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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에 찍어먹기 좋은 풋고추에 붉은 빛이 돌기 시작하고, 밭둑에 호박꽃들이 환하게 피는 요즘의 시골 마을에서는 논일보다 밭일, 들일이 많은 때이다.
한낮의 땡볕을 피해 이른 새벽과 늦은 오후에는 허리 굽은 농부들이 들녘에 나와 콩을 심고, 도시에 사는 손주들에게 보낼 고구마를 심는다.
시골에 살면 당연히 이렇게 땅과 가까이 지내며 아기자기하게 농작물들 심고 가꿔야 하지만 올해는 고추와 토마토밖에 심지 못했다. 어쩌다보니 텃밭을 가꾸는 일보다 글밭(?)을 갈 일이 많아져 시기를 다 놓쳐 버린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적지 않은 시골살이의 이력으로 텃밭 인심이 후한 이웃들을 많이 확보했다는, 속 보이는 속셈도 있었기 때문에 부지런을 떨지 않았던 것도 이유라면 이유다.
부지런한 농부들이 한숨 쉬어가는 한낮에도, 나는 며칠째 아이들에게 등을 돌린 채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어야 할 정도로 밀린 일들이 많았다. 잠깐 쉬려고 방바닥으로 벌러덩 누웠는데 문득 벽에 붙어 있는 우리 아이들의 어설픈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벽에 걸어 놓을 만큼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화첩을 쭉 찢어서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을 아이들이 테이프로 엉성하게 붙여 놓은 것이었다. 평소에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아이들이라면, 그 그림들이 내 시선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그 흔한 유치원 미술 대회에서조차 입상 한 번 못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 그림 그리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터라 그 그림들이 더 신기해 보였다.
“엄마, 엄마, 나와 보세요. 정선이가 사고쳤대요. 사고쳤대요.”
아들아이의 고자질하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밖을 내다보니 딸아이는 막대기를 들고 서 있고 그 옆에는 항아리 뚜껑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다섯 살짜리 딸아이는 별로 잘못했다는 기색도 없었다. 대충 상황을 짐작해보니 딸아이가 막대기를 들고 마당에 있는 항아리 위에 올라가 놀다가 막대기를 잘못 놀려 뚜껑이 깨진 것이었다.
젖먹이였을 때는 밤에 잠도 잘 자고 감기도 잘 걸리지 않고 순하기만 했던 딸아이였는데 이렇게 말괄량이로 변해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접시며 컵이며 딸아이 손에 쥐어졌다하면 깨지는 것은 예사였다. 노는 것은 또 얼마나 험한지 올 여름에만 슬리퍼 밑창이 3번이나 떨어져나갔다.
딸아이의 사고를 수습해 놓고 가만히 다시 아이들의 그림을 들여다보니 일곱 살 아들과 다섯 살 딸아이의 성격이 그 그림 한 장에 다 드러나 있었다.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대신 소심하고 겁이 많은 아들이 그린 그림에는 무지개와 하늘색 구름, 붉은 해 그리고 우리 집과 나무, 민들레가 아기자기하게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다섯 살 딸아이가 그린 그림은 빨간 볼펜을 이용해 과감한 필치와 추상적인 터치로 도화지 가득 뭔가를 그리긴 했는데, 거의 낙서 수준이었다.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는데 ‘눈이 오는 것’을 그린 거라고 했던 딸아이의 말이 떠올랐다.
남매를 키우면서 아들과 딸아이의 성격이 많이 뒤바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림에서도 그런 부분이 여실히 보였다. 도화지의 대부분을 여백으로 남겨놓고, 아래쪽에만 나무와 꽃을 오밀조밀하게 그린(거기에 찬찬히 설명까지 써 넣었다) 아들아이의 그림에는 흔히 말하는 남자다움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 하는 짓도 과격한 딸아이의 그림에는 500원짜리 동전보다 더 큰 눈송이가 도화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게다가 눈송이를 빨간색으로 그리는 등 파격적이고 거침이 없는 색감은 아들아이의 그림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두 살의 나이차를 고려해도 우리집 남매의 그림을 보고 성을 구별해 보라고 하면 누구나 바꿔서 대답을 할 것 같다. 이제는 잘 구할 수도 없는 옛날 항아리의 뚜껑을 깨트린 딸아이 때문에 속이 상했던 기분을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나름대로 분석하면서 삭히고 있을 때였다.
“아아악, 엄마아.”
밖에서 놀면 계속 사고를 칠 것만 같아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라고 아이들을 방 안으로 몰아넣었는데, 비명소리가 들린 것이다. 공포에 질린 아들아이의 목소리였다. 깜짝 놀라서 아이들 방으로 뛰어 들어갔던 나도 기절할 뻔한 일이 방안에서 벌어져 있었다.
“엄마, 생쥐가 너무 귀여워서 한 번 만져봤어. 병현이 오빠도 만지는데….”
책장 옆으로 쥐가 다니길래 끈끈이 종이를 놓아두었는데 마침 거기에 작은 생쥐 한 마리가 붙어 있었고 딸아이는 천연덕스럽게 그 끈끈이 종이를 들고 있었다. 얼마 전 사촌 집의 아이들이 햄스터를 만지며 귀여워하던 것을 보고 왔던 딸아이였다.
물론 지금 시대에는 남자다움이나 여성스러움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양성이 고르게 발달하도록 이끌어줘야 하는 것이 옳은 교육 방법인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온통 진흙 범벅이 된 채로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으로 지렁이를 집어서 방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딸아이에게 어떻게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있으랴.
반면 진흙탕은 알아서 피해다니는 것은 물론, 셔츠에 조금만 때가 묻어도 갈아입어야 하고, 손등에 때가 좀 있고 콧물을 좀 흘리는 친구하고는 놀지 않겠다는 등 약간의 결벽 증세를 보이는 아들 녀석 역시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엄마, 나 가슴이 쿵쾅거려서 다시는 그네를 타지 않을 거야.”
영림이네 집 앞 플라타너스 나무에 매달아 놓은 그네를 탔던 아들아이는 가슴을 움켜쥐고는 꺼이꺼이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영희와 영림이를 비롯해 딸아이도 재미있다고 더 높이 밀어달라고 성화를 대는 그네를 아들아이는 두 번 다시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아들아이의 고소 공포증을 치유해 주려고 영림이 아빠가 살살 달래서 태웠다가 하얗게 질려서 서럽게 우는 아이를 달래느라 진땀을 뺄 정도로 여린 성격을 가졌다.
그래도 아직 세련되지 못한 내 사고 방식으로는 이왕이면 아들이 씩씩하고 듬직하게 자랐으면 하는 바람인데, 아들은 이렇게 번번이 내 기대를 무너뜨린다.
대신 우악스럽고 용맹스런 딸아이가 아들이 채워주지 못한 기대를 채워주려는 듯, 오늘도 주방 창가에 한참 보기 좋게 피기 시작한 능소화의 모가지를 똑똑 따놓고 다닌다.
아직 유치원 여름방학은 반도 안 지났는데 딸아이의 장난기는 어떻게 말려야 할지, 또 아들아이에게는 어떻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줘야 할지 이 무더위에 머리라도 싸매야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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