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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7월, 미군 전용 스토리사격장에서 작업하던 농민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이날 미군이 쏜 박격탄에 한 명이 사망하고 다른 두 명은 미군 헬기에 실려 후송됐다. 스토리사격장이 73년 주한미군에 공여된 이후 포탄에 의한 첫 민간인 사망사건이 발생한 것.

사건 발생 15년이 지난 7월 3일 당시 미군이 쏜 포탄에 사망한 조남춘씨의 아들 조영구씨를 만났다. 최근 매향리사격장 폐쇄 결정 이후에도 스토리사격장 인근 주민들은 답답하기만 하다. 세간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매향리 폭격장 폐쇄 투쟁와 비슷한 시기에 이곳에서도 스토리사격장 폐쇄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언론과 시민단체의 무관심 속에 상처만 받은 채 투쟁을 접어야 했다. 특히 조씨는 아버지의 죽음을 최근 당한 일처럼 분통과 울음을 참지 못해 소주 한병을 들이키며 당시 상황을 털어 놓았다.

▲ 조남춘씨의 유족 조영구씨. 그는 인터뷰 내내 울화통이 터지는지 소주를 연신 들이켰다.
ⓒ 박신용철
"그날 동생하고 일을 같이 가는데, 맨날 이 양반이 늦게 나오다가 이날 따라 서두르시는 거야. 우리 보고 빨리 안 온다고 그러시는 거야. 그 양반이 왜 그렇게 서두르나, 이상하다 싶었지."

조영구(50·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장파리)씨가 아버지 조남춘씨를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이다. 아버지 조남춘씨와 조영구씨 그리고 조씨의 동생은 이날도 참외, 배추 농사를 짓기 위해 사격장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얘야, 막걸리나 한잔 먹고 하자"는 아버지의 말에 조씨는 금세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참외밭으로 건너 왔다.

"5분쯤 지났나, 땅하고 박격포를 쏘는 거야. 우리는 거기서 포 쏘는 것을 많이 봐서 어디쯤 떨어지는지 알아. 이날은 무척 가깝게 쏘더라구. 그런데 집안 형님이 고개를 넘어오면서 소리를 지르며 사람을 찾는 거야. 포를 쏴가지고 사고가 났다면서…. 쫓아내려가서 논에 가 보니까, 그냥 그 자리에서 아버지가 즉사하셨어. 이 새끼들 박격포 영점을 잡아 세발을 쐈는데 두발이 아버지 앞뒤로 떨어졌어."

조씨 일가가 농사를 짓던 곳은 독죽골로 한국전쟁 이전부터 풍양 조씨들이 모여 살던 집성촌 지역이었다. 특히 조씨의 아버지가 사망한 곳은 피탄지 우측으로 통상 포 사격을 해도 피해가 없었으며 사격을 시작할 때면 사람들에게 나가라고 하는 지역이었다.

15년이 흘렀지만 조씨가 아직도 울분을 삭히지 못하는 것은 주한미군이 영농 활동을 하는 민간인을 향해 영점 사격을 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주한미군과 한국 당국이 사건 처리 과정에서 보여 준 행태 때문이다.

조씨의 아버지가 주한미군의 조준 사격으로 사망하자 주한미군 ○○처 관계자가 찾아와 사고가 난 확인서를 써 주면서 "이 정도(2500만원) 보상이 나올 것"이라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그리고 서류에 사인만 받고는 사과도 없이 가버렸다.

조씨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해 재판을 할 생각도 해 보았지만 변호사 비용 500여만원이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 가지고 농사짓고 사는 사람이 배운 게 있어? 어디 가서 뭘 해. 그것도 미군을 상대로. 한국 사람이 그랬다면 경찰서라도 가지만. 웃기는 게 뭐냐면 사고가 났는데도 아무 것도 안하고 가더라구. 경찰도 그냥 구경만 하고 당시 1사단장도 와서 구경만 하고 가더라구."

주한미군 관계자의 말과 달리 보상금으로 나온 금액은 고작 400여만원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명줄과 바꾼 돈이었다. 당시 주한미군은 조씨 아버지(73)가 고령이라는 이유로 보상금을 애초보다 줄였던 것이다.

"왜 포탄 떨어지는 데서 농사를 짓냐고? 먹고 살아야지"

스토리 사격장 인근은 풍양조씨, 원주김씨 등 조선시대 권문세가들의 집성촌이 자리하던 곳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자 이들은 지뢰와 포탄이 떨어지는 가운데서도 '먹고살기 위해' 땅을 개간해 삶을 개척해 왔다.

"실제 농사짓는 사람이 아니면 이해를 못한다구. 거기 들어가서 농사를 안 지으면 굶어 죽으니까 목숨 걸고 가는 거지. 그렇다고 포 떨어지는 데도 아니었고."

풍양조씨도 한국전쟁부터 스토리사격장에 집성촌을 이루며 농사를 지어 왔다. 한국전쟁 당시 주한미군이 스토리사격장(공여되기 이전임)에 주둔하면서 생활 터전에서 쫓겨나와 인근 파평면 장파리 일대로 옮겨 와야 했다.

"거기가 고향 동네고 거기가 집터야. 한국전쟁 전에 살았던 지역이라구. 고향 땅에 자연스럽게 당신네들이 졌던 농사터니까 가서 자연스럽게 농사를 지었던 거라구. 땅이라는 존재가 '생명'이었어. 포탄이 떨어지던 말던 그걸 버리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게지."

조씨의 아버지 사망 이후에도 스토리사격장에서 인명 피해는 잇따랐다. 사업에 실패한 유아무개씨가 먹고살기 위해 사격장 내 고철을 줍다가 포탄 불발탄으로 사망했고 이기현씨의 가족 중 한명도 사망했다.

그리고 주한미군은 2006년 완공을 목표로 사격장 주변 11.5㎞에 걸쳐 철책 울타리를 쳐놓고 총 10여 개의 사격장 건설을 하고 있다. 주한미군이 내세운 명목은 지역민들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것. 스토리 사격장 총 공사 비용은 3120억원으로 철제 울타리 공사 비용을 제외한 모든 비용을 한국이 부담하도록 되어 있다.

조영구씨는 스토리사격장에 문화재가 산적했다는 것과 주한미군 폭격으로 문화재가 훼손된 것을 직접 목격한 장본이기도 하다.

"포탄지 위로 묘가 큰 게 있었는데 산소가 날라간 거야. 봉분이 어마어마한 게 있었어. 처음엔 봉분을 피해 떨어지더니 결국 다 날라갔어. 10년 전 만해도 여기저기에 산소들이 있었는데…. 피탄지에 가면 비석 같은 파편 조각들이 있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재보호법을 위반한 주한미8군 사령부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불법공여를 한 국방부는 "주한미군에서 분묘에 대한 상징성을 감안,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일 예정"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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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2002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위원 2002년 3월~12월 인터넷시민의신문 편집위원 겸 객원기자 2003년 1월~9월 장애인인터넷신문 위드뉴스 창립멤버 및 취재기자 2003년 9월~2006년 8월 시민의신문 취재기자 2005년초록정치연대 초대 운영위원회 (간사) 역임. 2004년~ 현재 문화유산연대 비상근 정책팀장 2006년 용산기지 생태공원화 시민연대 정책위원 2006년 반환 미군기지 환경정화 재협상 촉구를 위한 긴급행동 2004년~현재 열린우리당 정청래의원(문화관광위) 정책특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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