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많은 분들이 '기자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질 것이다. '기자없이 못살아'라는 얘기가 나올 것이다. 기자는 공정보도와 진실보도로 봉사하는 사람이다. 그 책무를 다하겠다."
창립 40주년을 맞는 한국기자협회 이상기(한겨레 기자) 회장의 첫 인사말이다. 이 회장은 "기자협회 40년 역사는 저항과 굴종이 교차했다"며 "기자사회는 국민들로부터 신뢰와 불신을 동시에 받아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이어 "자축과 함께 자성을 요구받고 있다"는 단적인 표현으로 기자협회에 던져진 화두를 설명했다. 그리고 자문했다. 2004년 오늘 나는 대한민국 기자로 당당하게 역사와 국민 앞에 설 수 있는가. 이 회장은 "부끄러움이 자부심을 압도한다"고 고백했다.
"기자는 소속 회사 이익 대변하는 회사원 아니다"
그러나 "마냥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다"는 각오가 곧바로 되돌아왔다. 이 회장은 '기자정신과 국민으로부터의 신뢰회복'을 첫번째 과제로 꼽았다. 또 변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는 엄중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현실도 확인했다. 이 회장은 "기자는 오직 양심과 양식, 상식에 바탕을 두고 기사를 써야한다"며 "언론개혁의 목표는 진실보도와 공정보도의 확보에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 회장은 "기자들은 때론 시대에 맞서 싸우고, 때론 시대와 동행하면서 '시대정신'을 이끌어가야 하는 사명을 지고있다"며 기자들의 시대정신 부활도 주문했다. "오로지 당당한 기사로써 역사와 진실 앞에 말할 수 있게 해달라"며 국민과 정부, 언론경영인의 성원을 당부했다.
이 회장은 기자들의 정체성과 관련해 "소속 회사 이익을 대변하는 회사원이 아니다"고 분명히 했다. 인권이나 민주화, 휴머니즘 등 인류의 보편가치를 구현하는 것은 온전히 기자들 몫이라는 설명이다. 이를 위해 "신문과 방송이, 서울사와 지방사가 이분법적으로 나뉠 이유가 없다"며 "동시대의 언론인으로서 경쟁하면서 상생하는 정신이 필요하다"고 이 회장은 주문했다.
"우리는 과연 공정하고 진실한가" 위기속 자성 목소리 높아
지난 64년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던 악법 '언론윤리위원회법' 철폐 기치를 계기로 창립된 기자협회는 사람으로 치면 불혹을 맞았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나이 40이 된 것이다. 하지만 기자들은 아직도 안팎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에는 신뢰도 하락, 신문시장의 위기, 기자 이탈 등 총체적 위기에 직면해 있기도 하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이날 기념식은 '자축'보다는 '자성'의 현장에 가까웠다. '아프다, 묻는다, 나아간다'는 제호를 단 40주년 특보에는 기자들의 역할과 반성, 다짐을 담은 중견기자 기고 3편이 실려 눈길을 끌었다. 노무현 대통령조차 "회장 인사말씀 속에서 비장함이 그대로 서려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회장이 기자들에게 자성을 구했던 구체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한줄의 진실을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과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려고 고뇌하고 있는가
▲흥미 있는 기사찾기에 몰두하느라 의미 있는 기사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들의 삶의 질 향상이 소외된 이웃의 삶에 대한 무관심을 가져오진 않았는가
▲데스크 취향을 예단해 사전 자기검열에 빠져들고 있지는 않은가
▲소속사 이해관계에 매몰돼 팩트를 자의적으로 재단하지는 않은가
▲영향력 있고 선망대상인 기자직에 자족해 있진 않은가
관념적인 당위론이 아니다. 언론학 교과서에 나오는 이론도 아니다. 현직 기자들이 매일매일 취재현장과 기자작성에서 겪는 일상이자 경험이다. 참석 기자들 대부분 이같은 지적을 부정하지 않았다. "언론개혁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요청"이라는 진단에도 동의했다.
그동안 시대정신에 소홀했던 기자사회의 본격적인 반성이 시작돼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한 신문사의 중견기자는 "과거 언론민주화 운동의 구심이었던 기자협회가 90년대 후반 이후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면서 "이제 뭔가 변화를 하려는 것 같아 매우 기쁘다"고 기대했다.
기념 공로패 증정에서도 변화의 기류가 감지됐다. 기자협회는 이날 3개 중 두 개의 공로패를 민주언론운동에 기여한 단체와 인사에게 주었다.
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의 언론탄압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다 150여명이 강제해직됐던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와 86년 보도지침 폭로로 전두환 군사정권의 언론통제 실상을 알렸던 김주언(당시 한국일보 기자) 언론재단 연구이사가 그 주인공이다. 김주언 이사는 기자협회 32, 33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언론계 과거청산도 관심... 군사정권의 언론인 강제해직·언론탄압 등
기자협회 40년사를 담은 영상기록 역시 이같은 움직임을 반영했다. 식전행사로 상영된 '민주언론 40년'이라는 제목의 영상물은 60년대 정권에 맞서 언론악법 철폐를 위해 싸우는 선배기자들의 모습부터 저항의 시대(70년대), 암울한 침묵의 시대(80년대), 언론자유 투쟁 시대(90년대)를 생생하게 보여줬다.
특히 74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등 선배기자들 모습과 80년 강제해직 장면 등이 나올 때는 장내 분위기가 숙연해지기도 했다. 이날 기념식장에는 당시 투쟁의 주인공인 동아투위와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선배 기자들이 대거 참석, 자리를 빛냈다.
해직기자 선배들은 '언론자유 수호투쟁'의 정통성을 찾으려는 기자협회의 노력을 무척 고무된 표정으로 지켜봤다. 또 노 대통령이 과거사 청산 추진에 대해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자 누구보다 큰 박수를 보냈다. 과거 군사정권 아래서 비민주적 언론탄압과 강제해직, 인권유린을 당한 당사자로서 과거사 청산은 바로 그들의 몫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74년 강제해직 뒤 30년간 자유언론수호투쟁을 벌이고 있는 동아투위는 지난달 '동아일보 백지광고와 대량해직 등 유신치하 언론민주화운동 탄압에 대한 진상규명 및 배상에 관한 특별법(시안)'을 만들어 국회 입법청원을 준비하고 있다.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도 최근 70년대와 80년대 해직언론인을 대상으로 해당 언론사의 복직권고 작업에 들어간 상태이다.
그러나 해직언론인들의 과거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등은 현직 후배기자들의 도움이 매우 절실하다고 선배 기자들은 입을 모았다. 조양진 동아투위 총무는 "기자협회가 해직 선배들에 대한 실질적인 명예회복과 배상 등의 문제에 적극 나서줘야 30년 묵은 과거사를 청산할 수 있다"고 당부했다. 선배기자들은 이날 기자협회 기념식이 단순한 축하연으로 그치지 않고 기자정신 회복, 언론사주와 자기검열로부터의 독립 등을 선언한 것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동영상 '민주언론 40년'은 마지막으로 기자협회에게 물었다.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얻은 언론자유 가까이 와있다"는 자막과 함께 "우리는 과연 공정하고, 진실한가"라는 질문으로 끝을 맺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바로 기자협회 소속 회원 7000여명의 몫이자, 우리 한국언론의 역할인 듯하다. 과연 기자들은 국민들로부터 우려 대신 기대를, 질책 대신 신뢰를 다시 얻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 | "기자들은 지금 입 다물고 있다" | | | 현직 중견기자 3인의 기자사회 성찰기 | | | | "정확한 사실확인 과정없이 먼저 인용보도하고 보자는 성급한 취재 편집관행은 한국 저널리즘의 질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자승자박 행태가 되고 있다.… 비판이 지면과 전파를 타고 뉴스공간에서 넘쳐난다. 이름을 내건 논객치고 현존 권력을 비판하지 않으면 '팔불출의 펜'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누가 '사과나무'를 심는가>
"그 많은 이땅의 기자들은 대부분 숨을 죽이고 있다. 경륜을 자랑하는 선배그룹부터 패기만만한 후배그룹까지 모두 입을 다물고 있다. 그간 언론개혁을 외치는 일부 중소언론사 기자들의 목소리는 의미는 있었지만 다른 한쪽의 외면으로 미명에 그쳤다." <기자들은 지금 입 다물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기자들, 특히 신문기자들은 일종의 아노미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당장은 살기가 힘들다.… 현재와 미래, 육체와 정신적인 혼란을 나타내는 이 세 가지 문제-근무조건 악화, 정체성 혼란, 비전부재-로 인해 신문기자들은 존재의 위기까지 느끼고 있다." <나는 끝까지 기자로 살겠다>
현직 중견기자들이 익명으로 털어놓은 기자들의 자화상이다. 사실확인과 검증·분석이 사라진 저널리즘, 불공정행위와 독과점·상업성이 집적된 언론시장에 대한 기자들의 침묵, 비전없이 표표히 떠나는 기자들. 한결같이 척박하기 이를 데 없다. 3인1색이다.
기자협회가 17일 창립 40주년을 맞아 2004년 대한민국 기자들의 삶을 돌아보는 특보를 펴냈다. 제호는 '아프다, 묻는다, 나아간다'. 말 그대로 기자들 심정이다. 그들이 당면한 현실에서 느끼는 위기의식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최근 신문보도 행태를 비판한 한 기자는 '마음속의 칼'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그는 권력을 겨냥한 일부 언론의 비판보도에 대해 "'사랑의 매'보다 '증오의 칼'을 숨긴 글"이라며 "맹목적인 북때리기에는 울림이 없다"고 단언했다. 또 "모든 제도적 질환과 다층적 갈등관계의 원인을 권력의 리더십 탓으로만 돌리는 논법은 이제 싱싱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언론시장의 문제를 짚은 또다른 기자는 "기자사회는 없고 회사원들의 집합체만 존재하고 있는 딱한 현실"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사주체제 언론사 기자들에 대해 "한국언론의 산적한 문제에 대해 눈을 감았고 언론개혁 물타기를 위해 반대논리 개발에 앞장섰다"고 비판했다. '우리만 잘되면 그만이다'는 자사이기주의도 한국언론을 병들게 한 주요원인으로 꼽혔다.
지금 척박한 삶일지라도 기자로서 끝까지 살겠다고 다짐한 또다른 기자는 악화일로에 있는 근로조건 문제를 들춰냈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일해야 한다, 툭하면 불려나가고 휴일반납과 야근을 밥먹듯 해야 한다, '3D업종'이 된지도 가족으로부터 '버려진 지'도 이미 오래다, 사람사는 꼴이 아니다"고 개탄했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정체성 혼란도 겪고있다고 털어놨다. 처음에 마음 먹었던 기자로서의 포부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몸담고 있는 회사의 논리에 억지로 꿰맞춰져서 또다른 부속품으로 기능하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감이 그를 더욱 힘들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