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시설 개선을 위한 예산확충, 교정직 공무원의 증원과 근무환경의 개선은 교정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구금시설 수용자들의 인권을 위해 일하는 많은 인권단체들에서도 오랫동안 요구해 왔다. 늦었지만 교정직 공무원의 수를 늘린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위에 열거한 몇 가지의 단상은 대한민국의 교정행정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다. 지난 2, 3년간 감옥에는 난방시설이 설치되었고, 방마다 선풍기가 달리기 시작했다. 수용자들이 신문과 TV를 볼 수 있게 되었으며, 기초 컴퓨터 교육도 시작했고, 극히 일부지만 외국어 교육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강금실 전 장관의 교정정책은 수용자들에 대한 징벌집행과 계구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하였으며, 구타나 가혹행위, 폭언 등이 많이 사라지기도 하였다. 눈에 띄는 변화는 그밖에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 땅에서 감옥은 오랜 시간 '인권의 사각지대'로 불려 왔다. 이는 독재와 폭력의 지난 정권들이 수십 년간 이 땅을 지배하는 동안 감옥을 민중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해 온 결과이다.
감옥 안에서 수많은 전쟁포로들이 전향을 강요당하다가 죽거나 불구가 되었으며, 또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짓이겨지기도 했다. 더 많은 수의 국민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감옥에 가게 되면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해야 했고, 상상도 못할 인권 침해를 참아내야 했다. 한국의 감옥은 이제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재 전국 45개의 구금시설에는 5만8천여 명이 수용되어 있으며, 1만2천여 명의 교도관들이 근무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범죄가 없어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고, 범죄가 발생하는 한 감옥이 없어진다는 것 역시 현실적으로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감옥의 담은 낮아져야 하고, 수용자들은 사람답게 살 수 있어야한다.
'갇히는 순간 형벌은 시작된다'고 했다.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형벌인데 거기에 다른 어떤 것이 보태어 질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 나라의 감옥을 보면 그 나라의 인권 수준을 알 수 있다는 말은 단지 감옥의 시설과 수용자들의 처우가 좋아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는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존재하는 존엄한 가치인 '인권'이 범죄를 저지른 수용자들에게도 똑같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매번 교도관들을 만나게 되면, 한결같이 수용자들의 '인권'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항상 단서가 붙는다. 인권도 중요하지만 교도소내의 수용질서가 흐트러지고, 정당한 법집행이 무시되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문제다.
그러나 그 원인을 수용자들의 인권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거 구금시설에서의 인권침해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러면 그동안 수용질서가 잡히고, 정당한 법집행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수용자들의 인권이 존중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고,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도관들의 일상적인 물리적 폭력, 언어 폭력은 그들이 말하는 정당한 법 집행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징역사는 놈들은 좋은 말로 하면 안돼"라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인해 수용자들의 정당한 요구나 질문이 고함 한번으로 무시되기 일쑤였고, 다루기 힘든 수용자들의 범죄사실을 다른 수용자들이 들을 수 있는 상황에서 늘어놓으며 자신들에게 굴복하기를 종용하는 행위 등이 그런 것이었다.
지금은 조직폭력배 출신의 수용자들이 활개를 치는 일이 전혀 없다고 모든 교도관들이 쌍심지를 켜고 단호하게 이야기 하지만 필자가 2년6개월의 수형 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2002년 봄까지만 해도 출력을 하는 각 공장이나 사동의 거실에서 조직폭력배 출신들을 반장이나 봉사원 등으로 내세워 교도관의 묵인하에 다른 수용자들을 통솔하는 일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본인들은 정작 작업을 하지 않고 건들거리며 "우리는 교도관들이 못하는 수용질서를 확립하는 교도소에 꼭 필요한 존재"라고 떠들고 다녔다. 조직폭력배 출신의 수용자에게 혜택을 주면서, 그 힘으로 지탱하던 수용질서가 이제는 무너진 것이다.
"요즘 징역살이는 옛날처럼 편하지가 않아"라고 말하는 조직폭력배 출신 한 수용자의 넋두리가 교도관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들리는 것은 내가 감옥을 너무 잘 알아서 생기는 '병'인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얼마 전 서울의 모 구치소에서 벌어진 수용자 폭행의혹사건과 관련하여 법무부 감사관실과 함께 민관합동특별감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물론 구치소의 독방 안에서 수용자와 교도관 사이에 생긴 분쟁이고, 서로의 주장이 정반대이기에 사실을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감사결과 수용자의 정당한 권리구제 방안을 고의로 지연시킨 일, 계구의 착용요건을 엄격히 적용하지 않고 착용시킨 일, 계구 착용의 이유가 소멸되었는데도 장기간 계구를 연속 착용시킨 일 등이 발견되어 수 명의 교도관들이 주의 또는 경고의 조치를 받았다.
교도관들이 교도소를 방문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고소나 고발, 진정이나 청원들 중 정당한 것은 거의 없는데도 이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감사 결과만 보아도, 단편적이긴 하나 교도관들의 주장처럼 허무맹랑한 이야기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구금시설의 수용자들의 인권옹호를 위한 활동을 하며 늘 교정직 공무원들을 함께 이야기 해 왔다. 그들의 근무환경이 지금처럼 열악한 한, 현재처럼 교정시스템과 교정행정이 그들로 하여금 사명감과 보람을 느낄 수 없게 방치하는 한, 구금시설 수용자들의 인권 향상은 없다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그러나 교도관들의 인권이 수용자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향상된다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다.
반대로 수용자들이 교도관들의 정당한 법집행을 무시하고,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으로 수용자 인권이 향상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 둘은 함께 향상되어야 하는 것이지, 하나가 내려가야 하나가 올라가고 하는 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부 수용자들 중에는 고의적으로 교도관들을 괴롭혀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부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일부 때문에 교정행정이 후퇴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일은 수용자들 스스로 지양해야 할 것이다.
방안에 선풍기가 달리고, 화상면회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인권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교도관들을 포함한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갇혀 있는 수용자들에게도 나와 똑같은 인권이 있으며, 그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양보 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감옥의 인권이 지켜지게 되는 것이다.
법무부는 교정전반의 개혁을 서둘러 시작해야 할 것이다. 징벌과 계구에 관한 규칙도 개정되었고, 행형법 개정을 위한 연구 작업도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번의 실수로 시작된 징역이 전과자를 받아주지 않는 우리 사회와 그저 가두어 두는 것만으로 그 책임을 다한 것처럼 생각하는 교정당국의 안일한 태도가 두 번, 세 번의 징역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커다란 이유였음을 잊지 말아야한다.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구금시설 안에서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딛고, 사회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 새로 부임한 법무부 장관과 모든 교정직 공무원들의 의무이자 책임인 것이다. 아직도 감옥 담장은 너무 높다.
최근 잇달았던 재소자에 의한 교도관 사망, 피의자 검거 과정에서의 경찰관 피살 등 가슴 아픈 사건들 뒤에는 꼭 공권력을 바로 세우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담긴 보도를 접하게 된다. 그래서 교도관들에게도 수용자에 따라 이동시에는 무조건 계구를 착용하게 하거나, 근무시 무기를 지급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경찰들의 총기 사용 요건을 완화하고, 불신검문 등을 강화, 거부할 시 강제연행을 할 수 있게 만들겠다고 엄포를 늘어놓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권위"라는 것은 내가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나에게 부여해 주는 것이다. 정부는 과거 군사독재정권에서나 통용되던 엄포로 국민을 협박하여 공권력을 바로 세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국민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경찰,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교정을 만들어 갈 노력을 해야한다. 그런 때에 권위는 당연히 따라오고 공권력도 인정받게 되는 것임을 명심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