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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금하는 모습
모금하는 모습 ⓒ 김재경
기원군은 서울에서 인자한 할머니와 법 없이도 살만큼 온유한 부모님의 슬하에서 예쁜 여동생과 남부럽지 않게 알콩달콩 살았다.유복했던 행복도 잠시, 출판업을 하던 아버지(61)의 사업이 외환위기 무렵부터 하향길로 접어들며 부도가 났다.

설상가상으로 부흥동의 외할머니(69)마저 뇌수종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장녀였던 유군의 어머니(45)는 친정 부모님을 보살필 겸 두 가족의 한 지붕 생활을 시작했다. 유군의 아버지는 마지막 남은 전세금으로 이 일 저 일을 시작했지만 교묘하게 운명은 비켜가고 있었다. 온 가족이 아침부터 밤까지 닥치는 대로 일에 매달렸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고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간염보균자로 출생했던 유군은 부흥중학교 2학년 때 활동성 간경화로 간이식 수술을 받아야 될 처지에 놓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차일피일 미뤄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유군의 아버지는 간을 떼여 내기에는 많은 나이(당시58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위해 검사를 받았다. 사업실패로 술에 절어 살던 간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버지의 간은 건강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수많은 온정의 손길로 유군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의 간을 이식 받는데 성공했다. 정이 많은 유군은 활달한 성격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계속되는 병원치료 때문에 고등학교마저 자퇴해야 했다. 그는 홀로 검정고시를 통해 또래보다 3년이나 늦은, 올해 안양과학대 정보통신학과에 입학을 했다. 아버지의 간을 기증 받아 건강을 뒤찾은 유군은 백화점 지하에서 빵 굽는 일을 하며 입학금을 보탤 만큼 성실했다.

금년 5월, 정기 검진에서 간에 이상이 발견되었다. 이식 받은 간이 다시 굳어져 쓰러지며 휴학을 했다. 병원에서는 급성 간경변으로 간을 통째로 이식 받는 길만이 유일한 치료수단이라고 했다.

186cm의 훤칠한 키에 외모가 준수했던 유군은 하루가 다르게 꼬챙이처럼 말라갔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샛노랗다 못해 눈알까지 붉그레 해지며 황달수치(정상인은 1)가 40까지 오르며 앉아 있지도 못할 만큼 위급해졌다.

복수가 차 올라 만삭의 배를 옆으로 누인 체 호흡조차 버거웠다. 간은 고통이 없는 반면 피부에 온갖 가려움증과 상처를 동반했다. 가정 형편을 뻔히 아는 유군은 "엄마! 너무 애쓰지 말아요. 전에 병원 비도 못 갚았는데" 어쩔 수 없는 현실에서 가족들은 목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포기상태에서 이모할머니 댁에서 보내온 1000만원은 희망의 끈이 되었다.

유군의 부모는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눈물로 호소하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유군의 아버지는 친구나 후배들을 찾아 나섰지만, 생각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뭔들 못하겠는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어려운 여건에 있는 애가 있는데"라며 말문을 열었다. "사업도 어렵고, 뭔 돈이 있겠는가"라며 모두가 일축한다.

"사실은 우리 애라네. 힘들겠지만 한 구좌라도 도와주게."
"선배님은 이제까지 한번도 어렵다는 말이 없던 분이었는데.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요."

후배의 한마디에 유군의 아버지는 아직도 인정이 메마르지 않은 살만한 세상임을 느꼈다고 한다.

사체 간이식을 신청했지만, 언제 수술을 받게 될지 국내에서 두 손 놓고 막연하게 기다릴 수는 없었다. 유군의 상태는 생사를 넘나들 정도로 급속도로 악화 일변도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비교적 간기증이 용이한 중국행을 신청했다.

"할머니를 찾습니다."
뉴코아 사거리와 학운공원 앞에는 "할머니(81세)를 찾습니다." 사진이 담긴 현수막이 내 걸렸다. 오가는 사람들마다 치매 노인일 거라고 한마디씩 던지고 지나친 지 며칠이 지났다.

지난 19일, 상가 앞에 사람들이 "현수막 속의 노인이 구로구 고척동 하천에서 발견되었다."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유군의 할머니였다.

대쪽같이 올곧은 성격으로 남에게 신세지기를 싫어했던 학같이 정갈한 매무새. 노인의 죽음을 아무도 이해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파트 승강기 카메라에 찍힌 옷차림이 영락없는 유군의 할머니였다.

손자를 끔찍이 사랑했던 할머니는 매일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잠에서 깬다. 그 날도 평상시처럼 다림질하고, 4시에 학운공원으로 산책을 나가셨다고 한다.

유군의 아버지는 "기원이를 두고 그렇게 빨리 가실 분이 아니지요. 이마에 난 상처로 봐서 울며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실족해서 장마로 불어난 물에 휩쓸려 떠내려 간 것으로 추정돼요."라며 말조차 힘든 아픔을 삭혔다.

유군의 할머니는 손자가 아픈데 늙은이가 밥만 축낼 수 없다며 하루 한끼로 겨우 목숨을 연명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일찍 들어오는 아들에게 "밥 굶지 말고 다니라"며 호주머니에 지폐를 찔러 주셨고, 유군의 침대옆 벽에 비닐 주머니를 매달아 놓고 떡이며 과자를 꼼꼼히 챙겨주시던 분이었다.

유군의 외할아버지(70)는 상가 경비원으로 일하고, 엄마는 새벽부터 야쿠르트 배달을 하고 오후에는 식당에서 일했다. 대학생인 여동생 또한 수업이 끝나면 아르바이트에 매달렸다.

온 가족이 삶의 끈을 부여잡고 열심히 뛰어 다닐 때 다섯차례나 뇌수술을 한 외할머니 병수발과 투병중인 손자를 보살피며 집안 살림은 고스란히 할머니 몫이었다. 할머니는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10리 길 중앙시장까지 걸어가서 찬거리를 사서 들고 오곤 했다.

평탄한 삶의 몰락에서도 "기원이만 건강하면 걱정이 없겠다"던 할머니의 손주 사랑은 끔찍할 정도로 각별했다. 그런 할머니의 사망 소식을 가족들은 유군에게 알리지 않았다. 사망 소식을 접한 다음날 할머니의 장례식을 뒤로한 체 유군은 어머니와 중국행 비행기를 탔다.

유군은 7월 23일 북경(北京)의 대학병원에서 긴급하게 간이식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된 상태로 재 이식을 받았기에 회복이 더뎌 추가 치료가 불가피한 상태라고 한다.

유군의 병세가 호전되어 퇴원한다해도 가족이 부담해야 될 비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간이식으로 지난 번 병원 비와 수술비로 진 빚이 8000만원, 지금의 수술비와 병원비 역시, 족히 1억원은 넘을 것이라고 한다.

관심으로 사랑이 꽃 피는 동네

침대옆에는 할머니의 정이 담긴 비닐 봉지가 매달려 있다.(아직도 쓰레기통에는 유군이 먹다남은 과자 포장지가 남아있다.)
침대옆에는 할머니의 정이 담긴 비닐 봉지가 매달려 있다.(아직도 쓰레기통에는 유군이 먹다남은 과자 포장지가 남아있다.) ⓒ 김재경
부흥동 이영희 통장은 수시로 위층에 사는 기원네 집을 찾았다. "기원아, 힘내라. 용기 잃으면 안돼" 대답할 힘조차 없었던 유군은 고개만 끄떡였다고 한다.

과일을 들고 올라갔을 때 유군의 할머니는 "이 신세를 어떻게 갚느냐"고 했다며 이 통장은 말끝을 흐렸다. "올라 갈 때마다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그 앞에서는 차마 눈물을 보일 수 없었어요. 돈이 뭔지. 그렇게 착한 기원이가" 이영희 통장은 집으로 돌아와서 엉엉 울었다고 했다.

생각다 못해 거주하는 112동을 돌며 사정을 호소하며 모금을 시작했다. 5만원. 3만원. 1만원. 1천원까지 2시간 동안 46만여원이 모금되었다.

이영희 통장은 안타까운 사연을 부녀회장에게 알렸고, 부녀회장은 동대표 회장에게 알렸다. 모두가 "꺼져 가는 생명을 살려보자"고 이구동성으로 마음을 합했다.

아름다운 사랑이 모아진 '일일찻집' 수익금은 310여 만원으로 수술비와 병원비에는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었다. 사랑이 피어나는 끈끈한 주민들의 인정을 버팀목 삼아 부디, 유군이 건강하게 일어서는 기적이 일어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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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인간 냄새나는 진솔한 삶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현재,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이며 (사) 한국편지가족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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