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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나귀가 멀어져가자 할머니가 말했다.
"장군은 그새 쉬지도 못하셨소. 내 따끈한 계피 꿀물을 올릴 테니 한잠 푹 주무시구려."
"어디 잠이 오겠습니까? 그들이 별안간 마음이 바뀌어 우리를 치고 올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할머니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에겐 군사가 없다고 했습니다."
"싸울 수 있는 젊은이들은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제후가 나섰다.
"젊은이들이 많다고 해도 우리 군사들이야 당해 내겠습니까? 그러니 장군께서는 걱정 놓으시고 의원님 말씀대로 좀 쉬도록 하십시오."
에인은 그 생각도 타당하다 싶었다. 사실 자신들은 여태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은 상관없다 해도 장수들과 나이든 참모들에겐 휴식과 수면이 필요했다. 그는 강 장수에게 지시를 내렸다.
"내일 수장이 올 때까지 모두 잠을 자기요. 이건 명령이오."
그리고 할머니에게 부탁을 했다.
"의원님, 우리 참모 모두들에게 계피 꿀물을 먹이십시오. 그래야 내일 아침까지 세상 모르고 잘 것이 아닙니까?"
할머니는 알았다고만 대답하고 서둘러 자기 천막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그 시간에 수장은 여러 명의 씨족장, 그리고 젊은이들까지 대동하고 찾아왔다. 그들은 천막으로 들어가자는 것도 거절하고 그 자리에 버티고 섰다. 그리고 한 젊은이가 대뜸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갈 것 없소. 이 자리에서 재협상을 하시오."
그렇게 먼저 나선 젊은이의 말투는 매우 건방진데다 인상까지 우락부락해서 참모들은 모두 긴장을 했다. 강 장수는 그 젊은이가 불시에 에인을 해칠지도 몰라 슬며시 칼을 잡기도 했다.
그러나 에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 젊은이가 아닌 수장을 주시하며 물었다.
"그래, 어떤 식의 재협상을 원하시오?"
그제서야 수장이 나서서 조리 있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모여 회의를 했소. 결론부터 알리자면 우리는 당신들이 요구한 것 중 어떤 것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소."
"그래요? 그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디 한번 말해보시오."
"당신들의 신이오."
"그건 왜입니까?"
"왜냐하면 우리 모두에겐 이미 각자의 신이 있기 때문이오."
"각자의 신이 있다… 그래, 어떤 신들이오?"
"강에 사시는 신, 산에 사시는 신, 비의 신, 나무의 신, 동굴의 신… 이곳엔 벌써 오래 전부터 많은 신들이 주민들과 함께 하고 있소."
"그래요? 그럼 수락할 수 있는 점은 어떤 것이오?"
"그쪽의 신을 받아들이라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당신들의 지배를 받아들이겠소. 어제 당신이 말했듯이 우리 주민의 안정과 평화가 보장된다면 말이오."
에인은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나도 조건이 있소."
"말해 보시오."
"주민들은 우리 천신에 대한 어떤 부정적인 견해나 악의적인 선전을 절대로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오."
"그건 지킬 수 있을 것이오."
"또 자발적으로 천신의 백성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나서면 어떤 이유로든 그들을 막아서도 안 된다는 것이오. 그것도 약속하실 수 있소?"
"여긴 어떤 신을 모시든 각자의 자유요. 그건 약속할 수 있소."
수장의 말에 젊은이들의 얼굴은 울그락불그락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들은 젊은 혈기를 가졌고 그래서 여태 싸우자고 주장해 오던 참이었다. 하지만 씨족장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자기 씨족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일단 전쟁을 치르다 보면 젊은이들은 다 죽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위험천만인 모험을 하느니 타협을 해서라도 안정을 택하는 것이 백번 현명한 일이었다.
수장 역시 씨족장들 견해에 전폭적인 지지를 했다. 그로서는 큰 궁정을 가지거나 주민들로부터 세금을 받는 그런 지위도 아닐 뿐더러 임기가 끝나면 물러나야 하는 늙은이였다. 다시 말해서 피를 흘리면서까지 도시나 주민들을 움켜쥐고 있어야 할 어떤 이권도, 필요도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면 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조인 서약서를 만듭시다."
에인이 그렇게 말하자 제후가 통역 대신 에인에게 먼저 말했다.
"여긴 아직 글이 없고 또 그런 것을 만든 전례도 없습니다."
"전례가 없다면 만들면 되지 않겠소."
에인은 왠지 이들과는 제대로 형식을 갖추고 싶어 조인 서약을 문서로 남기고 싶었는데 제후는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모르는 것을 들이대면 속임수가 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냥 말씀으로 하달을 하십시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글을 들이대면 주술 그림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었다. 에인이 수장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럼 지금 돌아가시는 대로 곧 수장의 집무실과 마을 회관 등 공공시설들을 비워주시오. 가옥은 필요 없소. 우리가 지을 것이오."
"언제까지 비워야 합니까?"
"오늘 저녁 해가 떨어지면 우리 군사들은 마을로 입성할 것이오. 그때 순조롭게 접수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시오."
"노력해 보겠소이다."
수장이 그런 대답을 할 때 젊은이들은 먼저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굴욕이 견딜 수 없었지만 그러나 조약은 이미 끝난 것이었다.
군사들은 야외에서 저녁을 지어 먹었다. 주민들에게 번거로운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마차와 군장비 일체를 깨끗이 정돈한 뒤 마을로 들어갔다. 약속대로 집무실은 비어 있었다. 그 앞에서 기다리던 수장이 비어 있는 다른 건물까지 안내하며 에인에게 인수인계를 했다.
그날 저녁 집무실에서 첫 참모회의를 가졌다. 거기서 에인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이곳 수장을 당분간 그 직책에 앉혀두시오. 그게 주민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줄 것이오."
"주인이 바뀌었는데도 수장을 그대로 둔다면 좋은 인상보다는 오히려 우습게 보거나 또는 혼란스러워할 것입니다."
제후가 반대를 했고 에인이 그 뒤를 이었다.
"대신 교화선인을 붙여 공동 통치를 하게 하는 것이오. 또한 선인은 천신의 신정정치와 그 이념을 주민들에게 교화할 방도를 찾고 모색해야 할 것이오."
여기서 에인은 선인들을 딸려 보낸 태왕의 선견지명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둑은 군사가 막고 백성 교화는 선인들이 담당해 온 것이 소호 국의 통치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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