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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말도 거의 사라지고, 말테우리도 사라졌지만, 이 녀석들은  반들반들 이쁜 눈으로 제주에 살고 있었다.
토종말도 거의 사라지고, 말테우리도 사라졌지만, 이 녀석들은 반들반들 이쁜 눈으로 제주에 살고 있었다. ⓒ 김은주
여름 제주에서는 숨을 쉬기가 쉽지 않습니다. 공항에 내리는 순간, 숨 고를 새도 없이 내게 달려드는 열대의 태양 때문이 아닙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옥빛 바다, 밭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돌을 쌓아 만든 소박한 돌담들, 숨비 소리 내쉬며 몇 번이고 자맥질하는 해녀들, 바람이 불 때마다 바람보다 먼저 누웠다 일어나는 풀들이 보여 주는 초록의 향연….

그 섬에 서면 마음 깊은 곳까지 완벽하게 무장 해제를 당하고 맙니다. 나도 모르게 무방비 상태가 되어, 감탄사를 내뱉느라 정신이 없지요. 그러니 어떻게 쉽게 숨을 쉴 수 있겠는지요. 7박 8일 제주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내내 저는 바보처럼 “정말 좋구나!” 소리를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신들이 빚어낸 아름다운 제주의 오름

오름은 자그마한 기생 화산을 일컫는 제주 토박이말입니다. 4·3 때는 살기 위해 도망친 제주 사람들의 항쟁 거점이었고, 숱한 설화의 발생지이기도 했습니다. 따라비오름, 용눈이오름, 샛별오름, 아부오름…. 제주 사람들은 모양새 따라 이름도 참 잘 지어 놓았습니다.

그 가운데 도들오름은 이번 여행에서 두 번이나 찾아가게 된 곳입니다. 공항 활주로가 가까이 있어서 비행기 이륙하는 모습을 손에 잡힐 듯 볼 수 있는 곳이고, 별빛이 내리기 시작하는 밤이 되면 바다에 하나 둘씩 켜지는 한치잡이 배들의 집어등 불빛을 질리도록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일제 때 행정 구역 정리하면서 도들오름이란 이름 대신 ‘도두봉’이란 이름을 새로 얻었지만, 제주 사람들은 나라 사람들이 뭐라고 부르라 했건 간에 불러 오던 그 이름으로 도들오름을 만나고 있습니다.

도들오름은 높이가 65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오름이라서 올라가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꼭대기에 너른 평지가 있어서 풀밭 아무 곳에나 털썩 앉아 바다에 환하게 불을 밝힌 한치잡이 배들을 구경하는 맛이 일품입니다. 친구는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서 연신, “여기 진짜 이뻐. 나중에 너도 꼭 와”하고 얘기하느라 바쁩니다. 마을 가까이 있기도 하고, 아이들도 쉽게 오를 수 있는 오름이라 퍽이나 친근하게 여겨지는 곳입니다.

구름을 헤치고 성산 앞바다에 떠오르는 해
구름을 헤치고 성산 앞바다에 떠오르는 해 ⓒ 김은주
성산에서 일출을 보려고 새벽에 일어나서는 내내 마음이 바빴습니다. 혹시라도 부지런한 해가 일출봉에 채 오르기도 전에 먼저 수평선을 밀고 올라와 버리면 어떡하나, 구름이 많아서 해 뜨는 걸 보지 못하면 어떡하나, 일출봉 꼭대기가 무지 붐벼서 발도 못 딛고 그냥 돌아오게 되면 어떡하나, 지레 이것저것 걱정이 많았거든요.

터진목을 지나 일출봉 오르는 가파른 계단을 쉬지 않고 올랐습니다. 숨이 턱에 차는데도 열심히 달린 덕분에, 일출봉 정상에 올라서는 해 뜨기까지 한숨 돌릴 여유까지 얻었습니다. 숙소에서 자던 옷 그대로 입고 나온 사람들, 거기 참 많던 걸요? 세수도 못하고 달려 나온 사람들 사이에, 경건한 얼굴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님들도 많긴 했지만요.

사람들 틈에 삼각대를 세우고 기다렸습니다. 구름이 많은 날이라 수평선에서 곧장 떠오르는 모습은 보지 못하고, 한참 뒤에야 구름 뒤에서 솟는 해를 봤습니다. 감탄사로 술렁대던 사람들은 해가 구름 밖에 나오자마자 볼일 끝났다는 듯이 서둘러 내려가 버렸습니다. 사람들을 말리고 싶었지요. 이제부터 진짜거든요. 저기 분화구 있잖아요, 저게 8만 평인데요, 저기에 아침 햇살 비치는 모습이 진짜 끝내주거든요,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그거 보고 가시지요? 하고 말입니다. 해뜨는 성산 일출봉의 진짜 장관이 막 시작되는 참이었습니다.

일출봉 분화구는 지름이 무려 6백 미터입니다. 넉넉하고 평온하게 자리 잡은 그 분화구는 온통 억새밭입니다. 고만고만한 봉우리 99개가 빙 둘러 분화구를 에워싸고 있지요. 구름을 벗어난 아침 해가 바다에 길게 빛의 다리를 놓고, 그것이 일출봉 분화구에 다다랐을 때 어두웠던 초록 풀밭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분화구를 감싼 봉우리들이 그 빛을 받아 바다를 등에 지고 반짝이며 살아나는 모습, 그것을 보지 않은 이들에게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동입니다. 그걸 보노라면 저 너른 분화구를 설문대할망이 빨래 바구니로 썼다는 전설이 그냥 전설이 아니라 진짜겠거니 하는 생각이 든다니까요.

섭지코지. 풀밭도 하늘도, 더없이 푸르다.
섭지코지. 풀밭도 하늘도, 더없이 푸르다. ⓒ 김은주
성산 가까이에 붉은 화산재(그걸 ‘송이’라고 한다더군요)로 덮인 섭지코지가 있습니다. 바다를 향해 곧장 내달리고 있는 이 섭지코지는 드라마 ‘올인’ 때문에 망가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두어도 좋을 것을, 바다로 나 있는 산책길에 온통 송혜교와 이병헌의 사진을 세워 놓았는가 하면 드라마 세트장이 태풍에 날아갔다고, 한쪽에서는 그 세트장 복원하느라 시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눈에 거슬리고 귀에 거슬리는 것들에 눈 닫고, 귀 막고 나면 너른 풀밭과 맑고 환한 하늘, 그리고 그 하늘 빛깔을 그대로 닮은 바다만 남습니다.
“야, 진짜 미치게 파랗네.”
그 바다, 그 하늘을 보면서 우리는 너무 아름다워서 미쳐 버릴 것 같다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 새똥이 하얗게 엉긴 선녀바위에는 갈매기들이 심심한 얼굴로 가끔 울어 대고, 겟메꽃이며 술패랭이며 돌매화가 잔뜩 어우러져 있는 거기 풀밭에서 오래도록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신양 해수욕장까지 걸어 내려오면서 본 바다는 또 얼마나 고운 옥빛이던지요.

몇 년 전에 갔던 아부오름도 좋았는데, 영화 <이재수의 난>을 찍은 곳이지요. 움푹 패인 분화구 안에는 말들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바람은 가슴 속까지 시원하게 불어오고, 온갖 들꽃이 피어나 나무 한 그루 없는 아부오름의 부드러운 능선을 풍성하게 채우고 있고, 분화구 바닥까지 달려 내려가는 동안 사람 손길 타지 않은 야생풀들이 거칠게 발을 잡아 채는 곳이었어요.

너무 좋은 곳에 가면 “한숨 자고 가야 하지 않나?” 소리를 빼놓지 못하는 나는 그 곳에서도 다리 뻗고 한참을 누워 있었더랬지요. 이번 걸음에는 다시 들러 보지 못했지만, 언젠가 꼭 다시 가 보고 싶은 곳입니다.

아, 곶자왈 얘기도 빼놓으면 안 되지요. 오름 근처라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곶자왈은 제주 사람들의 지하수 저장 창고인데요, 나무와 풀이 뒤엉켜 자라고 있는 곳입니다. 규모가 큰 곳으로는 교래 곶자왈이 있는데, 하늘을 가릴 만큼 키가 큰 나무들이 서 있는 길을 따라 지나가노라면 세상에 나무랑 하늘이랑 바람만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곳입니다.

쓸모도 없는 땅 곶자왈을 밀어 버리고 거기다 리조트를 만들겠다고 해서, 한동안 시끄러웠다는데 경기가 나빠지면서 그 소리가 쑥 들어갔다네요. 맑은 물을 포기하고, 눈 앞의 돈다발을 선택하는 순간, 육지 사람들은 ‘제주 삼다수’라는 말을 사전에서만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꿈속까지 찾아오는 싱싱한 파도 소리

최성원이 부르는 노래 ‘제주도 푸른 밤’은 노래가 시작되기 전에 몇 초 동안 파도 소리를 먼저 들려주는데, 혹 아시는지요? 손전화 벨소리에 노래를 담아 놓고, 누군가 내게 전화를 하면 저는 파도 소리로 그 사람을 만납니다. 핀잔을 주는 사람도 많았어요, 벌써 몇 년 동안 바꾸지도 않고 늘 그렇게 제주 타령이냐구요.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사람들이 제게 파도 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이번에 원없이 실컷 듣고 왔어요. 우도 서빈백사랑 하고수동에서, 표선 해수욕장에서, 함덕 해수욕장에서, 용두암에서, 그리고 모슬포에서, 서귀포에서 내내 말입니다.

우도를 지키고 있는 등대
우도를 지키고 있는 등대 ⓒ 김은주
소가 느긋하게 누워 있는 모양이라 제주 사람들이 ‘소 섬’이라 한다는 우도에 갔습니다. 어떤 이는 그 곳을 ‘섬 속의 섬’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해양 레포츠의 천국’이라고도 하고, 얼마 전에 전도연이 영화 <인어공주>를 찍는 바람에 또 한동안 시끄럽기도 했던 곳입니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우도 한 자락을 돌아보고 나서 저는 그 섬을 ‘딸들의 섬’이라 말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땀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엄청난 더위, 우도의 해녀들은 태왁을 띄워 놓고 빗창 하나 단단히 잡은 채 먹빛 바다에 몸을 맡겨 놓고 있었습니다. “아들 낳으면 엉덩이 때리고 딸 낳으면 돼지 잡는다”는 속담이 남아 있는 까닭도 해녀들이 물질한 덕분에 먹고 살고, 아이들 학비를 대고, 집을 사고, 밭을 샀기 때문이지요. 물에서 한 번 나올 때마다 ‘호오이 호오이’ 몰아쉬는 숨비 소리가 애잔하게 마음을 치고 갑니다. 전복이라도 하나 제대로 된 놈을 바다가 허락하면 고된 해녀의 물질에도 신명이 나네요.

물에서 그렇게 당당하던 해녀도 뭍에 나오니 등 굽은 할머니의 고단함을 감추지 못합니다. 짠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해도 할머니랑 눈이 마주친 제 마음이, 저 먼저 달려가 “힘드시겠어요, 할머니. 많이 잡으셨어요?” 묻고 맙니다. 그래 놓고는 또 금방 자전거를 타고, 속 편하게 놀러다니는 사람으로 보일 제가 부끄러워지고 말았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검은 잠수복의 그이들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머리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서, 바다를 통째로 지고 가는 듯한 피곤함이 보입니다. 그래도, 할머니들은 그렇게 말한다지요. “물질 안하면 못살아, 물질하는 것만 제일 좋아” 하고 말입니다.

우도에서 머문 숙소는 발코니에서 바다가 환히 내려다보이고, 마당에 앉아 해 지는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여기서 <인어공주> 촬영팀이 몇 달이나 머물렀다고, 별로 자랑할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자꾸만 늘어놓는 숙소 아저씨만 아니었다면 좀더 조용한 휴식이 되었을 테지만, 뭐, 괜찮겠지요. 사람들이 품고 가는 우도의 풍경이, 그렇게 살풍경하거나 메마르지 않을 테니까요.

물질을 마치고 돌아가는 해녀 할머니들
물질을 마치고 돌아가는 해녀 할머니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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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 유일한 산호사 해수욕장인 우도 서빈백사. 멀리 바다 건너 제주의 오름들이 보인다.
우리 나라에서 유일한 산호사 해수욕장인 우도 서빈백사. 멀리 바다 건너 제주의 오름들이 보인다. ⓒ 김은주
우도의 일몰도 좋았지만, 제주에서 본 일몰 가운데 첫손에 꼽을 것은 아무래도 신창리 앞바다에서 본 풍경일 것 같습니다. 해질 무렵 수월봉에 올랐습니다. 멀리 차귀도가 내려다보이고 그림처럼 배가 바다에 떠 있는 풍경을 만났네요.

손을 꼭 잡은 연인들이 난간에 붙어 서서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모습이나, 런닝셔츠만 걸치고 마실 나온 할머니랑 할아버지의 편안한 옷이나, 일몰 보는 것보다는 집에 두고 온 텔레비전 만화 영화가 더 신경쓰이는 꼬맹이가 징징거리는 모습도, 다 이뻐 보였습니다. 해가 똑 떨어지기 전에 수월봉에서 내려와 달려간 곳이 신창리였습니다.

붉은가 하면 파랗고, 파란가 하면 노랗고, 노란가 하면 검고, 검은가 하면 또 희기도 한 온갖 빛의 향연을 신창리 앞바다는 제게 선물해 주었습니다. 하늘이 맑으니 노을 또한 맑아서, 해가 수평선에 똑 떨어지기까지 하늘과 바다는 참으로 여러 가지 표정을 보여 주었습니다. 너무들 벅차서 함께 갔던 사람들 모두 침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귀하고 귀한 해넘이었습니다.

일몰이 보여 줄 수 있는 색깔이 이렇게 다양하다.
일몰이 보여 줄 수 있는 색깔이 이렇게 다양하다. ⓒ 김은주
제주의 돌, 그리고 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누군가 제주에서 뭘 봤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2004년의 제주에서 나는 돌을 봤노라 대답할 것 같아요. 대정읍에서 만난 코 떨어진 돌하르방이나, 추사 적거지 앞에 귀엽게 손 모으고 있는 돌하르방도 좋았고, 바다를 끼고 바람을 버티는 별방진도 멋졌지만, 무엇보다 저는 얼기설기 조화를 이루며 쌓여 있는 돌담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돌담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 하얀 구름들이 좋아서, 필름을 얼마나 많이 썼는지 모릅니다. 눈으로, 마음으로 본 것보다 훨씬 못한 사진이라 조금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도 제주에 가기 위한 썩 괜찮은 핑계 하나 더 생긴 셈이라 생각하려고 합니다. 언젠가 제대로 그 풍경 담는 날까지 가고 또 가겠노라, 스스로에게 멋쩍은 핑계 하나 챙겨 줬거든요.

제주 사람들은 돌을 쌓아 밭을 구획짓는다.
제주 사람들은 돌을 쌓아 밭을 구획짓는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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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경 앞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말을 아끼고 싶어진다.
이 풍경 앞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말을 아끼고 싶어진다. ⓒ 김은주
제주에서 농사를 지으려고 밭을 일구던 사람들에게 가장 지겨운 것이었다는 돌이, 밭마다 예쁘게 울을 세우고, 담장마다 환상적인 균형미를 남겨 주게 될 줄, 먼 옛날 그 사람들은 알고 있었을까요?

이렇게 길게 썼는데도, 아직 서귀포 자연휴양림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고, 산록도로에서 내려다본 제주시가 얼마나 예뻤나에도 입도 뻥긋 못 한 상태고, 2500 그루나 되는 비자나무가 모여 사는 비자림 깊은 숲에서 어떻게 놀다 왔는지 자랑도 못했네요.

할 수 없어요. 제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들어도 한 번 가서 슬쩍 보시는 것만 못하실 거예요. 약올라하지 마시고, 제가 만난 제주를 언젠가 님도 꼭 만나 보시길 부탁드려요. 분명히, 제가 그랬던 것처럼 걸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와 숨쉬기가 힘드실 것이 분명하거든요.

서귀포 자연휴양림 산책길. 휴양림을 찾아 1100도로를 달리면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던가. 초보 운전자에겐 잔인한 도로였으나 휴양림은 멋졌다.
서귀포 자연휴양림 산책길. 휴양림을 찾아 1100도로를 달리면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던가. 초보 운전자에겐 잔인한 도로였으나 휴양림은 멋졌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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