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애국가 가사의 첫 절이 '성자 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 수려 동반도는 우리 조국일세'라고 되어 있었는데, 도산(島山)이 하루는 서울서 내려 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않으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하자 윤치호가 도산의 생각을 물었고, 도산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을 보여주자 윤치호가 기뻐하면서 찬성하자 도산이 이를 당시 교장인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자고 제안하여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는 것.
또 주요한은 <안도산전서>에서, 원래 끝구절은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였으나 1919년도부터 상해에서 이를 지금과 같이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는 분명 안창호가 고친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이광수가 저술한 <도산 안창호전>의 내용과도 확연히 일치하는데 이광수는 상해임시정부 정청(政廳)이 매일 애국가를 불렀으며, 역시 마지막 구절의 '임군을 섬기며'를 '충성을 다하여'로 도산이 수정하였고 이 노래가 널리 불려 국가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이광수는 이 책에서 도산은 애국가의 작사자냐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그렇다고 부인도 하지 않았지만 현재 애국가가 안창호의 작이 분명하다고 저술하고 있다.
윤치호는 1911년 105인 사건이 일어나자 친일전향을 조건으로 1915년 2월 13일에 출감했다. 그 후 윤치호는 1915년 3월 14일자 매일신보에 자신이 일선동화(日鮮同化)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는 글을 쓰는가 하면, 3·1운동이 일어난 지 며칠 후 <경성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평화를 위해 일제에 순종하라는 매국적 발언을 일삼기 시작했다.
1943년 일제의 총동원령이 나자 11월 18일자 <매일신보>를 통해 조선 학도병을 독려하는 적극적 친일행위에 열을 올린 윤치호는 1945년 2월 일본 귀족원 의원에 선출되어 일본 귀족이 되기에 이른다.
그런 그가 해방이 되자마자 자신이 애국가를 지었노라는 애국가 가사를 옮겨 쓴 '가사지'를 남긴다. 왜 그는 해방 후 자신이 애국가 작사자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했을까?
물론 독립협회 회장이나 독립신문 주필 등을 한때 지낸 경력으로 보아 그가 지금의 애국가와 비슷한 노래를 지었을 능력은 있었다고 보지만, 그렇게 쉽게 변절하여 친일의 거수가 된 그가 절절한 기개와 애국심을 표현한 지금의 애국가 가사를 지었을 것이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선진 일본을 동경하며 일본 사람들보다 더 앞장서서 일제에 충성했던 그가 일제가 패망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테니 해방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천지개벽 후 위기감을 느껴 자신의 친일이 불가피했음을 알리고 독립협회 회장을 지낸 경력을 앞세워 면죄부를 얻기 위해 당시 널리 불리던 애국가를 자신이 지었다고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곳저곳 애국가를 자신이 만들었다고 써놓은들 더러운 친일의 손에 거룩한 애국가가 만들어졌다고 역사가 쉽게 고개를 끄덕여주지는 않을 것이다. 남의 집에다 자기 문패를 달면 그것이 자기 집이 되는가?
애국가는 단순히 나라를 상징하는 차원을 넘어 해방을 위해 초야와 같이 목숨을 버렸던 선조들의 얼과 정신이 서린 것이기에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우리의 자랑찬 역사를 설명해 주기도 하는 역사적 상징물이다.
역사를 거꾸로 올라가보지 않는 이상 과연 누가 애국가를 완벽하게 만들어내었는지는 더 연구해야 한다.
물론 윤치호가 아무리 친일파라 하여도 정말로 지금의 애국가를 지었다면 그런 역사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주필, 만민공동회의 최고지도자까지 지내고도 일제의 개가 되어 나라를 배신한 그가 애국가의 작사자라면 그것은 우리가 일제와 친일파의 망령에 놀아난 꼴이 되는 것이며 수많은 독립선열들의 피를 헛되이 하는 슬픈 우리의 친일 청산 실패 자화상인 것이다.
악질적 변절 친일파 윤치호가 지금의 애국가의 작사자라면 난 그 더럽고 기만적인 그의 거짓 애국가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매국자(賣國者)의 기만적 노래를 애국가(愛國歌)라며 가사말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알고도 계속 부를 것인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