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은 아직 조용한 전쟁터다. 읍내 곳곳에는 현직 군수의 퇴진을 요구하는 '핵종규 퇴진' 깃발이 나부끼고 있지만, 그 옆을 지나가는 경찰조차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갯바람 묻어나는 늦더위처럼 부안은 지금 반목과 불신이라는 깊은 상처에 시름하고 있다.
지난 2월 14일 핵폐기장 유치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가 실시돼 90%가 넘는 주민이 반대의사를 밝혔지만, 아직 부안 핵폐기장 설립 계획이 백지화됐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부안은 보여줄 만큼 다 보여줬다. 남은 것은 정부가 '오기'를 버리는 것뿐이다." 김종성 핵폐기장 백지화 범부안군민대책위(이하 대책위) 집행위원장이 전한 부안 현지 분위기다.
9월 10일 위도 주민투표 둘러싸고 논란 가중
부안은 요즘 내달 10일 위도 주민 1800여명만을 대상으로 주민투표가 실시된다는 소식에 다시 한 번 들썩이고 있다. 그동안 핵폐기장 유치에 찬성 뜻을 표하며 지난 2월 주민투표를 거부했던 위도발전협의회(이하 위발협)는 핵폐기장 유치 예비신청 마감일인 9월 15일 직전 위도 주민만을 대상으로 한 투표를 강행하기로 했다.
13일 오후 정영복 위발협 회장은 전북도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핵폐기장 유치 여부를 묻는 위도 주민투표 실시를 주장했다. 위발협은 정부가 지난 2월 5일 발표한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부지 추가 공모(안)'에 대한 무효소송 등을 함께 제기하기도 했다.
13일 기자가 찾은 위도는 핵폐기장 문제보다는 몰려드는 피서객 맞이에 더 바쁜 일상적인 관광지 모습 그대로였다. 여객터미널 근처에서 만난 몇몇 위도 주민들에게 핵폐기장 유치와 관련해서 몇 마디 건네자 바로 시선을 돌리고 한결같이 "글씨…" "통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이런 모습이 답답했는지 옆에 있던 한 중년 여성은 "뭐 할라고 눈채 없이 고론 걸 묻고 댕긴당가"라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그가 넌지시 전해주는 위도 분위기는 한 마디로 '지역 공동체 붕괴'다. "혼사와 같은 큰 일이 있어도 찬반이 갈리면 찾아가기 힘들만큼" 감정의 골이 깊게 파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다음 달 실시될 수도 있는 투표에 대해서도 "어떻게든 이 문제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란다"며 입을 닫는다.
위도 주민들 사이에는 핵폐기장이 위도에 들어온다면 어떤 형식으로든 상응하는 보상이 이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심리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또 주민들이 아무리 반대를 한다고 해도 결국 핵폐기장이 위도에 들어설 것이라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다들 관에서 보내주는 견학을 다녀왔다는데, 돈이 솔찬이 들었을 거여…." 원자력 관련 시설의 안정성을 알리기 위해 정부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진행중인 시찰·견학 활동이 주민들에게는 '보상금'에 대한 놓칠 수 없는 끈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만큼 어장 황폐화로 인해 위도 주민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심각하다.
"위도 주민투표, 극한 갈등 불러올 것"
위도 주민투표 실시 소식을 접한 부안군민들은 '당혹스럽다'는 반응이다. 이미 부안 주민투표를 실시했는데 어떻게 또 위도 주민만 따로 투표를 실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김효중 대책위 교육부장은 "위도 주민투표를 실시할 경우 지금도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주민간 갈등이 치유하기 힘들 정도에 이를 수 있다"며 위도 주민투표 실시를 반대했다. 김종성 대책위 집행위원장은 "지난 2월 실시된 주민투표에서도 위도 주민만 대상으로 별도 투표를 하자고 제안했지만 위발협 정 회장이 바로 거절했다"며 "이제 와서 또다시 위도 주민투표를 거론하는 게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부안성모병원 근처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한 주민은 "위도의 경우 정보의 사각지대에 있기 때문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핵폐기장을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며 "지금 부안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핵폐기장 유치 찬성쪽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하룻밤 자고 나면 핵폐기장 반대 깃발이 하나둘씩 줄어드는 것을 느낀다"며 "찬성 쪽의 이런 물밑 작업에 비하면 반대하는 사람들은 상황이 끝난 것처럼 생각해 나서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막상 위도에서 투표가 실시된다면 과반수 이상이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는 자신감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김종규 현 군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상황이기 때문에 투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판단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차기 지방선거에 김 군수가 다시 출마할 것인지를 놓고도 하마평이 오가고 있다. 부안시장 과일상 근처 주민들은 "군민을 그렇게 짐승처럼 두들겨 팼던 사람이 무슨 얼굴로 다시 선거에 나오겠냐"며 "부안 사람들한테 군수가 없어진지 오래됐다"고 출마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기도 했다.
이와 달리 제과점을 운영하는 김씨는 "김 군수가 군민들의 거센 반발에도 여전히 핵폐기장 유치 추진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은 그만한 정치적 대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며 "김 군수가 부안 군수직을 끝으로 공직을 그만 둘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정부의 안일하고 무원칙한 대응과 현지 주민간 감정의 골이 깊어가는 상황에서 당장 내달 10일 위도 주민투표가 실시된다면 부안사태는 또 다시 걷잡을 수 없는 충돌의 양상으로 번질 위험을 그대로 안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