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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님, 제 이름을 알고 계시지요?"
에인이 엔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숙소로 안내할 때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엔키 공이라고…."
"끝에 '키'라는 발음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으셨습니까?"
"아니오, 별로…."
"본래 환족식 발음으로는 에인기랍니다. 에인 장군님 이름에서 기 하나가 더 붙었지요. 그걸 줄이거나 빨리 부르면 절로 엔키가 되기도 하지만요."
"……."
"그래서 딜문 사람들은 엔기라거나 혹은 엔키라고 불렀답니다."
"딜문 사람들?"
"예, 저는 딜문에서 태어났지요."
"그랬군요."
에인은 비로소 자기가 여기에 온 내력이 짐작이 되었다. 아마도 두두 외삼촌이나 제후가 이곳으로 보냈을 것이다. 엔키가 딜문에서 태어났다면 그들도 이미 서로가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중간에 촌장의 아들을 보내 유배지를 이곳으로 돌리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다.
'한데 그 마을 장로들은 내게 왜 그런 벌을 내렸는가?'
문득 또 그 장로들의 재판이 생각났고 그러자 불끈 화가 치밀었다. 에인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새삼스런 분노가 불길을 당겼다. 저희들이 뭔데 타국 사람들의 행위까지 간섭하고 또 벌을 내리는가! 게다가 유배라니! 에인이 다시 술잔을 들자 엔키가 그 빈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제가 본국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돌아온 다음 해에 이곳 공주를 만났지요."
에인은 슬며시 술잔을 놓았다. 지금 엉뚱한 생각으로 화를 끓이느니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더 낫겠다 싶었다. 더욱이 촌장과 제후는 자기의 고통을 줄여주려고 여기에 보냈고, 또 어쨌거나 이 사람은 잘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에인이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고 귀를 기울여주자 엔키는 마음 놓고 자기 이야기를 펼쳐나갔다.
"에리두에서 음악제가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때 이곳 공주도 그 구경을 왔는데,내 비파 솜씨에 그만 반해버렸지요. 나에게도 공주는 참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비록 얼굴은 검었지만 눈이 크고 맑았지요. 또 부유한 왕국 멜루하의 공주라니 호감도 갔구요. 어쨌거나 우린 당장 사랑에 빠졌고 또 결혼까지 했습니다."
"……."
"한데 이 왕국에 와서 살아보니 밖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이야 호화롭고 평화로운 나라라고 할 테지만, 사실은 왕손이고 귀족이고 모두 한 자리에 고여서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엔키의 이야기는 비약이 심해 결혼을 거론 하는가 했더니 어느새 왕궁의 흐름으로 넘어갔고 뒤이어 제3자처럼 평판을 해대는 것이었다.
"이 왕실은 지금 너나없이 무료와 권태라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이들은 이제 사치에도 매력을 잃었지요. 검은 대륙에서 최초로 번성하여 경쟁자도 없이 독주해왔고 이제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공룡 왕궁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긴장과 갈등이 사라진 탓입니다."
"……."
"그렇지 않습니까? 왕국의 순환 고리는 적당한 긴장과 갈등이며 그것을 잃으면 순환은 막히고 스스로 썩게 되지요."
"……."
"지금 이들이 그렇습니다. 왕손이고 귀족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술과 성도착에만 빠져 있습니다. 왜냐구요? 그것밖에 생각하거나 행동할 게 없기 때문입니다."
"……."
"장군님, 이곳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닙니다. 에리두만 해도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사람살이가 있고 활기가 있고 또한 음악이 있지 않습니까? 에리두는 정말….'
에인은 그만 정신이 없어졌다. 입으로 나오는 대화도 예사롭지 않은데 거기에다 몸동작까지도 많아서 '경쟁자도 없이 독주해왔고…'할 때는 팔소매까지 썩 걷으며 오른손을 휙 내밀었고 '순환고리'를 거론할 때는 손가락을 걸어 그것이 뚝뚝 떨어지는 표현까지 해보였다.
뿐만 아니었다. 입은 논쟁자처럼, 손과 발은 무술을 하듯 내젓기도 해서 에인은 엔키의 어느 동작에 집중해야 할지 종잡을 수도 없었다. 눈을 바라보면 다음 순간 손이 쳐들렸고 그런가 하면 어느새 또 어깨가 움직였다. 또한 에리두를 거론할 땐 눈빛이 불타올랐고, 입에서는 어떤 열기까지 훅 끼쳐왔다. 자신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를 그는 왜 그렇게 열을 내서 설파하는 것인가.
에인은 그만 이 사나이 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이게 시험이라 해도 통과하고 싶지 않았고 벌이라 해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는 처지.'
에인이 꿀먹은 벙어리처럼 탁자만 내려다보고 있자 엔키가 눈치를 채고 말머리를 돌렸다.
"아, 오랜만에 우리말로 이야기를 해보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군요."
그리고 엔키는 허허 웃으며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는 그 술을 주욱 들이키며 '이 장군의 환심을 사야 한다'고 다시 한번 속으로 다짐했다.
제후의 전령이 도착한 것은 사흘 전이었다. 배를 타고 앞질러 왔다는 그는 '곧 소호의 장군이 당도할 것이다, 모카 부두까지 나가서 영접하라, 그가 장차 이곳에서 새로운 제국을 세우실 분이다'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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