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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자주 듣던 말로 ‘미국은 거지도 미제를 먹는다’는 말이 있다. 월남전으로 미제 물건이 쏟아져 들어오던 때 미국 것에 대한 동경을 압도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지금은 미제에 대한 선호가 많이 떨어졌지만 미국에 대한 동경은 여전히 반미주의라는 또 다른 흐름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

한국은 미국에 대한 감정이 세계에서 가장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는 나라이면서 나라의 규모에 비해서는 미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과 방문객을 보내는 이상한 나라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100만명이 넘는 한국인이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와 그 주변 지역은 향후 10년 안에 한국인 인구가 150만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워싱턴 DC를 중심으로 한 메트로폴리탄 지역에는 한국인 인구가 끝없이 밀려들어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10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두 배 가까이 불어났다. 한국인이 미워하는 미국은 어떤 미국이고, 한국인이 기를 쓰고 오려고 하는 미국은 어떤 미국인가. 그리고 진짜 미국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미국인도 알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한국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외국인한테 설명해야 할 상황을 생각하면 그 어려움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에 대한 탐험은 계속돼야 한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곧 한국에도 닥치기 때문이다. 이른바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이다. 다른 말로 아메리카나이제이션(Americanization)이다.

서유럽 만한 땅덩어리가 하나의 나라로, 단일 시장으로 형성된 미국은 자본의 천국이다. 미국에서 전국적 규모의 자본을 축적한 거대 자본들은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미국에서 받는 똑같은 대우를 강요한다.

한국이 외환위기에서 지불한 대가가 바로 그것이다. 국제통화기금과의 차관 연장 협상에서 자본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잃었다. 그래서 한국은 미국 사회처럼 될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와 팝송의 영향만이 아니다. 근본적으로는 자본의 방임을 전제로 사회가 조직되고 운영되는 원리가 미국을 닮아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의 미국은 어떻게 보면 작은 규모에서 미래의 한국이다. 지금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힘센 나라이지만, 가장 잘 사는 국민이 미국인은 아니다. 가장 많은 부를 생산해내지만 선진국 중에서는 가장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나라다. 사회의 안정을 지탱해준 중산층은 점점 엷어지고 직업은 고소득 기술 영업직과 저임금 시간제 서비스직으로 양분되고 있다.

제조업은 중국으로 이전하고 새로 떠오르는 하이테크 산업은 영어권인 인도로 이전하고 있다. 자본은 더 높은 이윤과 더 높은 생산성을 수확하지만 노동계급에게 돌아오는 것은 삭감된 임금 또는 실직이다. 그 결과 사회적 재화의 배분이 극도로 왜곡되고 부익부 빈익빈은 심화되고 있다.

이 때문에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영향을 처음으로 받는 곳은 묘하게도 미국이다. 미국의 노동계층이다. 반어적으로 말해서 아메리카나이제이션의 최초 피해자는 아메리칸이다.

최근 미국에서도 마치 새로운 발견인양 노동계급의 고통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근로빈곤계층(working poor)이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마치 80년대 한국 대학생들이 했던 것처럼 저임금 시간제 노동자로 ‘위장취업’을 한 뒤 체험담을 쓴 바바라 에런라이히의 'Nickel and Dimed'가 베스트셀러로 팔리고, 아예 제목을 <근로빈곤계층(The Working Poor)>이라고 붙인 데이비드 K 시플러의 책도 주목받고 있다.

미국 사회의 의제는 ‘사커 맘(Soccer Mom)’ 대신 ‘버거킹 맘(Burger King Mom)’으로 바뀌고 있다. 전자는 자녀들을 축구 연습에 데려다 주는, 교외에 사는 안정지향적인 중산층 주부를, 후자는 버거 킹이나 맥도날드처럼 시간제 저임금을 주는 직장에 다니면서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독신여성을 뜻하는 말이다. 이런 여성들의 25%가 극빈자로 분류되고 있다.

선거철이 되면서 이들의 복지와 권리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다. 근로빈곤계층이라는 말 자체가 미국 사회 건국의 정신과 모순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는데도 빈곤계층으로 남아 있다고 하면 그 사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원래 사회적 성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열심히 일하면 괜찮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뜻도 포함된 개념이다. 그러나 미국은 더 이상 노동이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사회로 가고 있다. 단순히 자본의 문제만은 아니다. 미국 사회에 팽배한 '개인주의와 부는 신의 은총'이라는 칼뱅주의적 종교적 전통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의 다른 말은 자본 방임주의이다. 이 자본을 첫 번째로 견제해야 할 곳도 미국이다. 미국 내에서 견제가 걸리지 않으면 어디에서도 고삐 풀린 자본을 견제하기 힘들다. 과연 그런 움직임들이 조직화되고 커지고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더욱 더 자본 방임주의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는가. 그것이 2004년 대통령 선거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미국 사회의 양극화는 종종 '블루 아메리카(Blue America)'와 '레드 아메리카(Red America)'라고 표현한다. 대통령 선거 개표 방송에서 민주당 후보가 이긴 지역은 파란색, 공화당 후보가 이긴 지역은 붉은 색으로 표시한 데서 보편화한 개념이다.

보통 공화당은 잘 사는 사람들을 대표하기 때문에 레드 아메리카는 세계화의 흐름을 주도하면서 성공한 계층을 의미하고, 블루 아메리카는 세계화의 흐름에 뒤처진 노동자 농민 계층을 지칭한다. 레드 아메리카만 보고 미국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필자는 2004년 여름 주로 블루 아메리카를 다녔다. 지난 선거에서 민주당이 이긴 지역을 다녔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또 미국에서도 세계화의 흐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곳을 다녔다는 말이다.

향후 십수 회에 걸쳐 그 족적을 연재한다. 이 기록은 엄격히 말해 전통적인 기사 형식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단순한 기행문도 아니다. 그 중간쯤이다. 전통적인 기사 형식이 아니라고 해서, 기사로서의 객관성과 진실성을 무시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명기해두고 싶다.

미국 거지는 더 이상 미제가 아닌, 중국제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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