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치(鄭領峙). 마한의 한 왕이 난을 피해 이 근처의 달궁으로 피신을 와서 정씨 성을 가진 장군으로 하여금 이곳은 지키게 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실제로 여기서 달궁까지는 10km 이내로 궁의 서쪽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조망할 수 있는 기막힌 곳이다.
북쪽의 고리봉 남쪽 자락의 9부 능선쯤 되는 곳, 정확히는 정령치에서 기분 좋은 숲 속 길로 300m를 더 가면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개령암지가 나오고 여기서 100m를 더 가면 마애불상군이 나타난다.
아무리 무더운 한여름에도 이 길은 숲 속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시원한 산행을 즐길 수가 있고 인적이 드물어 한적하다 못해 차라리 으시시하기까지 하다. 때마침 만개한 원추리꽃을 비롯한 각종 야생화는 지리산 원시림의 맛을 느끼게도 한다.
마애불상군의 그 아래에는 비스듬한 평지와 샘이 있고 절터의 흔적이 보인다. 지표의 초석이나 건물지가 눈에 띄지는 않으나 기와나 도자기·토기 파편을 주울 수 있으며 학계에서 적석 2열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 마애불은 저 아래 달궁을 수호하던 정 장군과 황 장군의 초상이라고 전해온다. 정령치는 바로 정 장군이 지키던 곳이라는 데서 연유한 지명이다. 이러한 설화와 기록이 어떤 연유에서 형성되었는지는 알려진 게 없지만 지리산에 숨어든 마한의 후예들의 한이 담겨진 설화가 아닐까.
정령치 마애불상군은 바위로 이루어진 고리봉에서 암반이 내려오다 뚝 끊긴 곳에 자리한다. 그 아래는 평평한 대지가 넓게 분포하고 있어 절터로서의 여건을 갖추었고 비탈진 계곡이 달궁마을로 이어진다.
응회암으로 이루어진 암반면은 풍마가 심하여 거칠고 10도 정도 뒤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다. 마애불은 동쪽으로 20도쯤 기울어진 남동향으로, 7m 정도 높이의 암벽 벼랑에 비교적 깊은 선각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이 불상군에서 많은 명문을 발견했음에도 아직 정확한 역사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고 근처에 있는 개령암지 또한 기와나 도자기, 토기 파편이 수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쾌한 해답을 아직은 우리들에게 제시하지 않고 지리산의 원시림 속에서 잠자고 있는 실정이다.
이 곳 마애불상군이나 달궁의 흔적들, 경남 함양의 돌무덤, 생초의 봉분군 등등 잠자고 있는 지리산의 많은 역사가 곳곳에 산재해 있는데 우리들은 지리산을 그저 먹고 마시며 흥청망청하는 장소로만 알고 있어 그 안타까움을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