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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지빠귀의 뱃속으로 들어간 금잔화는 검은지빠귀의 살이 되었을까. 아니면 흑갈색 깃털이 되었을까. 그도 아니면 한 번도 내가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는 그 경계심 많은 눈동자가 되었을까. 아니다. 검은지빠귀의 부리가 저리도 선명한 노란색인 걸 보면 금잔화 꽃잎은 검은지빠귀의 부리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오렌지색 금잔화 꽃잎을 꼭꼭 찍어 먹었을 검은지빠귀의 그 샛노란 부리가 햇빛 속에서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 금잔화에 대한 검은지빠귀의 이 지독한 사랑 앞에서 우리는 검은지빠귀를 용서하기로 했다.
2. 그래, 내가 인간이구나
그 이듬해 보라색 등꽃이 지고 등나무 잎사귀가 제법 무성해질 무렵, 검은지빠귀는 우리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느 날 오후, 안뜰의 손바닥만한 잔디밭을 깎고 있는데, 등나무 덩굴이 타고 넘어가는 나무담장 쪽에서 어린 새들이 재재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잔디 깎기를 멈추고 귀를 기울여 보니, 그 소리는 무성한 등나무 잎사귀로 가려진 안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잎사귀를 들춰보았더니 나무담장 위에 새 둥지가 하나 보였다. 아니, 그 좁은 나무담장 위에 둥지를 틀다니! 그 안에서 먹이를 물어다 줄 어미 새를 기다리고 있는 어린 새들의 노란 부리들이 조금 보였다.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발돋움을 하고 잎사귀를 조금 더 들추자, 재재거리던 소리가 뚝 그쳤다. 놀라기야 어린 새들이 더 놀랐겠지만 흥분된 마음에 콩닥거리던 내 가슴도 놀라 얼른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나는 딸아이를 불러 귓속말로 소곤거리며 새 둥지가 있는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딸아이는 살금살금 나무담장 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다시 잎사귀를 살짝 들춰내 딸아이에게 새 둥지를 보여주었다. 딸아이의 눈에는 어린 새들의 노란 부리는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사다리가 없으니 의자를 내와서 보여줄까?" 하고 물었더니 딸아이는 "그럼, 새들이 놀래잖아요!"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 이후로 며칠 동안 그 새 둥지는 우리 가족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그 둥지가 검은지빠귀의 둥지임을 알게 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다가 등나무 잎사귀들 속으로 들어가곤 하는 새는 분명 검은지빠귀였다.
검은지빠귀는 경계심이 많은 새라 우리가 자신의 둥지를 관찰하고 있음을 곧 눈치 챘다. 우리는 어미 새가 먹이를 구하러 나간 사이에 잠깐 잎사귀를 들춰 새 둥지를 쳐다보고는 했는데, 그런 우리의 모습이 어미 새에게 발각된 것이었다.
우리가 둥지가 있는 쪽 잔디밭으로 나서기만 해도 어미 새는 어느 틈에 날아왔는지 뒷집 지붕 위에 앉아서 우리를 쳐다보면서 다급한 음조로 어린 새끼들에게 경보음을 발하곤 했다. 그 이후로는 우리는 창문의 커튼 뒤에 몸을 숨기고 멀리서 새 둥지 쪽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둥지를 드나드는 어미 새의 움직임이 조금 뜸하다고 여겨진 어느 날, 나는 안뜰에 나가 둥지 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무성한 등나무 잎을 흔들고 가는 바람 소리만 가끔씩 들릴 뿐 대낮의 안뜰은 조용했다. 어린 새들의 재재거리는 가녀린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둥지 쪽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잎사귀를 들춰보았다. 아무런 소리도,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둥지는 비어 있었다.
벌써 새끼들이 다 자라서 날아간 것일까. 아니면 너무 인간 가까이에 둥지를 튼 것이 불안해서 이사를 간 것일까. 빈 둥지를 바라보는 내 마음 속에 서늘한 바람이 한 줄기 지나갔다.
그래, 내가 인간이구나. 내게로 조금 가까이 다가왔구나 싶었던 검은지빠귀는 다시 그 거리를 벌려 놓았다. 날개가 없는 나는 그 거리를 결코 좁힐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나는 슬펐다.
3. 딸기도둑 검은지빠귀와 눈을 맞추다
그해 늦봄, 채마밭에 딸기를 심었다. 어린 모종을 사와 옮겨 심은 딸기는 맹렬한 기세로 덩굴을 뻗어 나가고 덩굴이 땅에 닿은 자리마다 하얀 실뿌리들을 내려 점점 그 영토를 넓혀나갔다. 오래지 않아 채마밭은 딸기밭으로 변하고 말았다.
날씨가 조금씩 더워지고 햇볕이 점점 따가워지자 딸기는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꽃이 진 자리마다 마치 상처가 아무는 것처럼 여물면서 연두색 딸기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여름이 좀 더 깊어지면 저 연두색이 빨갛게 변하리라. 딸기를 좋아하는 딸아이가 딸기를 한 입에 쏙 넣으면서 내게 지어줄 미소를 생각하며 나도 실없이 미소를 떠올리곤 했다.
그러나 나의 미소는 곧 사라지고 말았다. 제법 알이 굵어지고 색깔도 진홍색으로 변해 이제 따먹어도 좋을 정도로 딸기가 잘 익었을 무렵, 채마밭에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든 것이었다. 잘 익은 딸기만을 노려서 파먹고 막 익어가는 딸기에도 흠집을 내서 못쓰게 만드는 검은지빠귀. 1년 전에는 금잔화를 먹어 치우더니, 이제는 딸기까지 넘보다니!
부아가 치민 나는 뭔가 조치를 취하고자 했지만, 땅에서 발을 뗄 수 없는 동물이 날개 달린 동물을 이겨낼 방도란 없었다. 잘 익어가는 딸기들을 그 놈의 눈에 띄지 않도록 딸기의 잎사귀로 가려보기도 했지만 검은지빠귀는 그런 나의 잔꾀는 우습다는 듯이 귀신같이 그걸 쪼아놓고 내빼곤 했다. 그 해 우리 집 채마밭이 온통 딸기밭이 되었는데도, 우리의 입 속으로 들어간 딸기의 숫자는 채 열 개를 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금잔화를 먹어치운 검은지빠귀를 용서했듯이 딸기를 먹어치우는 검은지빠귀도 용서하기로 했다. 이제 다시는 딸기를 심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우리는 채마밭의 딸기를 잊었다. 그런 어느 날, 외출하고 돌아와서 빨래를 걷으려고 안뜰로 나가보니 채마밭 부근에서 검은지빠귀 한 마리가 어정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인기척만 나도 하늘로 꽁무니를 빼곤 하던 그 놈이 어찌된 일인지 날아가지를 않고 우리 눈치를 보며 비실비실 뒷걸음질만 칠 뿐이었다. 더위를 먹은 것인지, 아니면 날개에 무슨 이상이 있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딸기를 너무 먹어서 몸이 무거워 날지를 못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가만히 몸을 낮추고 앉아서 그 놈과 눈을 맞췄다.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그 놈도 나를 바라보았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고 있었다. 퍼뜩 무슨 생각이 들어, 나는 일어서서 플라스틱 통에 물을 조금 담아와 그 놈 앞에 놓았다. 그리고 그 놈이 편히 물을 먹을 수 있도록 몸을 돌려 집안으로 들어갔다.
한 시간 후쯤 나와서 보니 놈은 그 자리에 없고 플라스틱 물통만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물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 놈이 목을 축였는지 아니면 먹지 않고 그냥 날아갔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검은지빠귀와 나 사이에 존재하던 그 거리감이, 플라스틱 물통 안의 줄어든 물의 양만큼 좁혀졌음을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 때, 내 귓가에 고운 새의 노래 소리가 들렸다. 눈을 들어 보니 앞집 지붕 위에서 검은지빠귀 한 마리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