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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인은 마애삼존불처럼 겉으로는 너그럽고 부드럽고 친근해 보인다
충청인은 마애삼존불처럼 겉으로는 너그럽고 부드럽고 친근해 보인다 ⓒ 김정봉
그러나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얘기하는 충청인은 다르다. 택리지 인심조에서는 충청도 인심을 '권세와 이익에 쏠리는 경향이 짙다'고 했다. 물론 기질과 인심은 뉘앙스가 다르긴 하지만 위에서 말한 충청인의 성격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역사적으로 충청지역이 세력에 따라 주인이 바뀌었고 현재에는 영ㆍ호남으로 갈리는 정치구도에서 낀 지역이 되어 주체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중환의 '충청관'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충청인의 기질을 얘기할 때 이래서 더욱 혼란해지는데 난 충청인의 기질을 '냅둬요'기질로 정리하고 싶다. 속내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아 겉으로는 부드럽고 참을성 있고 여유 있는 듯하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의 주장이 확실하여 내가 갈 길은 내가 알아서 간다는 그런 기질이다. 광야를 헤치며 달리는 사나이, 남아 인생 가는 길은 미련이 없다는 독립군과 같은 기질이다.

유홍준 교수는 소위 깡이 센 걸출한 인물들이 충청지역 특히 내포 땅에서 어떻게 났을까 의아해 했으나 충청인의 기질을 이해하면 그리 이상할 것도 아니다.

충청에서도 내포 땅은 겉으로 드러나는 충청인의 기질과 닮았다. 비산비야(非山非野), 지세는 평활하고 기묘한 기암괴석과 화려한 풍광도 없으니 평온하고 여유 있고 친근하기까지 한 땅이다.

추사 고택 가는 길에 있는 감자밭, 전경이 내포땅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추사 고택 가는 길에 있는 감자밭, 전경이 내포땅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 김정봉
택리지에 따르면 내포는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을 지칭한다. 지금의 아산, 예산, 당진, 서산, 태안, 홍성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가야산의 서쪽에 큰 바다가 있고, 북쪽으로는 경기도와 바다를 사이로 마주하며 바닷물이 내륙까지 깊숙이 들어온 지형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이 고장에서 태어나 자란 깡이 센 인물은 깡만 센 인물들이 아니며 그야말로 충청인의 기질을 그대로 갖고 있는 걸출한 인물들이다. 비교적 복원을 잘 해 놓은 홍성의 한용운, 김좌진과 예산의 윤봉길과 김정희 생가를 찾아가 내포가 배출한 걸출한 인물을 만나러 가보자.

홍성은 무언가 특별한 기운이 있다.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최영 장군이, 근세에 들어서는 한용운 선생과 김좌진 장군이 이 곳 홍성에서 태어났으니 말이다.

한용운 생가는 결성면 성곡리에 있다. 앞뒤로 차 한대도 없는 한갓진 길을 가다 보면 막다른 길이 있고 그 위에 초가삼간 한용운의 생가가 있다. 지금은 집 앞까지 도로가 포장되어 그다지 외지다고는 생각되지는 않지만 예전 같으면 찾는 이 드문 곳이었을 것이다.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 그다지 넓지 않은 논과 밭, 그 논과 밭 사이를 비집고 서있는 부담스럽지 않은 산, 이들이 그려내는 생가 주변의 풍경은 한용운이 시베리아를 전전하다 고향을 찾았을 때 자식을 안아주는 어머니의 모습이라 했던 것처럼 포근하기만 하다.

만해 생가/우물가에 엎어져 있는 장독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만해 생가/우물가에 엎어져 있는 장독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 김정봉
현재의 생가는 옛터에다가 최근에 복원한 것으로 초가집 뒤편에 우물이 있고 그 옆에 주인 잃은 장독이 엎어져 있어 쓸쓸해 보인다. 우물가 배롱나무와 울타리 너머 대나무, 초가지붕과 싸리 울타리에 사립문은 정겨워 보여 그런 대로 스산한 분위기를 가시게 한다. 생가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넉넉지 않은 선생의 어린 시절을 어렴풋이 나마 상상해 볼 수 있다.

만해 생가/내려다 보는 생가의 모습이 정겹다
만해 생가/내려다 보는 생가의 모습이 정겹다 ⓒ 김정봉
김좌진 장군의 생가는 길산면 행산리에 있다. 명문 사대가 출신답게 터도 넓고 비교적 공들여 조성해놓았다. 대문 앞 문패는 장군이 지금도 살아 있는 느낌을 준다. 담장과 장독대도 정갈하게 꾸며 놓았으며 굴뚝도 특이하게 만들어 놓아 흥미롭다.

김좌진 장군 생가/지금도 장군이 집안에 살아있는 듯하다
김좌진 장군 생가/지금도 장군이 집안에 살아있는 듯하다 ⓒ 김정봉
김좌진 장군은 한용운 선생보다 10년 뒤에 태어났는데 두 분이 교류한 기록은 찾지 못하였다. 김좌진 장군의 집안이 한 해에 수천 석의 곡식을 추수하고 삼 십여 명의 하인을 거느리고 여든 여덟 칸의 큰집을 소유할 만큼 홍성에서도 이름난 부잣집임을 감안하면 한용운 선생은 김좌진 장군의 집안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김좌진 장군 생가 전경
김좌진 장군 생가 전경 ⓒ 김정봉
한용운 선생의 나이 25세 되던 해 봄에 시베리아를 주유하다가 홍성에 내려와 수개월간 머물 때 김좌진 장군은 결혼을 하게 되는데 상처 입은 한용운 선생의 마음상태로는 가보지는 못하였을 것 같고 소문으로나마 장군의 결혼 소식을 듣지는 않았을까? 아무튼 동향에다 동시대에 태어난 이 들 두 분의 교류 흔적은 찾지 못하였다.

가야산 열 고을 중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 지금의 예산 땅이다. 예산 역시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평탄한 생을 살지 못한 추사 김정희가 예산사람이고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항거하여 조선의 건재함을 과시한 윤봉길 의사가 예산에서 태어났다.

수덕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윤봉길 의사의 생가와 4살 이후에 성장한 옛집이 있다. 생가 오른쪽 뒤로 덕숭산이, 앞에는 홍성 용봉산의 줄기인 수암산이 자리하고 있다. 덕숭산에서 내려오는 두 물길이 생가 옆을 흘러 가운데에 희한한 배 모양의 섬을 만들었는데 풍수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이 터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윤봉길 의사 생가 전경
윤봉길 의사 생가 전경 ⓒ 김정봉
윤봉길은 1908년에 태어나 11살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그 이듬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교육을 거부하고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9살 되던 해에 농민계몽운동에 뛰어들며 야학을 열어 농민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이 시기에 농민독본도 저술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사상이 담긴 흔적을 박물관이 아닌 철원미곡처리장에서 만났으니 반갑지 않을 리 없다. 철원미곡처리장 벽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씌어져 있는데 지금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철원 도피안사 가는 길 모퉁이, 철원미곡처리장 벽면에 씌여 있어 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철원 도피안사 가는 길 모퉁이, 철원미곡처리장 벽면에 씌여 있어 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 김정봉
농업은 생명창고

농민은 인류의 생명창고를 그 손에 잡고 있다.
우리나라가 돌연히 상공업나라로 변하여
하루아침에 농업이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이 변치 못할 생명창고의 열쇠는
의연히 지구상 어느 나라의 농민이 잡고 있을 것입니다.

-윤봉길 의사 농민독본중에서-


1930년 나이 23세에 장부는 집을 나가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 生不還)라는 말을 남기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이후 이 장부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다.

김좌진 장군, 만해 한용운, 윤봉길 의사의 생가와 관련된 자료를 보다보면 추사 김정희 생가를 다룬 자료와 사뭇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김좌진, 한용운, 윤봉길에 관련된 자료는 주로 인물 중심이다.

추사 김정희는 다르다. 인물을 소개하기보다는 생가 자체를 두고 얘기를 많이 한다. 생가의 문화적 가치가 달라서 그럴 수 있지만 다이내믹한 삶을 살다 간 추사를 이해하기 어려워서 일 수 있다. 유홍준 교수의 '완당평전'에서도 "세상에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추사 고택은 신암면 용궁리에 있다. 고택 앞으로는 예당평야가 펼쳐 있고 고택 뒤로는 얕은 동산이 있다. 고택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 사당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 앞에는 석년(石年)이라고 새긴 일종의 해시계를 볼 수 있는데 이 곳에서 볼 수 있는 선생의 유일한 실제작품이 아닌가 싶다.

사랑채 화단 앞에 있는 일종의 해시계, 추사의 실제 작품이라 더욱 반갑다
사랑채 화단 앞에 있는 일종의 해시계, 추사의 실제 작품이라 더욱 반갑다 ⓒ 김정봉
안채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안채에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자라지 않는 다는 점과 주방용 부엌이 없다는 점이다. 안채모양의 입구(口)안에 나무(木)가 있으면 곤할 곤(困)자가 되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를 심지 않았다. 이 곳은 추사의 증조모이고 영조의 차녀인 화순옹주가 기거한 곳으로 왕실 사람이 기거하는 곳에서는 부엌을 별도로 두어 안채 내에는 난방용 부엌만 있다.

추사 고택/고택 앞으로 예당평야가 펼쳐있다
추사 고택/고택 앞으로 예당평야가 펼쳐있다 ⓒ 김정봉
추사 고택은 영조의 사위이며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화순옹주의 부군)이 1700년대 중반에 건립한 53칸 규모의 대갓집으로 추사가 나서 성장한 곳이다. 추사는 1786년에 이 곳에서 태어나 50세 까지는 학문과 벼슬에서 탄탄대로를 달리듯 평탄한 삶을 살았다.

어지러운 세상은 선생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55세에 이르러 풍양조씨의 득세로 9년 간의 제주도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이 때 추사체라고 하는 독특한 글씨체를 완성하였으니 난세에 영웅이 나듯 역사적 산물은 시련의 시기에 탄생하는 것 같다.

고택의 기둥 이곳 저곳에는 주련(柱聯)이 걸려 있는데 다음 글귀는 한 인간으로서 생전에 자식을 두지 못한 고독한 심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세상에서 제일 가는 반찬은 두부, 외, 새앙, 나물이며
세상에서 제일 가는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들의 모임이라.


한용운이 논일을 하고 있는 농부를 보고 "저 농부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과연 인간의 인생이란 무엇일까? 명예도 부귀도 결국 생명이 끝나면 그만 아닌가? 그렇다면 인간은 왜 산다는 말인가? 무엇을 위해서?"라고 물음을 던진 후 오세암으로 들어가 답을 구했는데 추사는 위의 글로 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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