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총선의 결과에 따른 정치 및 사회의 변화에 대한 이런저런 논의가 전개되었다. 물론 시민운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민운동과 관련한 논의의 주제는 초록당 등 녹색정치의 본격적 준비, 대변형 운동단체들의 전문화, 세분화 및 의제의 급진화, 풀뿌리 단체들의 생활형 운동, 지역주민들과의 결합, 반세계화를 고리로 한 민중운동과의 연대 등이다. 대체로 선거 이전부터 향후 시민운동의 발전전망과 관련해 논의되어 오던 것들이고 상당한 공감대가 있는 진단이자 전망이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을 보면 선거를 전후로 해서 경실련은 정파적 이미지만 덧씌우는 정치문제에 대한 관심보다 '민생'에 진력하겠다고 했고, YMCA 경우에도 새로운 비전으로 청소년에 대한 관심을 특히 강조하였다. 환경단체들도 그간의 운동경험을 정리하고 새로운 모색을 위해 내부 논의가 조직되기도 하고, 여성단체들도 선거평가를 둘러싸고 긴장된 논란이 있었다.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의 선거평가 토론회에서의 박원순 변호사의 발제, 조희연 교수의 시민의 신문 기고,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처장의 중앙일보 시민사회연구소 발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억과 전망 이라는 참여연대 이태호 정책실장의 글, <창작과 비평> 여름호의 좌담, 여성단체연합의 선거평가 토론회 등 여러 형태의 논의와 성찰들이 이어지고 있다. 아직까지 하나의 줄기로 모아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는 과거와 달리 시민운동에 대한 상당한 성찰적 논의들이 이어질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징조라 할 것이다. 그만큼 시민운동이 향후의 발전방향을 놓고 새로운 인식이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시민운동이 지금까지는 다양한 물줄기가 모여들어 하나의 여울로 시민들에게 다가갔다면 다시 여러 물줄기로 나뉘어 새로운 여울을 향한 여정에 들어서고 있는지 모른다. 시민운동은 자신의 운동사에서 한 획을 긋는 시점과 마주하고 있으며 변화를 위한 새로운 과제들을 안고 있는 것이다.
4월 총선과 시민운동
90년대 한국의 시민운동은 대변형 운동이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민들은 2만여개 넘는 시민단체가 있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5개 정도의 시민단체만을 기억할 뿐이다. 이 5개의 시민단체는 우리 정치권과 언론이 알고 있는 시민단체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5개의 시민단체는 자신의 정체성이 성이든, 환경이든, 부패든 대변형 단체로 상징되었고 실제 활동도 그러하였다.
우리는 이를 흔히 경실련식 운동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들 단체의 급속한 사회적 영향력의 획득은 시민사회 공간을 넓히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하였고, 수많은 단체들이 그 넓어진 공간에서 시민사회의 새로운 가치를 공동체의 것으로 하기 위해 활동하고 성장하였다. 분명 오늘날 시민사회의 성장은 이들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동시에 시민운동은 이들 단체와 동일시되었다. 이들 단체의 공헌에 의해 성장한 시민운동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이들 단체의 모습으로 굴절되었다.
지난 4월 총선은 그간 시민운동에 드리워져 있던 이같은 제한된 프리즘을 걷어내게 만들고 있다. 아니 2000년 총선시민연대 라는 90년대 시민운동의 최정점의 활동을 거치고 난 지난 4년간의 시간이 모두 그 프리즘을 걷어내는 과정이었고 지난 4월 총선은 그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할 것이다.
4월 총선은 근대적 정치에 대한 요구와 시민사회의 새로운 사회적 가치에 대한 요구가 병행되어 오다 비로소 정상적으로 분리될 조건을 만든 셈이다. 근대적 정치, 사회개혁 요구와는 다른 요구들을 새로운 사회적 의제라 표현하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생활정치 영역으로 표현하거나 급진적 요구라 표현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90년대 시민운동의 성장으로 90년대와는 다른 사회적 의제들이 분출되면서 이미 시민운동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받고 있었으나 후진적 정치지형으로 인해 중심적 의제로 보여지지 않았을 뿐이다.
시민운동 자신 역시 '경실련', '참여연대'라는 프리즘에 갇혀 그같은 시민운동의 변화, 시민운동의 성장이 만들어 낸 스스로의 변화를 보지 못하거나 인식의 정도가 약했던 것이다. 다시 강조한다면 90년대 각 사회운동 분야에서 새로운 진보적 가치에 기반한 운동의 성장이 있었다. 그러나 시민운동 스스로 착시현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고 이제 비로소 운동의 변화가 인식되기 시작하는 상태에 있는 셈이다.
누구나 이야기하고 있듯이 지난 4월 총선은 비로소 근대적 정치지형을 형성하기 시작한 선거였다.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로 상징되듯 비로소 '정상적' 정치 지형을 형성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곧바로 그간 준정당적 기능을 담당해 오던 시민운동도 필연적으로 변화할 수 밖에 없겠다는 광범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간 시민운동이 지역과 보스의 차이에 기반한 비슷비슷한 정치세력들 사이에서 정치적 중립을 무기로 심판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가치와 가치에 기반한 정치세력간의 충돌이 가능한 조건이 형성되었고 그에 따라 기존의 정치적 중립이란 위치는 무력한 것이 되고 있다. 이는 정치적 지지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선에서 시민운동진영인 대선유권자연대와 노무현이라는 후보를 통해 근대적 정치를 실현해 보려는 흐름의 반영이기도 한 노사모를 비교해 보면 분명해진다.
2000년 당시 총선시민연대가 가졌던 역동성과 정치권과의 긴장은 2002년에는 노사모의 것이었다. 인터넷을 매개로, 시민들은 2000년에는 시민단체를 통해 근대적 정치에 대한 욕구를 실현하려 했다면 2002년에는 노무현이라는 '인물'을 통해 실현하려 한 것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겠다.
이제 준정당적 활동에 기반한 대변형 시민단체의 활동, 90년대식 시민운동은 그 시대를 마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대변형 단체들의 생명이 마감하는 것은 아니다. 90년대 운동의 전부처럼 여겨졌던 착시현상이 거두어들여지면 대변형 단체들은 정치, 행정, 의회 영역에서 더욱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문제에 기초해 자기활동을 전개해 나갈 것이지만 점차 이들 대변형 운동이 과거처럼 운동의 전부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90년대식 운동은 자기역할을 마감하고 있는 것이다.
준정당적 성격의 시민운동,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신중
2000년 이후로 시민운동에 의한 의제설정들은 정치권에서는 대개 정치적 경향으로 가르려는 시도들이 있었고, 이는 어떤 의제든 정책적 과제라기보다 정파적 이해가 담긴 정치적 의제인 것처럼 논의되게 만들었다. 물론 앞에서 본 것처럼 준정당적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던 기존 시민단체들의 활동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시민운동의 변화에 대한 논의에는 향후 시민운동이 생활정치의 영역에 주목해야 한다거나 혹은 정치권의 정상화라는 조건이 이루어졌으므로 일반민주주의적 요구에서 요구 자체를 보다 급진화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다. 추론컨대 모두가 다 시민운동이 새로운 사회적 의제들을 설정해야 할 필요를 언급한 것이라 생각된다. 생활정치라는 표현에는 의제뿐 아니라 시민운동의 근거가 '생활'이라는 곳에까지 천착해야 함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최근 시민사회에서 제기되는 이슈들을 살펴보면 이미 의제 자체는 90년대와 달라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 이라크 파병에 대한 반대와 평화운동, 성인지적 예산에 대한 문제제기, 생태와 새만금 개발 문제, 이주노동자문제, 지문날인 반대와 프라이버시 보호 운동 등은 90년대 시민운동의 의제와는 사뭇 다른 성격의 것들이다.
새롭게 제기된 의제들은 국민국가와 인권, 반전평화와 국익, 생태와 개발, 아시아와 미국 등 기존패러다임과의 갈등과 대립이 확인된다.어느 새 사회적 공감대를 넓히고 있는 것도 있고 우리 사회내의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적 대립의 근거로 되어 사회적으로도 의견대립이 팽팽한 이슈도 있다. 최근 드러나고 있는 신빈곤층 문제나 이주노동자 인권문제, 아시아 연대활동, 부시낙선운동 등은 경제적 세계화의 폐해를 인식하고 이를 전지구적 관점에서 대응하고자 하는 새로운 움직임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미 성장하는 시민운동은 새로운 의제들을 자신의 것으로 내놓기 시작했으며 이는 90년대 운동이 가졌던 가치지향과는 다른 것이다. 아무래도 90년대 대변형 시민운동이 주로 우리 사회의 근대적 합리성을 획득하기 위한 투명성, 형평성, 공정성 등이 의제설정의 기준이 되는 가치지향이었다면- 단체의 지향과 관계없이 사회적으로 표현되는 의제의 성격- 최근 성장하는 시민운동은 본질적으로 다른 패러다임에 기초한 의제설정을 하고 있는 셈이다.
생태와 한반도 분단극복을 포함한 평화, 인권, 성평등이라는 가치지향이 세계화와 정보화로 인한 사회변화와 마주하면서 구체적 의제로 우리 사회에 던져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개별단체들이 추구하는 자신의 정체성들이 과연 어떤 내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취약하다. 새롭게 제기되는 의제들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90년대와는 다른 패러다임의 구축과 그에 기초한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시민운동이 설정하고 있는 의제의 측면에서도 90년대 시민운동은 그 시대를 마감하고 다기한 흐름, 새로운 여울을 향한 여정에 들어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