시 천둥이었다. 그 땡볕 속에서도 녀석이 따라오며 에인에게 잠들지 말라고, 잠들면 죽는다고 그렇게 일깨워준 것이었다.

'아아, 천둥아….'
호송원들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도 천둥이를 본 것이었다. 한 호송원이 에인의 나귀 고삐를 바짝 잡아챘고 다른 두 사람은 창을 쳐들었다. 더 가까이 오면 당장 창을 날리겠다는 태세였다. 그럼에도 천둥이는 달려오기만 했다.

녀석은 에인이를 구출하거나 배에라도 태워 달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제 몸은 쇠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면서, 창이 자기 몸도 뚫을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마침내 한 호송원이 창을 날렸다. 그러자 나머지 한 사람도 창을 겨누고 천둥이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안돼! 천둥아, 달아나!"
에인이 소리쳤다. 천둥이도 알아들었는지 뒤로 물러났다. 호송원들도 알고 있었다. 자기네들의 당나귀로는 그 말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추격을 하자 에인이 호송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쫓지 마시오! 그는 곧 떠날 것이오!"

비로소 호송원들도 포기하고 돌아왔다. 그러자 에인을 지키고 있던 호송원이 먼저 나귀고삐를 왈칵 잡아당겼다. 어서 여기서 떠나자는 신호였다.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고 에인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자기가 돌아보거나 알은 체를 한다면 천둥이는 더 가까이 다가올 것이고, 그것은 곧 자신이 천동이를 죽음의 길로 유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럴 수는 없었다. 녀석이라도 살려서 보내야 한다. 그는 앞만 보고 가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천둥아, 지금은 때가 아니야. 그러니 넌 책임선인에게로 돌아가거라. 어서 가거라…."
십리쯤 왔을 때 또다시 천둥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천둥만큼 큰 울음이었다. 그러나 에인은 돌아보지 않았다.

해가 저물어갈 때 저만치 물웅덩이가 보였다. 호송원들이 저희들끼리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모두 나귀를 세웠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다가와 에인을 나귀 등에서 내려주었다.

'물을 마시기 위해서라면 왜 나는 여기서 끌어내리는가?'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한 호송원이 다시 그의 발목을 묶기 시작했다. 움직일 수 있는 만큼의 간격을 두고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그들은 에인을 나무쪽으로 밀었다. 그 아래에서 좀 쉬라는 뜻이었다.

그가 나무 아래에 주저앉자 호송원들은 나귀를 끌고 모두 물웅덩이로 갔다. 하긴 에인의 나귀도 물을 먹여야 했을 터이다.

에인은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회초리 같이 여윈 줄기가 산발한 것처럼 뻗어 있는 메스키트였다. 그 나무는 그늘을 만들어주지 않았음에도 에인은 반가웠고 또한 땅에 발을 딛는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 그는 엉덩이를 비벼댔다. 촉촉한 땅의 기온이 수액처럼 척추로 타고 올라왔다. 그 땅에 자기 몸이 꽂힌다면 메스키토보다는 볼품 있는 나무가 될 것 같았다.

"나도 물 좀 주시겠소?"

에인은 물웅덩이 쪽을 향해 소리쳤다. 세수를 하던 호송원이 몸을 일으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묶인 손을 쳐들어 물 마시는 시늉을 해보이자 호송원은 알아듣고 물주머니를 쳐들어보였다. 곧 가져다주겠다는 대답이었다. 그는 다리를 쪽 뻗었다. 비록 묶여 있다 해도 뻗을 수 있다는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기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두 다리가 땅에 박힌다면 두 그루의 나무가 될까? 그래, 어쨌든 물까지 마신다
면 내 몸은 정말로 나무가 되어 금방이라도 푸른 잎이 돋아날 것이다. 그러면 천둥이도 마음 놓고 다가와 나와 함께 놀아줄 테고…. 비록 내 몸은 움직일 수 없다 해도 천둥이는 오래오래 머물러줄 것이었다.

호송원이 그의 앞에 물주머니를 놓아주고 다시 물웅덩이로 내려갔다. 에인이 물주머니를 들어 머리에 물을 쏟아 부었다. 시원했다. 가슴과 엉덩이에도 물을 부었다. 잎이 난다면 몸 전체에서 돋아나야 푸르고 탐스러운 나무가 될 것이었다. 그가 한창 그렇게 물을 끼얹고 있을 때 저만치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너 벌써 오니? 난 아직 나무가 되지 못했는데?'

그는 놀라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천둥이가 아니었다. 말 두 마리가 사람을 태우고 달려오는 중이었다. 혹시 제후? 아니면 촌장? 그들이 나를 구하려고 오는가? 정말 그러한가?

그는 또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좀더 자세히 보려고 눈길을 모았다. 둘 다 머리에 흰 천을 둘러써서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제후나 촌장은 아닌 것 같았다. 더욱이 그들은 에인은 본 척도 앉고 곧장 호송원들 앞으로 가 거기서 발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말에서 내려서는 서둘러 물을 마시는 모습이 사막을 왕래하는 장사꾼들인 모양이었다.

에인은 다시 물주머니를 들고 나머지 한 방울까지 모두 가슴에 쏟아 부었다. 그때 한 사람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말을 타고 온 그 행인이었다.

"절 알아보시겠는지요?"
상대가 에인이 앞에 앉으며 그렇게 물어왔다. 어디선가 본 듯했으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에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오."
"촌장의 아들입니다."
"아, 그래요? 하다면 어쩐 일로 여기까지?"
"아버님께서 장군님을 도와야 한다고 이렇게 보내셨습니다."
"돕는다면 어떻게?"
에인은 귀가 번쩍 뜨여 그렇게 물어보았다.

"저는 모카 부두까지만 장군님을 모셔다 드리고 저 호송원들과 함께 되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온 저 청년이 장군님과 함께 배를 타고 저 세상까지 따라갈 것입니다."

결국 유형지까지 가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에인이 시큰둥해서 대답했다.
"저 세상이라면 죽으러 가는 곳이 아니오? 어떤 기특한 청년이 나와 함께 죽으러 가겠단 말이오? 난 그런 동무 필요 없으니 이만들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래도 저희들이 있어야 편하십니다."

그리고 청년은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에인의 손목을 풀어주었다. 에인은 풀린 손이 믿어지지 않아 활짝 펼쳐보았다.
"확실히 편하군."
에인이 절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청년은 에인이 두 손목을 잡고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벌써 멍이 들었군요. 그러나 깊지 않으니 곧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청년이 주머니에 칼을 집어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에인이 급히 물었다.
"어째 다리에 묶인 것은 그냥 두시오?"
"예, 그것은 밤이 되어야만 합니다."
"밤? 그건 또 왜 그러오?"
"호송원들이 알면 안 되니까요. 그들이 잠들면 그때 제 친구가 와서 풀어드릴 것입니다."

밤에 발목마저 풀린다면 여기서 달아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잠든 사이에 살며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천둥이만 곁에 있다면…. 그는 떠나는 청년을 다시 불러 세웠다. 청년이 돌아보자 에인이 물어보았다.

"혹시 오는 길에 내 천둥이를 보았소? 녀석이 따라온 것 같은데…."
"아니오, 보지 못했어요."
청년은 그렇게 간단히 대답한 후 서둘러 일행들 쪽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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