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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 바람이 한반도를 세차게 강타할 때에도,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다양한 요법과 약품들이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화려하게 장식할 때에도, 어디서부터 날아왔는지 모를 웰빙 열풍을 타고 너도나도 건강관리에 나서고 있는 요즘에도 초심을 잃지 않고 거실 한쪽 소파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나였다.
평소 건강관리와는 마치 담이라도 쌓은 양 강제로 끌려가지 않는 운동이라면 자발적으로 참여해 본 일이라고는 거의 없는 나. 하긴, 생각해보니 어려서부터 움직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한동안 인근 스포츠센터에서 수영 강좌에 시선을 돌려봤지만 이마저도 그저 아침에 보다 일찍 일어나 보자는 생각이 더 많았던 듯싶다.
근래 들어 서른둘이라는 아직은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도 뒷목이 자주 뻣뻣해지고, 쉽게 지치고, 매사에 의욕이 일지 않아 슬럼프에 빠진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그 원인을 알아보겠다며 종합건강검진을 받는다는 것도 극성스러워 보였다.
주변에서는 이런 나의 증상이 몸을 너무 움직여 주지 않아 발생한 퇴행성 증상의 시초라는 다소 자극적 진단을 내려주었다. 물론 처방전은 규칙적 운동이었다. 이에 실로 다부진 결심과 함께 적당한 운동거리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썩 내키는 종목이나 마땅히 끌리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찮게 걷기운동부터 시작하라는 누군가의 조언을 듣게 되었다.
마침 마을주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인근 공원의 운동장이 떠올랐다. 집에서 5분이면 닿을 거리인데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운동하던 사람들을 익히 보아왔던 터. 하지만 내 발로 운동하겠다고 찾아온 것은 이사 온 후 이날이 처음이었다. 장장 2년 만이다.
첫날 운동화끈을 질끈 매고 집을 나서는 순간,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셋이 좋을 것 같아 집사람과 가족처럼 함께 사는 강아지 ‘아롱이(마르티스, 생후 5개월)’를 안고 나섰다.
속보로 걸어야 하는 걷기운동은 경쾌하거나 그리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지루하지도, 만만하지도 않았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제법 땀도 나고, 숨도 차올랐다.
한 시간이나 흘렀을까. 집을 나설 때부터 왼쪽 팔에 계속 안고 있던 아롱이가 무겁게 느껴졌다. 2Kg에 육박하는 녀석의 중량감은 피로가 되어 어깨와 허리까지 몰려왔다. 순간 ‘그래, 너도 이 운동장을 한번 마음껏 뛰어놀고 싶겠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내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까지는 그로부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인의 품을 떠난 녀석은 천방지축 온 운동장을 휘젓고 다녔다. 걷고 달리는 사람들 속을 온통 헤집고 뛰어 다니며 사람들을 위협(?)했다.
사고를 직감하고는 다급하게 녀석을 불러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다소 낯선 환경이기에 말을 잘 들을 것이라는 속단은 빗나갔다. 이제 겨우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한 꼬마들에게 달려들어 아이들을 울리고, 달리는 자전거 앞을 갑작스럽게 뛰어들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축구장은 일순간에 아수라장이 됐고, 롤러 블레이드를 타는 사람들도 깜짝 놀라 가던 길을 멈춰 섰다.
불쑥 달려든 강아지 한 마리의 때 아닌 습격에 당황한 사람들은 “주인이 누구냐”며 원성을 쏟아냈다. 아이들은 이내 울고불고, 여기저기서 엄마들의 항의가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연발하며 재빨리 자리를 피하는 내게 어떤 아주머니가 “개를 데리고 공원에 나오면 어떡해요?”라는 따끔하게 질책했다. 아주머니의 팔에는 울고 있는 아이가 안겨 있었다.
민망한 얼굴로 황급하게 운동장을 빠져 나와 녀석을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공원에 애완동물을 데리고 갈 수 없다는 공동체의 규칙을 잊은 실수도 그렇거니와 내겐 가족 같은 녀석이라서 모든 사항이 이해가 되고, 귀엽게 보일 수는 있겠지만 타인에게는 귀찮고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너무 간과했다. 또 때론 예기치 않은 위험한 상황이 빚어질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집을 나서기 전, 녀석이 혹 '실례'를 할지 모른다며 휴지와 비닐봉투까지 준비하는 집사람의 모습을 보며 이만하면 그나마 최소한의 양식은 갖춘 시민이라는 얄팍한 생각을 가졌던 내 스스로가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우리 사회에서 애완동물을 기르는 가정이 늘어나면서 소음과 악취로 인한 이웃간 분쟁, 버려지는 동물로 인해 전파되는 질병발생 위험성 증가 등 피해사례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서울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이웃집 애완동물 때문에 소음이나 냄새 등의 피해를 입었다고 하니 문제의 심각성이 적지 않은 상황이다.
사람들은 애완동물 등록제 등 대안을 모색하며 피해를 줄이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건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공존하는 최소한의 공동체의식과 책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보다 타인을 우선 배려하는 성숙한 사육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다시 신발끈을 묶는다. 큰 맘 먹고 시작한 나의 운동 첫날을 보기 좋게 망쳐놓고도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아롱이 녀석은 그런 나를 말끄러미 바라보며 꼬리를 살랑인다.
아마도 자기를 데려가라는 애교의 몸짓인가 보다. 그런 녀석의 눈망울 뒤로 어느 이름모를 아주머니의 카랑카랑하던 그 목소리가 다시 귀전을 울린다.
“아저씨, 공원에 개를 데리고 나오면 어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