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도덕경>은 새로운 판본이 나올 때마다, 혹은 새로운 논쟁적 인물들의 출현에 맞춰 새로이 출간되곤 했다. '백서본', '죽간본', 김용옥, 이경숙 등은 모두 그런 배경에서 등장한 <도덕경>의 또 다른 코드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의 논의는 대개 도덕경 원문의 오탈자나 문자적 차이에 바탕을 둔 고증학적 문제에 대해 집중되어왔다. 물론 <도덕경>의 고증학적 문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노자가 말하고자 한 사상의 핵심에 접근하는 문제인지는 쉽게 확언할 수 없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가 목말라 하는 것은 노자가 <도덕경>을 통해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했으며, 그가 이 세상의 길(道)을 어떻게 읽고 사유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지은이 김형효의 다음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나는 결국 노자를 다시 쓰기로 마음먹었다.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연구서는 이미 아주 많이 나와 있고, 제각기 특성을 갖고 있다. 내가 여기서 다시 그 많은 저술들과 유사한 책을 펴내는 것은 낭비이다. 내가 새로이 쓰려는 것은 왜 노자가 지금 21세기에 불교와 더불어 우리의 철학적 사유에 더 가까이 다가오는지 그 이유를 밝히는 일이다. 더불어 지금의 철학적 사유가 왜 과거와 다르게 구현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김형효의 <사유하는 도덕경>(소나무 출판사)은 글자 몇 개의 차이를 규명하기 위해 쓴 책이 아니다. 그의 화두는 바로 '노자가 이 세상을 읽은 철학적 사유의 길'이고, 그 사유의 흔적을 어떻게 우리들에게 전할 수 있을지를 탐색하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통해 처음으로 <도덕경>을 문자적 차이의 해설 차원에서가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해석 차원에서 읽게 된다.
수미일관한 논리로 짜여 있는 도덕경
<도덕경>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 가운데는 이 책을 마치 신비한 도사가 세상의 비밀에 대해 주술적으로 기록해둔 것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어떤 형식과 논리도 없이 무작위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여겨, 아예 임기응변적인 덕담 수준으로 말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김형효는 <사유하는 도덕경> 전편에 걸쳐 그런 태도에 대해 맹렬히 비판을 가한다. 그는 <도덕경>이 비록 간결하고 암시적인 '짧은 철학시'로 가득 차있지만, 그것은 노자의 함축적인 표현 때문이지 논리적인 정합성을 갖추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자는 동양사상인데 무슨 서양적인 논리냐 하고 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논리는 서양 것과 동양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상이라도 논리가 일관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사유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노자의 사유를 언설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은 그것이 비논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초논리적이기 때문이다. 비논리적인 것과 초논리적인 것은 다르다.
비논리적이라는 것은 아예 논리적인 것이 무시되는 사유의 지리멸렬인 반면, 초논리적인 것은 사유가 우리의 일상적 논리를 초탈하여 그윽한 깊이를 지니고 있음을 지시한다. 여기서 말하는 논리는 길을 의미한다. 보이는 길이 논리라면, 안 보이는 길은 초논리다. 도의 사유는 논리이든 초논리이든 결코 길을 벗어난 사유가 아니다. 길을 벗어나면 인간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한다. 노자를 순간적인 덕담 수준으로 지리멸렬하게 읽지 않도록 하자."
노자는 모두 81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철학시들을 통해 자신이 깨달은 도(道)와 그 도의 덕(德)을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언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도덕경>은 '길(道)에 관한 오디세이의 기록'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유하는 도덕경>에서 김형효가 말하고자 하는 도의 핵심은, 맨 앞의 머리말 '있는 그대로의 도를 가르쳐주는 세상'과 맨 뒤의 닫는글 '늘 이 세상에 있어왔던 근원적 사실(로서의 도)'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이 세상을 "심판의 장소로 보지 말고, 사실성의 도를 가르쳐주는 근원적 상황으로 인식해야"한다고 말한다.
또 1장 '자연의 근원적 사실로서의 도의 본성과 현상'에서 이 세상의 도는 어느 한쪽의 진리만을 양자택일하는 것이 아니라, 불변성과 가변성, 출현과 은적, 무와 유, 선과 악 등이 이중적으로 얽혀있는 장소의 문법과 같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도를 따른다는 것은 도를 찾아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말한다.
"이 세상을 시비(是非)나 선악(善惡)이나 호오(好惡)로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세상을 스승으로 모시는 삶의 태도이다."
도에 대한 비밀스런 인식이나, 도를 찾아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어야 할 듯한 결의로써는 결코 이 세상의 근원적 사실로서의 도를 사유할 수 없다는 말이다.
왜 우리는 지금 노자와 붓다로 사유해야 하는가
지은이에 따를 때, 동서고금의 철학적 사유를 궁극적으로 대별하면, 상관론적 사유와 인과론적 사유로 크게 나누어진다. 전자는 대체로 해체적 사유를, 후자는 일반적으로 구성적 사유를 띠고 있다. 전자는 노자와 붓다와 하이데거 등을 통해 보이며, 후자는 공자와 소크라테스와 유대교를 가로지르는 것이다.
이 둘 사이의 본질적 차이는, 전자는 우주를 삼각형 모양이 아니라 원 모양의 질서를 우주를 표상한다. 그래서 원인과 결과는 수직적인 위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피드백의 순환성을 띠기에 평등한 구조를 지닌다. 반면 후자는 일점 원인(예를 들어 신)으로부터 출발해 결과를 산출하기때문에,모든 것은 원인을 중심으로 수직하향적인 구조를 이루어진다. 따라서 거기에는 어떠한 평등한 논의나 구조도 상정될 수 없이, 원초적으로 차등적인 세계구조를 띤다.
그러나 노자나 붓다가 바라보는 세상은 애당초 그런 구조가 아니다. 만물은 스스로 독자적인 고유성으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모두에 대해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 '도덕경'에서 무는 본체와 본성으로, 유는 현상과 활동으로 그려진다. 그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상호의존적인 '의타기성(依他起性)'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곧 연생緣生이고, 연기법(緣起法)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곧 "타자의 존재와 동시에 마주 서 있음으로써, 자기의 의미가 존립하는" 만물의 이중성과 같다.
<사유하는 도덕경>은 그런 점에서 유와 무의 이중 놀이를 부정하고, 늘 유라는 '있음'의 세계만을 추구해온 사유가 이제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가 있기 위해서는 빈 공간으로서의 터전인 무가 없을 수 없다. 유의 모든 율동과 흐름, 유의 모든 현상적 물결은 바로 그 무가 받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21세기의 사유는 무(無)와 공(空)을 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가 무의 사유를 닥쳐올 미래적 사유로서 의미화한 것은 한갓 공허한 말장난이 아니다. 그의 표현에는 무거운 뜻이 담겨 있다. 이제 우리는 그 뜻을 인류의 기축(基軸)시대에 노자가 한 말을 통해 지금 21세기에 되살려 보려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