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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맨하탄의 빌딩 숲
뉴욕 맨하탄의 빌딩 숲 ⓒ 코비스 제공
드디어 32가와 아메리칸 애비뉴가 만나는 한인 타운에 입성한다. 예나 다름없이 노란색 영업 택시들이 분주하게 지나는 그 거리에는 한인 영업소들의 간판이 즐비했으나 어쩐지 지나는 행인들은 낯이 설었다. "산천은 의구(依舊)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나는 마치 귀향객처럼 브로드 웨이 선상에 멈춰 서서 지나온 감회에 젖는다. 만감이 교차하는 머리 위로 때 아닌 빗방울이 듣는다. 잠시 할말을 잊은 채 내리는 비에 얼굴을 적신다. 네가 나를 맞이하는구나. 봄비 사이로 눈에 익은 그 거리는 이내 주마등의 강물이 되어 회상의 징검다리를 놓는다.

"그대로 살아서 나를 맞는구나. 맨처음 만났던 그 때로부터 10년의 세월이 지났고 또 다시 수년의 세월을 흘려 보냈건만 옛 건물의 형체 그대로 나의 허름한 몸을 따뜻하게 맞는구나. 이 거리를 떠나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 동안 나는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네. 겁 없는 무역 전사가 되어 전세계를 누볐으며 지금은 김삿갓 되어 봇짐을 내려 놓은 채 바람 타고 다시 찾아 왔다네."

<미주 매일 신문>의 원고지에 젖고 일에 채였던 젊은 날의 뉴욕이었지. 넘치는 청년의 혈기를 감쌌던 부성애의 땅. 이제 지금 장사에 닳아진 발바닥과 무뎌진 펜촉을 아쉬워 하며 이 거리에 서서 나는 너를 향해 소리친다. 질곡(桎梏)의 과거를 회상하며 애잔한 절규를 보내고 있다. 한 때 젊은 날의 꿈을 일궜던 '야망의 제국'에 서서 오늘 속절없이 비를 맞으며 저며오는 속을 쓸어 담고 있지 않느냐.

인생은 뜻대로 되어지지 않았다. 가자고 하면 멈추어 섰고 뛰자고 하면 걸렸고 넘자고 하면 오히려 나를 뒤로 넘어뜨렸다. 현명한 판단이라고 내려 보았지만 실패라는 결과는 오기를 낳았고 욕망의 불은 꺼질 줄 몰랐다. 이상의 불길은 타올랐으나 허상을 향해 무모한 길을 가고 있었고 한 번 들어선 길은 되돌릴 수 없었다. 지금, 그렇게 빼앗긴 세월이 인형처럼 울고 있다.

일주일의 여정을 마치고 존 에프 케네디 공항을 떠오르는 어메리칸 에어라인 항공기의 힘찬 발진과 함께 나는 눈을 감고 다시 샌프란시스코를 향한다. 남쪽 바다 뉴욕 만에서 자유의 여신상이 쥐고 있는 평화의 횃불을 향해 나의 기구(祈求)를 올린다.

"당신에게 닥쳤던 참혹한 아픔과 슬픔을 기억합니다. 뉴욕시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 쌍둥이 빌딩의 굉음 속에서 살려고 발버둥쳤으나 미처 구조되지 못하고 하늘 나라로 보내진 그대들의 죽음을 애도(哀悼)합니다. 패권 정치와 종교적 이념의 충돌이 낳은 참극 앞에서 무참하게 희생 된 그대들의 영령을 추모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그러나 그대들의 이름은 힘과 빛을 발할 것을 또한 믿습니다. 지금은 비록 또 다른 죄의 전쟁이 치러지고 있는 시간이지만 정치인들에 의해 잘못 가고 있는 오늘의 역사가 언젠가 제 자리를 찾아 갈 것으로 믿습니다.

이제 9.11 참사를 겪어낸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가 다시 세워질 프리덤 타워(Freedom Tower)의 건립을 기다리듯 이 사람도 새로운 출발을 다집니다. 부서진 인생의 복구를 위한 장도에 오르기 앞서 지금 처한 현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겸양(謙讓)의 지혜를 심으렵니다. 부질없는 부귀에 대한 집착이나 영화(榮華)에의 도전을 떨구고 참다운 자아 성취를 이루고자 합니다.

맨해튼 남단, 비극의 땅인 그라운드 제로에 분노와 복수를 넘는 화해와 용서의 탑이 높게 세워지는 날, 이 몸도 비로소 매진(邁進)의 고행으로부터 벗어나 평화로운 심신을 찾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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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하 기자는 미조리 주립대애서 신문방송학을 수학하고 뉴욕의 <미주 매일 신문>과 하와이의 <한국일보>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의 시사 주간신문의 편집국장을 거쳐 현재 로스엔젤레스의 부동산 분양 개발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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