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갯길에 56번 지방도로를 알리는 푯말이 있었다. 이제 '56'이라는 숫자를 볼 때마다 지금처럼 마음이 무거워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곳에 효순이, 미선이의 추모비가 서 있었다.
2002년 6월 13일 오전 10시경, 바로 이 고갯길에서 미 2사단 44공병대 소속 워커 마크 병장이 운전하는 전차에 치여 두 소녀가 우리 곁을 떠났다. 화가와 안무가가 되는 게 꿈이었던 두 소녀는 당시 친구의 생일 잔치에 가는 중이었다. 미군은 당시 6.6m였던 도로폭을 훨씬 넘는 전차를 무리하게 이 고갯길로 운행시켰다.
그 아이들이 살해당한 지 어느덧 2년이 흘렀지만 과연 무엇이 달라진 걸까. 나중에 그 애들을 만나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 혹시라도 사람들이 그 때의 참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가슴에 묻어 두려는 건 아닐까. 혹시라도 먼 옛날의 일처럼 이 고갯길에서 벌어진 비극을 벌써 잊어버린 건 아닐까. 겁이 났다.
효순이 미선이의 추모 2주기를 맞아 매스컴은 그 날의 참상을 다시 되새길 수 있게 해 주었다. 내 마음 속에서 잊고 있던 그 때의 충격과 분노가 다시 살아났다. 그래서 추모비라도 한번 직접 보고 싶었다. 그곳에 가서 직접 명복을 비는 기도라도 한번 올려주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추모비에는 교복을 입은 앳된 얼굴의 효순이와 미선이가 아직도 웃고 있었다. 해맑은 두 소녀의 모습은 영정 사진 액자와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그 참을 수 없는 부조화가 내 마음을 다시 뜨겁게 만들었다. 시든 국화꽃들이 영정 앞에 놓여 있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 간 국화꽃을 그 아이들 앞에 바쳤다.
조금 걸어가자 120가구 350명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효촌리 마을이 보였다. 평화로운 마을에 살고 있는 소녀들의 부모와 가족의 마음은 또 어떨까. 우리는 왜 이리도 쉽게 잊는 걸까.
두 소녀의 부모님은 나와의 만남을 거부하셨다. 그 때 일을 다시 떠올리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기자들이 와서 같은 말을 묻고 또 대답하고, 대답하면서 또 아픔으로 가슴이 다시 저미고… 그 반복이야말로 지독한 고문과 다를 바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돌아섰다. 돌아서면서 어금니를 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여자는 잊혀진 여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비단 여자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잊혀진다'는 사실에는 비애감이 있다. 영원히 잊혀진다는 건 그래서 겁나고 무서운 일이다.
여중생 장갑차 사건과 같은 참사를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걸 잊지 않는 것'이다. 또한 망자(亡者)에 대한 최고의 사랑은 '그 사람을 잊지 않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독일 시인 브레톨트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떠올렸다. 우리는 살아 남아서 그 소녀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 일은 아프고 힘든 일일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슬픔이 밀려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살아남은 자의 의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