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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부터 그의 두뇌는 뱃전의 깃발보다 더 분주하게 펄럭거렸다. 조그마한 딜문이 제국이 된다면 최소한 5,6개의 도시는 장악해야 한다. 그러면 각 도시마다 제후국이 될 것이고, 그때 나는 기필코 에리두를 가져야 한다.
오, 에리두! 얼마나 오래도록 너의 꿈을 꾸어왔던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이곳 왕자들과 공후들에게도 몇 차례나 설득해보았던가. 하지만 그 썩은 비계 머리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내 그 기회가 온 것이다. 그래, 에리두는 내가 가져야 한다. 그 아름다운 도시, 항구의 도시, 예술의 도시….
엔키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에인에게 춤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 춤을 보면 에인이도 자기가 얼마나 소호 국 전통을 지켜왔는지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본래 춤이란 천 마디의 말보다 의사소통이 더 빠른 법, 게다가 장군은 지금 고국이 그리울 것이니 금방 감동할 것이다.
한데 그때였다. 엔키가 미소년에게 막,'봉무 곡을 뜯어라'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두 여성이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공주와 닌이었다.
공주는 곱슬머리를 양편으로 갈라 각각 수십 가닥으로 길게 땋아 내린 뒤 그 위에 짧은 너울과 관을 썼고, 닌도 그 치장이 화려했다. 앞머리는 눈썹까지 가지런히 덮여 있었고 옆머리는 귀 뒤에서 양 갈래로 묶었는가 하면 머리 둘레로는 꽃 관을 쓰고 있었다. 그 꽃 관도 빨갛고 노란 꽃으로 엮어진데다 긴 드레스에 화장까지 하고 있어 누가 봐도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에인은 그 방문객들이 구세주 같았다. 하지만 어찌하여 이 선녀 같은 여성이 별안간 구세주로 나타났는지 그저 어리둥절했다. 한 사람은 얼굴이 검어 공주라는 것을 짐작하겠는데 피부색이 다른 저 여성은 또 누구란 말인가. 비파 소년처럼 환족 음악가인가?
그러나 그 여성은 나비처럼 사뿐사뿐 걸어와 에인 자기 곁에 가만히 앉는 것이었다. 음악가가 아닌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드레스로 접어 무릎을 감싸면서도 눈은 잠시도 떼지 않고 에인을 바라보았다.
에인은 그녀가 누구인지도 알아보지 못한 채 그만 그 눈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녀의 눈 속에는 매혹적인 아지랑이가 표표히 피어났고 입가에는 신비한 미소까지 흘러넘쳤다.
'신녀다! 나를 위해 누군가가 보내준 신녀다!'
에인이 마음속으로 그렇게 외칠 때 엔키 역시 덕담을 보탰다.
"참, 잘 어울리십니다."
그때 공주는 엔키의 허리를 만지작이면서 말했다.
"부럽지 않아요? 우리도 저 시절에는 진종일 붙어 있을 수 있었는데…."
다행히 공주는 멜루하 말로 했고 그 말을 알아들은 사람은 엔키 뿐이었다. 엔키는 그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닌에게 말했다.
"오늘은 여독을 풀어야 할 것이다. 그만 가서 쉬어라."
그는 아직 에인과의 일이 끝나지 않았고 그래서 어서 닌을 쫓아버릴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던 것인데 먼저 일어나는 사람은 닌이 아닌 에인이었다. 그는 그저 일어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닌의 손까지 잡고 다급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둘만이 있는 곳으로 갑시다."
그들이 서둘러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앞선 사람은 에인이었다. 그들이 계단 위로 올라갈 때 공주가 말했다.
"내가 예쁘게 신방까지 꾸며 두었다오. 사방에 허브 꽃다발을 놓았고 문에는 커튼을 드리웠지요. 물론 과일도 준비했구요. 사랑 한번에 바나나와 사탕야자 술, 그리고 또 사랑…. 아, 저들은 오늘 밤 잠잘 시간이 없을 거에요."
"……."
"여보, 우리는 이제 달빛 정원으로 나갈까요? 거기서 사랑놀이를 해요. 달도 바람도 시샘을 내도록 흠씬 사랑에 취해 봐요."
공주가 그의 허리를 더욱 조이며 말했다. 엔키는 그 손을 떨쳐내고 벌떡 일어나며 미소년에게 지시했다.
"어서 가서 쌍검을 가져오너라."
엔키는 소년이 쌍검을 가져올 때까지 술을 마셨다. 취기도 오르지 않는데 달빛만 저 홀로 정원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공주가 그의 손에서 술잔을 빼내며 다시 간청했다.
"우리 정원으로 나가요, 어서…."
그때 소년이 검을 가지고 돌아왔다. 은으로 만든 장식용 쌍검이었다. 엔키는 공주를 물리치고 소년에게 말했다.
"너는 비파를 뜯어라."
그는 쌍검을 들고 홀 가운데로 나가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소년의 비파는 점점 격정적으로 흘렀고 그의 양손에 잡힌 쌍검에서도 빛이 번쩍거려 정원의 달빛까지도 소리 없이 잘라버릴 것 같았다.
마침내 공주가 몸을 일으켜 연회장을 떠나갔다. 엔키의 춤은 홀로 절정에 올랐고 그는 그 절정에 온 몸을 떨 듯 칼날을 휘둘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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