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다큐 운명의 20년’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망국의 비운을 맞게 되는 역사의 중대한 결절점 동학농민운동(1894) 110주년을 맞아 조선일보가 그 좌우 10년씩을 포괄해 갑신정변(1884)에서 러일전쟁(1904)에 이르는 20년을 다루고 있는 심층 역사기획 연재물이다.
위 글만 본다면 열강의 각축장으로 전락해 있던 한말, 침략 세력 일제에 맞서 조국을 지켜내고자 했던 우리의 과거 역사를 통해 현재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장래에 대해 고민하고자 하는 조선일보의 노력이 묻어 나는 듯하다.
식민 시절 반일의 역사에 대한 박제화 작업
위 글이 연재된 7월 14일은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한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진상규명 특별법’(이하 친일특별법)의 조사 대상을 확대하는 개정안이 다시 국회에 제출된 날이기도 했다. 지난 16대 국회에서 일부 친일 경력 신문과 과거 친일 행위와 연관된 국회 내 기득권 세력의 공세로 그 조사 대상이 대폭 축소될 수밖에 없었던 친일특별법을 17대 국회에서 다시 원래 상태로 복귀시키고 그 의미를 제대로 되살리려고 한 노력이 친일특별법 개정안 제출이었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반응은 너무나 냉랭하였다. 특별법 개정에 대해 조선일보가 할애한 비중이나 논평의 방향을 보면 특별법 개정에 대한 그들의 지극히 냉소적이고 불편한 시각을 역력히 느낄 수 있다. 처절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동학농민전사의 모습을 바라보던 예우와 동경의 시각이 보다 철저한 친일 세력 척결을 위해 개정된 특별법 문제에 이르러서는 너무나 다르게, 아니 반대로, 완전한 냉소와 조소로 돌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같은 날 신문 지면 속에서 지면을 넘기자마자 느껴야 했던 황당한 두 시각 사이의 차이에 독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일한 날, 비슷한 주제의 문제에 대해 전혀 다른 두 시각을 보이고 있는 조선일보를 보며 우리는 과거의 죽어버린 역사에 대한 씁쓸한 박제화 작업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냉소와 조소 위해 두운(頭韻)까지 맞춘 표제
조선일보는 7월 14일과 15일자에서 친일특별법 개정에 대한 해설과 보도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기사 표제에서도 풍겨나듯이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냉소와 의심, 그 이상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두운까지 충실하게 맞춘 표제에 냉소와 조소가 가득 묻어나 있다.
'親日'법 뜨자 親盧진영 똘똘
박정희·조선·동아일보 겨냥…"총선이후 제일 맘에 들어" (조선일보 7월 15일자 5면 기사 표제)
조선일보는 특별법 개정 문제를 친노 진영의 정치 공세로 폄하하면서 개정 의도가 박정희,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겨냥한 정적 사냥에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부제에 박힌 “총선이후 제일 맘에 들어”라는 문구 속에서 특별법 개정에 대한 그들의 냉소와 조소의 시각을 역력히 느낄 수 있다.
조선일보는 특별법 개정 해설 기사에서도 이같은 시각을 숨기지 않고 말하고 있다. 아래는 특별법 개정 문제를 다루고 있는 해설 기사의 일부이다.
개정안은 또 언론, 학술, 종교, 문화 등 사회 각 분야의 친일행위로 조사대상을 넓혔는데, 이 부분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동아일보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로부터 한층 가혹한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다. 이 시기의 일부 기사만을 대상으로 조선·동아일보를 공격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조선일보 7월 14일자 與 '親日'조사범위 확대 개정안 마련 박정희·조선·동아일보 겨냥 논란 中)
조선일보는 친일 문제를 “이 시기 일부 기사”의 문제로 치부해 버리며 도리어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는 모습도 보인다. 결국 조선일보의 논리에 따르면 개정안은 정권과 마찰을 빚고 있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그리고 야당 당수를 겨냥한 공격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이같은 요란한 개정안 폄하 노력은 오히려 자신의 친일 부역 행위를 적극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 된다. 개정안에 대한 그들의 반대 목소리가 결국은 자신의 과거 죄과를 감추기 위한 자기 보호 행위라는 사실을 모를 사람은 별반 없을 것이다.
송복 교수, 친일 옹호 위해 역사의 존재 의의까지 부정
특별법 개정을 막아 나서려 하는 조선일보의 노골적인 모습은 7월 19일자에 실린 송복 교수의 기고, “[송복 칼럼] 역사에 恨풀이 말라”에서 절정을 달리고 있다. 아래에 일부 문장을 인용해 본다.
과거 따지는 사람치고 제대로 사는 사람 없고, 과거사에 매달리는 나라치고 제대로 발전하는 나라 없다. 인간적으로도 과거사 들먹이는 사람은 늘 문제가 있다. 제대로 인격이 형성된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중략) 죽은 조상이 후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 조상들의 지난날 행적에, 집요하게 시비를 거는 행동만큼 어리석고 무지한 것이 없다. (조선일보 7월 19일자 [송복 칼럼] 역사에 恨풀이 말라 中)
송 교수에 의하면 과거를 성찰하려는 사람은 제대로 인격이 형성되어 있지 못한 인물이다. “죽은 조상이 후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송 교수의 발언은 역사의 존재 의의까지도 완전히 부정해 버리는 말이다. 차라리 정적 사냥이라는 조선일보 기사의 논리가 보다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친일 행적에 대한 올바른 규명과 처벌 작업은 과거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내오고 그에 기반해 현재의 가치관을 바로 세워 내려는 당연한 작업이지만 조선일보와 송 교수에게는 이것이 과거에 대한 단순한 집착, 정적에 대한 마녀 사냥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다. 어떤 진상규명도 현재를 바로 세우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 어떤 역사도 현재가 바로 서면 바로 선다. 현재를 무너뜨려 놓고 아무리 과거를 바로 세우려 해도 세워지지 않는다. 어떤 과거진상 규명도 무너진 현재 앞에선 의미를 상실한다. (조선일보 7월 19일자 [송복 칼럼] 역사에 恨풀이 말라 中)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는 송 교의 말은 맞다. 현재가 바로 서면 과거도 바로 설 수 있다는 그의 논리도 맞지만 어떻게 현재를 바로 세울 수 있는가 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없다. 우리가 과거 친일 부역 행위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잘못된 행위에 심판하는 노력은 과거의 행위에 대해 반성하고 그에 기반해 현재를 바로 세우기 위한 방법이다.
역사를 죽여 자신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동학농민전쟁을 비롯한 한말 우리 역사에 대한 반추를 통해 망국의 설움을 겪어야 했던 우리 민족의 과거를 살펴보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과거의 역사에 대한 탐방이나 기억 정도로 끝나 버리고 현재 속에서 그것의 교훈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생략한다면 그것은 역사를 죽이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지금 조선일보는 역사를 죽이고 있다. 백여 년 전 일제에 저항해 목숨을 잃었던 동학농민군에게는 찬사의 모습을 보내면서도 일제 식민 시대 자신의 친일 부역 행위는 애써 감추려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아무런 반성도 없이 오히려 민족지로서의 조선일보 이미지의 제고에 힘쓰고 있다. 현재의 친일 규명 문제는 현재의 조선일보 문제이기에 과거의 역사와 다른 문제인 것인가. 조선일보는 정녕 역사를 죽여 현재의 자신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