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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가라 강물을 바라보는 러시아 아가씨들. 그들은 강물을 보며 앙가라 아가씨를 생각하고 있을까?
앙가라 강물을 바라보는 러시아 아가씨들. 그들은 강물을 보며 앙가라 아가씨를 생각하고 있을까? ⓒ 최성수
앙가라강변으로 산책을 나선다. 시간은 이미 오후 8시, 그러나 아직 사방은 대낮처럼 환하다. 해도 중천에 걸려 있다. 가로수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늘어선 앙가라강변 산책길에는 러시아 청춘남녀들이 환하게 웃으며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우리 시간으로 치면 오후 6시 무렵 같은 8시, 이르쿠츠크는 이제 겨우 저녁 무렵으로 들어서고 있다. 뉘엿뉘엿한 햇살 속에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가는 연인들, 강가의 방죽에 앉아 서로 손을 꼬옥 잡고 눈을 마주보고 있는 사람들, 그것도 모자란 지, 남이 보거나말거나 한 몸처럼 부둥켜안은 짝도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입을 맞추며 떨어질 줄 모르는 커플도 있다.

그런 청춘들로 앙가라강의 저녁 무렵은 푸근하게 깊어간다. 그리고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앙가라강은 사랑으로 넘쳐난다.

나는 산책로 곳곳에 피어있는 야생화들을 바라보다가, 청춘 남녀의 다정한 모습을 구경하다 하느라 정신이 없다. 자작나무들이 제 흰 몸을 지는 햇살에 더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는 곳, 이르쿠츠크를 감싸 흐르는 앙가라강의 넉넉하고 고즈넉한 풍경은 여행자를 한없이 가라앉게 한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처음 닦았다는 알렉산드르 3세 동상. 앙가라강변 산책로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바라보며 서 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처음 닦았다는 알렉산드르 3세 동상. 앙가라강변 산책로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바라보며 서 있다. ⓒ 최성수
그 가라앉는 마음으로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닦았던 황제라는 이유로 우뚝 서 있는 알렉산드르 3세의 동상조차 덧없어 보인다. 무슨 무슨 유물이나 기념비보다는, 말 한 마디 통하지 않는 아득히 먼 나라에서, 사람들의 사랑하는 모습들을 보는 것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것은 아마도 여행자라는 나의 신분 때문에 그럴 것이다. 여행자는 사물 속에 들어가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객관적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처음 발 디딘 러시아, 이르쿠츠크의 첫 인상은 어수선함이었다. 나는 울란바토르에서 이르쿠츠크 공항까지의 기억을 되살린다.

이르쿠츠크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울란바토르 공항에 들어서면서, 나는 내심 국제선이니 기내식도 있을테고, 서비스도 웬만하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내가 탄 비행기는 겨우 40인승, 그나마 승객은 우리 일행을 포함해 열 아홉이 전부였다. 쌍발 프로펠러기는 바깥 소음이 그대로 밀려드는 장난감 같은 비행기였다. 안내 방송도 없고, 스튜어디스가 비상시의 행동 요령조차 알려주지도 않는 비행기에 타자마자 우리 일행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먼저 안전벨트부터 맨다.

울란바토르 공항을 이륙하며 내려다본 몽골 평원
울란바토르 공항을 이륙하며 내려다본 몽골 평원 ⓒ 최성수
이런 비행기가 뜨기는 뜰까 생각하는 사이, 나의 의구심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비행기는 사뿐히 날아오른다. 작은 비행기라서 그런지 구름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몽골의 풍경은 나무 한 그루 없는 산들뿐이다. 아니 그것은 산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땅의 주름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한동안 구름 속으로 비행을 하던 쌍발기 아래로 거대한 숲이 보이기 시작한다. 러시아로 들어선 모양이다. 자작나무들이 더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이 들어선 산림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뚫리는 것 같다. 그 군데군데, 마구 쓰러진 숲도 보인다. 지난 번 태풍으로 자작나무들이 쓰러진 것이라고 한다. 쓰러져 버린 숲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데, 비행기는 어느새 시퍼런 물살을 지난다.

바이칼이다! 인류가 30년을 먹을 수 있을 만큼의 담수량을 지닌다는 바이칼은 그대로 푸른 바다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드디어 바이칼에 온 것이다. 여행 준비하는 내내 나는 바이칼의 꿈에 젖어 살았다.

인간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양수라는 물에 잠겨 살았듯이, 물은 인간의 원시적 생명줄이며 근원이다. 그 물의 근원을 바이칼이라고 하니, 나는 이제 내 몸의 원형, 뿌리를 찾아 온 셈이다.

비행기가 선회를 하며 이르쿠츠크 공항에 내린다. 공항은 빗줄기에 젖어 있다. 흩어지는 물줄기가 먼 땅에 내리는 나의 기대와 두려움 같다.

작은 시골 대합실 같은 공항에 내리자 제일 먼저 마주친 것은 흰 가운을 입은 할머니다. 우리 일행에게 알아듣지 못할 러시아어로 무어라고 떠들어대는데, 짐작하기에 입국 신고서를 쓰라는 것 같다. 그런데 한 장만 쓰라고 종이를 흔든다.

우리가 발급받은 러시아 비자에는 입국 신고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여기 있는데 왜 또 써야 하느냐고 우리도 할머니가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말로 떠들어대자, 할머니는 종이 한 장을 가져와 대표로 쓰게 한다.

그것으로 입국 신고서는 끝난 줄 알았더니 웬걸, 할머니는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이번에는 다른 여성 관리가 나타나 입국신고서를 다시 나누어준다. 모두 다 써야 한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모두들 입국 신고서를 쓰고, 오랜 시간이 걸린 후에야 겨우 러시아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더 우스운 것은 일곱 시, 퇴근시간이 되자 입국자들은 알 것 없다는 듯이 수화물을 검사하는 관리들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 일행 중 나중에 나온 사람은 그냥 입국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어수선하고 정신없는 입국 수속이 러시아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면, 숙소에 짐을 풀고 나선 앙가라강 산책은 안 좋던 첫 인상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다.

사행천과 길의 절묘한 조화. 울란바토르를 벗어나기 직전의 모습
사행천과 길의 절묘한 조화. 울란바토르를 벗어나기 직전의 모습 ⓒ 최성수
자작나무가 늘어서고 곱게 꾸며놓은 산책로에는 온갖 꽃들이 피어있고, 바이칼에서 흘러나오는 앙가라강물은 뒤척임도 없이 흐른다. 앙가라, 그 이름만으로도 내 가슴을 설레게 했던 강물. 나는 곰곰 앙가라강의 전설을 되살려본다.

노을 지는 앙가라강변의 모습
노을 지는 앙가라강변의 모습 ⓒ 최성수
아주 오랜 옛날, 그러니까 우리식 어법으로 말하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었다. 이 땅에는 바이칼이라는 늙은 영웅이 살고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바람을 부르고 구름을 일으키며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영웅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이가 들어 예전의 명성과 이름만 추억처럼 남은 늙은 영웅이었다.

이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지워져 가고 있는 바이칼에게는 여전히 하나의 자랑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그의 아름다운 딸이었다. 호수 빛 눈에 황금 색깔의 머릿결을 지닌 바이칼의 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바이칼은 딸의 아리따운 모습을 보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깊어갔다. 그 딸의 이름은 앙가라였다.

바이칼은 딸의 아름다움을 본 다른 사람들이 딸에게 혹시 해를 가할까 밤낮 걱정을 했다. 걱정 끝에 바이칼은 딸 앙가라를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볼 수 없도록 호수 깊이 숨겨놓았다.

갑자기 아버지에게 끌려 바이칼 호수 속에 갇히게 된 앙가라는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앙가라의 눈물은 호수의 물을 더욱 깊게 만들었고, 바이칼 호수는 앙가라의 눈물로 점점 푸른빛을 더해갔다. 앙가라의 슬픔이 호수에 짙게 배었기 때문에 호수는 더 푸르러 진 것이었다.

자작나무가 우거진 앙가라강변의 산책로
자작나무가 우거진 앙가라강변의 산책로 ⓒ 최성수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앙가라는 물 표면으로 나와 한숨을 지으며 바이칼빛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갈매기 한 마리가 큰 소리로 울며 날아왔다.

“갈매기야, 너는 어디서 날아왔니? 나도 너처럼 세상으로 날아가고 싶구나.”

앙가라가 한숨을 쉬며 갈매기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갈매기가 끼룩끼룩 소리를 내더니 앙가라에게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앙가라 아가씨. 물 속에서 사시기에 너무 힘드시지요. 아가씨를 위해 제가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 드릴게요.”

“그래, 고마워. 어서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렴.”

앙가라의 재촉에 갈매기는 날개를 퍼덕이며 어깨에 앉아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갈매기는 날마다 날아와 앙가라의 어깨에 앉아서 자신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본 온갖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하루는 갈매기가 앙가라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가씨가 살고 있는 호수를 따라 며칠을 날아가면 큰 강이 있는 마을이 나오지요. 그 강 가에는 수많은 꽃들이 피어 여름을 아름답게 빛나게 한답니다. 밤이면 달빛 아래 그 꽃들은 초롱불처럼 빛나지요. 낮에는 온갖 색깔로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꽃들이 밤이면 호롱불로 일제히 피어나는 것이랍니다.

그 강가에 멋진 수염에 건장한 용사 한 명이 살고 있답니다. 예니세이라는 그 용사는 지금껏 수많은 싸움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지요. 구척 장신에 깎아놓은 듯한 얼굴, 중후한 인품에 그윽한 목소리, 세상의 모든 아가씨들은 예니세이를 흠모한답니다.”

갈매기의 말을 들은 앙가라는 예니세이에 대한 그리움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 그것은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예니세이에 대한 그리움이면서 동시에 갇혀 살아야 하는 운명에 맞닥뜨린 존재의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했다.

‘아, 한번이라도 세상으로 나가 예니세이를 만나 볼 수 있다면….’

앙가라는 그런 소망으로 밤이면 가슴을 태우곤 했다. 그 그리움이 쌓이고 쌓인 어느 날, 앙가라는 바이칼이 잠든 틈을 타 호수를 빠져나갔다. 예니세이와 세상에 대한 그리움으로 앙가라의 발걸음은 나는 듯이 빨랐다.

한밤 중, 잠결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퍼뜩 일어난 바이칼은 앙가라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바이칼은 바람처럼 날아 앙가라의 뒤를 쫓았다. 멀리서 앙가라가 마구 강을 거슬러 달음질치는 것이 달빛 아래 아득하게 보였다.

더 화가 난 바이칼은 자기 곁에 있던 커다란 바위를 번쩍 들어 앙가라의 앞길을 향해 집어던졌다. 바위는 거대한 굉음을 내며 날아가 앙가라를 덮쳐 버렸다. 세상을 향해 달려가던 앙가라의 발길은 아버지 바이칼이 내 던진 바위 아래 무참하게 깔려 멈추고, 앙가라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지금도 앙가라강의 입구에는 그때 바이칼이 던진 샤먼 바위가 그대로 남아 슬픈 부녀간의 이야기를 전해 준다.

앙가라강가를 산책하는 사람들
앙가라강가를 산책하는 사람들 ⓒ 최성수
바이칼은 모두 336개의 강물이 모여들어 이루어진 호수다. 그리고 그 바이칼 물은 유일하게 하나의 강으로 흘러 나간다. 흘러나가는 유일한 강이 바로 앙가라강이다. 앙가라강은 흐르고 흘러 예니세이강과 만난다. 앙가라 처녀의 슬픈 사연처럼, 이르쿠츠크를 휘돌아 흐르는 앙가라강은 몸 뒤척임도 없이 아득한 세월부터 유유하게 흐르고 있다.

태초부터 강과 호수는 강과 호수로 남아 있었지만, 인간은 그 강과 호수에 이야기를 덧붙이고 자신의 느낌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 때문에 눈물짓는 여행자도 있다.

9시 40분경, 해가 서산으로 넘어간다. 나는 의자를 옮겨 놓으며 해지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던 어린왕자처럼, 오래도록 강가에 앉아 노을이 지는 모습을 바라본다. 열 한 시가 다 되어서야 비로소 캄캄해지는 곳, 강변에는 해가 지자 예니세이를 향한 앙가라의 그리움처럼 제법 찬 바람이 불어온다.

앙가라강의 노을 속에 그림처럼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앙가라강의 노을 속에 그림처럼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 최성수
먼 길을 떠나와 마음조차 멀어진 것 같은 시간, 어두워진 앙가라 강 저편에서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오래도록 들린다. 모스크바에서 달려오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리라. 수십 량의 화물을 매달고 약 7일 가량 달려온 저 기차에는 어떤 사람의 마음이 실려 있을까?

나는 이미 캄캄해진 앙가라강가를 걸어 숙소로 들어와 깊은 잠에 빠져든다. 꿈속에 안개 자욱한 앙가라강에서 앙가라 처녀를 만난다. 그것은 몽환과 같은 꿈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꿈은 잊어버린 첫사랑처럼 기억도 없이 사라지고, 꿈속에 흐릿했던 안개들이 숙소 창 밖으로 짙게 퍼져 있다. 그 안개 속 앙가라강이 흐르리라. 제 몸 보여주기 싫은 듯 안개 속에 숨은 앙가라강은 소리도 없이 뒤척이고 있었다.

앙가라강을 거니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앙가라와 예니세이의 사랑이 담겨 있을까?
앙가라강을 거니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앙가라와 예니세이의 사랑이 담겨 있을까?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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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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