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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이어 내려오는 치밀한 인공조림정책

벳부를 가기 위해 아소산 산등성이를 넘다보면 초록색의 너른 풀밭과 함께 한치의 흐트러진 모습 없이 잘 정돈된 모습으로 빽빽하게 서 있는 삼나무 숲의 인상적인 풍경이 좀처럼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처럼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는 삼나무 숲은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이 아니라 몇 십 년을 거쳐 꾸준히 지속된 인공조림정책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문득 시뻘건 민둥산을 없애자며 이 나무, 저 나무 가리지 않고 외래종을 마구 심어놓아 온통 경제성 없는 나무들뿐인 우리의 조림정책이 떠오른다. 한순간의 선택이 이렇게 큰 차이를 낳게 한다니. 그네들의 꼼꼼함이 더욱 빛을 발하는 순간이 아닐까?

▲ 고속도로 전망대에서 바라본 벳부시내, 저 아래로 세토나이카이라는 바다가 보인다.
ⓒ 김정은
바다와 인접한 온천지대 벳부

우리들을 태운 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려 오이타현의 벳부에 도착했다. 벳부 지역은 유명한 온천지대이자 우리나라의 다도해와 같은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국립공원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가 맞닿은 항구도시로 오사카와 고베로 가는 관서기선의 터미널이 있는 곳이다.

바다와 인접한 온천지대라. 고속도로 전망대에서 저 멀리 세토나이카이라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여행객의 땀을 식히려는 듯 시원한 바람이 분다.

바람의 감촉이 눅눅한 걸 보니 습기가 있는 것 같다. 일설에는 습기 많은 해양성 기후와 온천수가 만나면 피부가 더욱 매끄러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에 이 곳 온천이 더 유명하다고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피부의 감촉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벳부 지역에 들어서자 처음 나를 맞은 것은 온천구에서 분출하는 수많은 하얀 연기들이었다. 2848개소의 원천수에서 뽑아내는 온천의 하루 용출량은 13만 6571킬로리터로 일본 제일이다.

특히 이곳 벳부는 온천욕뿐 아니라 '지옥순례'라는 이름의 온천구경으로도 유명하다. 약 1200년 전 쯔루미오까 폭발로 인해 벳부에 뜨거운 증기와 흙탕물이 분출되기 시작했는데 지하 300m에서 증기와 흙탕물이 분출하는 모습이 지옥을 연상케 한다고 해서 '지옥순례'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총 8개의 지옥 중에서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다는 바다지옥에 들어갔다.

▲ 바다지옥 안으로 들어가면 넓게 펼쳐진 연꽃이 있는 아름다운 연못을 볼 수 있다.
ⓒ 김정은
바다지옥과 헬렌 켈러 그리고 마음의 눈

바다지옥 안으로 들어가면 넓게 펼쳐진 연꽃이 있는 아름다운 연못을 볼 수 있다. 온천 속에 함유되어 잇는 황산철 때문에 마치 바다와 같은 코발트 색을 띤 잔잔한 수면의 연못을 보니 시원하게 물 속에 들어가 물놀이를 하고 싶다.

▲ 짙은 코팔트색을 띤 잔잔한 수면의 바다지옥. 겉보기와는 달리 수온은 98도다.
ⓒ 김정은
나뿐 아니라 이곳에 들른 많은 사람들도 물 색깔이 하도 푸르다보니 온천이라는 생각을 잊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바다처럼 시원하게 보이는 그 물은 손 한번 잘못 넣으면 화상을 입을 만큼 위험하다. 오죽하면 달걀이 5분만에 반숙이 될 정도일까?

▲ 황토색 온천수가 기세 좋게 분출하고 있는 바다지옥 내 핏빛지옥
ⓒ 김정은
바다지옥을 나오기 전에는 작은 혈지옥이란 핏빛을 한 온천을 볼 수 있다. 바다지옥보다 규모가 작지만 붉은 빛의 신기한 온천수가 쉴새없이 뿜어져 나오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곳 온천물로 삶은 달걀은 6개 300엔을 받는데 한 개만 먹어도 장수한다는 속설이 있다. 유난히 노랗게 보이는 노른자는 물이 흐르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익은 상태라 먹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토산품점에서 달걀을 사다가 문득 이곳을 방문한 유명 인사의 사진 중에서 헬렌 켈러를 볼 수 있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한 헬렌 켈러가 과연 이곳에서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코 끝을 자극하는 진한 유황냄새일까? 아니면 부글부글 힘차게 뿜어져 나오는 온천수의 세찬 기운일까?

문득 헬렌 켈러는 마음의 눈을 통해 우리가 육체의 눈에 현혹되어 보지 못한 것까지 세세하게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아마존 기아나 지방이 원산인 대연꽃(빅토리아 아마조니카).생물이 살기 힘든 뜨거운 온천수 속에 피어있는 이 연꽃처럼 어디에나 열려있는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 김정은
나는 종종 볼 수 있는 친구들에게 무엇을 보았는지 물을 때가 있다. 얼마 전에 숲 속을 산책하고 돌아온 친구에게 무엇을 보고 왔는지 물었다. "별로 특별한 것을 못 봤다"고 그는 대답했다. 나는 자문해 보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한 시간이나 숲 속을 산책하고도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니. 볼 수 없는 나도 손끝의 촉감을 통해서 수백 가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는데. 봄에는 기대에 찬 손으로 나뭇가지에 돋아나는 꽃눈을 만질 수 있으며 겨울잠을 자고 깨어나는 새순을 만질 수도 있는데.

(중략)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충고 한마디. 눈이나 귀를 사용하되 마치 내일 장님이나 귀머거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눈과 귀를 사용하라는 것이다. 음악을 듣고 새소리를 듣고 꽃향기를 맡으며 모든 감각기관을 최대로 활용하라는 것이다. 어둠은 틀림없이 빛에 대한 감사를 가르칠 것이며, 정적은 틀림없이 소리의 즐거움을 가르쳐 줄 것이니.

-헬렌 켈러 <내가 만약 3일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중에서-


벳부 온천에서 즐거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 속 헬렌 켈러의 모습을 보며 두 눈이 멀쩡히 있는데도 정작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아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내가 갑자기 한심스러워졌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헬렌 켈러처럼 빛에 감사하고 소리의 즐거움에 감사할 줄 아는 열린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렇게 쉽게 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아직까지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은 눈뜬 장님인 까닭인가 보다.

도대체 나의 마음의 눈은 언제 열릴 수 있을까?

바다지옥에서 나온 우리는 다음 행선지인 유노하나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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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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