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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0일 제가 이사장으로 있는 문경시발전연구소 명의로 오래 전에 신청한 1박2일 코스의 안보 견학 날이 밝았습니다. 당초 문경 지역 시민단체 회원 및 남녀 일반 시민 등 42명의 명단을 올렸으나 아침에 참석한 사람들은 인솔자와 기사 포함 35명이었습니다. 몇 십 년 만에 찾아온 무더위가 계속된 터라 그만한 사람들이 참석해 준 것만도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예상 외로 날씨가 맑고 쾌적하여 출발부터 모두 컨디션 만점이었습니다.
출발 서너 시간 후 한 많은 임진강변을 따라 난 자유로와 통일로를 지나 드디어 휴전선 지역을 넘나드는 검문소에 오전 11시경에 도착, 신원 확인을 마치고 1차 목적지인 도라산역에 내렸습니다. 마침 북한에 전달할 쌀을 실은 대한통운 차량들이 수속을 밟고 있어 한결 남북한 화해의 분위기를 실감할 수가 있었습니다. 도라산역을 끝으로 철마는 민족의 한을 가슴 가득 실은 채 반세기간 숨을 멈추고 있었습니다. 최신식 역사에는 역무원들이 헌병과 함께 계속 근무를 하며 통일을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분단의 끝이요 통일의 시작인 역사에서 시원한 한잔의 냉커피를 마시며 전에 지었던 시를 읊조리며 민족의 울분을 달래 봅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세기의 반 동안/심장의 박동을 멈춘/휴전선의 저 철마여./이제 깨어나거라./색동옷 입고/거친 숨 몰아쉬며/이제 맘껏 달려보거라./한반도 깃발 펄럭이며/시베리아로, 유럽으로/한민족 한겨레/피맺힌 한(恨)을 토하며/이제 맘껏 달려보거라./목이 메인 기적 소리/만파식적 되나니.//반쪽끼리 반목으로/맞보고도 만나지 못했던/20키로 휴전선에/잠자는 저 철길아./이제 깨어나거라./499키로 광활한 대지에/민족의 포부(抱負)를 펼치거라./들국화, 멧돼지/네 품에 놀고,/호랑나비, 산까치/나래 쉬던 플랫폼엔/통일동이들 함께 마중 나와/살며시 귀기울이며/네 숨결소리 듣나니.
요사이엔 기차나 육로로도 간단한 수속과 절차를 밟으면 올 수 있는 곳으로 피로 얼룩졌던 분단의 역사 현장이 세계인들이 찾는 안보 관광지화되고 있어 시대의 흐름을 절감했습니다. 북으로 갈 쌀을 실은 화물차 대열의 흐뭇한 모습을 지켜 보는 하늘의 구름들도 오늘 따라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 모두들 감탄을 연발했습니다. 저 구름처럼, 바람처럼 자유로이 남북을 오갈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소원해 봅니다.
이어 남한의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는 자유의 마을인 대성동과 이를 마주한 북한의 인공기가 축 늘어진 선전촌인 기정동, 개성공단 예정부지의 흙먼지 등이 한눈에 보이는 도라산 전망대에 도착하여 관할 부대 안내원으로부터 간단한 설명을 듣고 함께 둘러보았습니다. 오늘따라 시야가 무척 맑아 아주 잘 바라볼 수가 있었습니다.
한 뼘도 될까 말까 한 저 곳을 사이에 두고 유유히 흐르는 저 강처럼 우리 민족 사이에도 뜨거운 혈맥의 강이 흐르건만 이제껏 오순도순 함께 살 수 없었던 인류 최후의 유일한 분단의 비극사 현장 앞에 수치스러움을 느끼며 모두 숙연해졌습니다. 특히 기독교인인 필자는 민족의 하나됨을 위해서 참회와 소원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차에 오르려하는 때에 필자를 찾는 다급하고도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 뛰어가 보니 건장한 중령 한 분이 반가운 인사로 맞이하였습니다.
어제 방문자 명단을 보니 고향 문경 분들이라 참으로 반가웠다며 일부러 인사차 잠시 들렀다는 것입니다. 필자의 동성초등학교 까마득한 후배로 이런 특이한 곳에서 만나게 되니 그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가슴 뿌듯하였습니다. 아쉬운 이별을 하고 분단 민족의 국제회담장소인 판문점으로 향했습니다.
JSA는 공동경비구역으로서 유엔군과 북한군의 관할 하에 있었으나 최근 유엔군의 경계 근무가 차츰 한국군으로 넘어오고 있는 과정이라 합니다. 판문점 식당에서 친절한 서비스가 곁들인 점심 식사를 해결한 후에 까다로운 수속 때문에 10여명이 탈락을 하고 남은 25명이 유엔사 버스에 올랐습니다. 지뢰밭 사이로 난 포장길을 따라 남북 화해 상징의 서막이었던 정주영 왕회장의 소 떼를 회상하며 그 길을 따라 이동하였습니다.
드디어 피로 얼룩진 분단 역사의 현장인 판문점에 도착했습니다. 서울 서북방 62Km, 평양 남방 215Km 떨어져 있는 세계 유일의 이념 대립 현장으로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실감할 수 있으며, 지난 반세기간 국제연합군장병들의 고귀한 희생이 점철된 피의 역사 현장이기도 한 곳입니다. 남북한 쌍방 간의 행정관할권 밖에 있는 특수한 지역으로 경계병 무기도 권총밖에 휴대할 수 없답니다.
출발부터 귀향까지 우리 일행들을 줄곧 친절하고도 안전하게 안내 인솔하는 요원이 판문점 벽돌 하나 사이를 두고 관할권이 다르기 때문에 실수를 해서 넘어졌을 경우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 같은 운명이 될 수도 있다며 주의를 강조한 바 있어 모두들 긴장의 도를 더했습니다. 우리측에서 관리하는 회담 장소 안으로 들어가면 북한 지역을 포함, 한바퀴 돌 수도 있고 창 밖에서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북한 장교의 이상한 모습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곳 안내원의 인솔 하에 회담 책상 유엔기를 사이에 두고 우리 측 미남 헌병과 함께 남북이 서로 악수를 하듯 손을 잡고 흔들며 역사적인 몸짓으로 사진들을 찍었습니다. 우리 측 경계병들이 시원스런 하복에 건장한 미남인 반면, 북측은 이런 무더위에도 동복을 입은 깡마른 체격의 장교들이라 큰 대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동하여 8.18 도끼만행사건의 현장에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바라보며 앞으로 다시는 이러한 비극적인 피의 역사들이 재발되지 않도록 건너편 북한의 민둥산에 소원나무를 심고 있을 때 한줄기 시원한 자유스런 바람이 겨드랑이를 스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북쪽의 실낱 같은 자유의 바늘 구멍엔 거대한 철의 장막도 무너뜨릴 수 있는 황소바람이 이는 법입니다. 과거부터 자유의 도시 공기가 역사를 바꾸지 않았습니까? 역사는 진실이며 그러한 진실의 역사가 지금 쓰여지고 있는 그 현장에 나는 서 있습니다. 저 돌아오지 않는 자유의 다리에서 불어오는 개성 공단의 흙바람을 맞으며 분단의 벽이 무너지고 민족 중흥의 장비 소리에 가만히 귀기울이며 한민족의 희망찬 대망을 품어봅니다.
원래 판문점은 6.25전쟁 전 주막을 하나 낀 초가집 서너 채가 있었던 한적한 마을로서 서울과 개성을 왕래하는 길목에 자리잡은 길손들의 휴식처였다고 합니다. 필자가 태어난 이듬해인 1951년 7월 8일부터 개성에서 열려 왔던 휴전회담이 그 해 10월 28일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이 회담에 참석하는 중공군 대표들이 이곳을 쉽게 찾아보게 하기 위해 당시 회담장소 부근에 있던 주막을 겸한 가게를 한자로 적어 "板門店"으로 표기한 것이 유래되어 현재까지 불리어지게 되었으며 현재 회담장소인 판문점은 과거 판문점 마을 근처 남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응어리진 한을 판문점 책상에 접어둔 채 우리들 일행은 강화도에 있는 안보수련원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조용한 들 가운데 떨어진 폐교를 개축해서 만든 조그마하고 아담한 가건물로 가까이는 강인지 바다인지 구별할 수 없는 소금기가 있는 강물인 염하가 흐르며, 갈매기 앉아 쉬는 부드럽고 촉촉한 갯벌이 있고, 주위엔 들판과 인삼밭이 있어 보석의 섬이라는 말 그대로였습니다. 특히 우리 나라 서양 문물이 들어오는 대문으로 그에 따른 전적지와 역사의 현장들이 너무나 많아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도 불릴 만하였습니다.
친절한 안보 수련 책임자와 소장님의 안내로 여장을 풀고 최근 탈북한 의사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최근 북한 소식 비디오도 관람하였습니다. 북한의 현실, 그것은 이제 누구나 아는 일반 상식이 되고 있으나 이렇게 체험을 하니 더욱 새롭게 인식되었습니다. 앞으로 가장 큰 국가적 민족적 문제는 그 많은 탈북자에 대한 대책이 될 것입니다. 다함께 풀어나가야 할 민족적 인도적 고민거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인구가 격감하고 황폐한 땅이 남아도는 시골에 탈북자 정착촌을 만들어나가 농촌을 살리는 길도 모색해 봄직도 합니다. 특히 폐광지 문경엔 더욱 절실합니다.
마지막 남은 세계 유일의 분단선을 없애는 데는 최고 최선의 노력 뿐 만 아니라, 훌륭한 한민족의 긍지와 능력, 마지막 남은 한민족의 자존심에 대한 배려, 인류 공영과 평화, 광활한 광야인 대륙으로 향한 한민족의 의지, 장족의 민족 중흥을 위한 도약 등 무시될 수 없이 길이 길이 후손들에게까지 전수되어야할 많은 덕목과 가치들이 어우러져 세계와 인류 전체와도 연관되는 아주 중요한 이목거리가 될 것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기회로 삼을 필요성도 있어 서둘지 말고 스텝 바이 스텝 방식으로 차근히 풀고 나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생선회를 비롯한 안락한 휴식을 대접받고 이런 저런 생각으로 잠을 설치며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이른 아침 공기는 더 없이 맑고 시원한데, 민족의 한을 아는지 처마에서는 젖은 이슬방울이 처연히 떨어집니다.
푸짐한 식사를 하고 커피 한 잔을 곁들인 후에 친절한 안보수련원 소장님의 아기자기한 안내로 5진 7보 53 돈대로 구축된 강화도 전적지 중 덕진진과 광성보를 둘러보았습니다. 별 중의 별인 북두칠성이 바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영원히 빛을 발하며 7개 무덤 속에 영면하신 51위의 순국선열들과 무명용사들의 넋을 기리며 공조루(控潮樓)에 서서 그 현판의 뜻처럼 끌려왔다 밀려가는 바닷물같이 밀고 밀리는 외세와의 치열한 전투의 역사를 더듬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현실을 직시해 봅니다.
언제나 우리들 선조의 역사 주체는 외국이 아니고 우리였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만들고 역사는 우리들의 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부터 기득권자인 권위주의 세력들의 역사는 가고 이름 없이 사라져간 저 무명 용사들처럼 민초들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 현장을 답사하는 주권자인 바로 우리 국민들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순간 순간의 오늘이 참으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시대입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역사여. 민족이여. 겨레여. 국민과 문경시민들이여. 다시금 태어나야합니다.
8만 대장경판을 만들었다는 선원사지엔 고(故) 육영수 여사 추모를 겸한 논두렁 연꽃 축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먹이를 공양하면 목탁소릴 낸다는 우보살님이 새끼를 거느리고 우리들 일행을 반가이 맞았습니다. 한바퀴 돌아보고 잠시 시상에 젖으며 두고 온 님을 생각합니다.
연꽃 피는 밤//저녁 서편 하늘에 꽃구름 일고/하늘같은 연못에도/여기저기 꽃구름일고 있습니다./연못이 그대라면 난,/한 송이 참한 연꽃이 되렵니다./꽁꽁 언 세월이 풀리고/봄비가 가슴을 두드려 깨우면,/그대 품에 질퍽하게 안겨/추억의 그늘을 드리우겠습니다./한 자루 큰 촛불 되어 /우리들 밤을 위해 한없이 태우렵니다./꽃잎이 하나 둘 늘어날수록/뿌린 허무란 구멍 숭숭 뚫리듯/우리들 아름다운 삶을 위해/허한 고독도 참아내겠습니다./달 밝은 밤엔 연인이 돼주고,/바람이 불면 말벗도 되렵니다./잠자리, 나비 같은 나그네에겐 /쉴 자리 내어주고,/폭우 쏟아지는 궂은 날씨에도/꺼지지 않는 등 하나를 띄워/그대 올 길 훤히 밝히렵니다./그대 내게 오시려나/은밀한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염하를 건너 가까운 북한 예성 강변의 연백 평야를 바라보며 안내 장교의 설명을 듣습니다. 북한 식량의 1/5을 생산하는 곡창지대인 이곳이 사실은 남한 땅이었는데, 이 곳을 우리가 차지하면 북한이 예성 강물을 막아 농사를 못 짓게 할 것이라며 우리는 동부전선 쪽을 북한은 서부 전선 쪽을 차지하게 됐다는 뒷얘기였습니다. 전쟁 가운데서도 이러한 아름다운 뒷거래가 있었다니 참으로 우리 민족이 놀랍습니다.
그 옛날 아라비아 상인들이 다녀갈 정도로 번창했던 무역 근거지인 벽란도를 망원경으로 바라보며 회상에 젖습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 쌓였고 한 면은 광활한 광야 대륙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한반도, 사계절이 또렷한 우리들의 조국 금수강산에 심리전을 위한 포신 모양의 대형 스피커가 철거되듯 포신과 같은 무장이 해제되고 저 구름처럼, 연백평야에 나는 저 백로처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두 손 모아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곤 다 함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를 불러봅니다.
귀향 가까운 길에 한줄기 소나기가 목마른 가슴을 적십니다. 이처럼 언제나 고향 땅은 그립습니다. 대접을 잘 받았는데도 잠시 떠난 고향의 흙 냄새와 인정을 대하니 그리 좋을 수가 없습니다. 애국의 길은 바로 고향을 위해 애향하는 길이요,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길은 상생과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는 길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짧은 기간 조그마한 일들로 얼굴을 붉히던 것이 보기 싫었지만 곧 서로 화해의 인사를 나누는 모습들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고려 고종이 몽고군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피난 갈 때에 손돌의 배를 타게 되었다는데 강물의 흐름으로 인해 길이 막히자 왕은 손돌을 몽고군의 첩자로 의심하여 그를 처형하였답니다.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을 때였겠지요. 그 후 사람들은 이곳을 손돌목이라 불렀다는 슬픈 역사의 현장인 손돌의 무덤을 회상합니다. 한강물이 바다와 만나면서 물길의 흐름을 분간할 수 없는 이곳에 일년에 한번씩은 험한 날씨가 일어 손돌이 나타난다 합니다. 이 날씨에 이는 바람을 손돌바람이라고도 한답니다.
지금까지 뼈저린 분단의 역사를 살아오면서 억울하게 죽은 손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무덤도 없이 발굴되는 희생자들의 한 서린 유골들에서 차디찬 손돌바람이 일고 있습니다. 뼈아픈 과거도 희망찬 미래도 함께 이뤄야 하는 오늘을 우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요? 다 함께 깊이 생각해 보는 유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이런 기회를 마련해주시고 안보수련을 위해 수고하신 모든 분들, 그리고 분단 일선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며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고 계시는 국군장병들께도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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