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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수원
“학교에 다녀왔습니다.”
“그래, 오늘 학교에서 무얼 배웠냐?”
“…….”

언제부터인가 기범이는 시커먼 얼굴로 창고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와 마주치기 싫어 집으로 가는 지름길인 창고 앞을 피해 골목길을 돌아서 집으로 가는 습관이 생겼다. 이상하게도 기범이는 어머니보다 평소에 말이 없는 아버지를 더 어려워했고 무서워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늘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 편을 드신다.

“엄마, 제발 아버지에게 말 좀 해.”
“무슨 말을…. 아버지에게 무슨 말 들었니?”
“그게 아니고. 제발 창고 앞에서 담배 좀 피우지 말라고 해. 창피해 죽겠어. 아버지는 세수도 안 하는 가 봐. 그리고 이빨은 어떻고 …. 친구들이 자꾸 놀린다 말이야. 숯검댕 아저씨라고.”
“이놈아 연탄 장사하는 사람이 다 그렇지. 네가 아버지를 이해하면 안 되니?”
“그래도 그렇지. 세수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모습이 거지 같단 말이야.”
“이놈 얘기하는 것 좀 봐.”

매년 겨울이 다가오면 기범이에게는 한 가지 작은 소망이 있었다. 올 겨울에는 집에 꼭 연탄 보일러가 놓여져 겨울을 따뜻하게 나는 것이다. 기범이네 가족은 30년 동안 연탄 장사를 해 오고 있는 아버지의 수입으로 여섯 식구가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그나마 겨울철에는 연탄을 주문하는 집들이 많아 다행이지만 특히 여름철은 배달이 없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더 많다. 그래서 아버지는 여름철이 되면 다른 일자리를 알아 보아야만 한다.

기범이네 집은 아버지가 연탄 장사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연탄을 피우지 않는다. 그건 연탄 아궁이가 없는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버지의 완고한 고집 때문이기도 하였다.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그것에 대해 늘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겨울철이 다가오면 그 불만은 더 커져만 간다. 매년 겨울, 아버지는 아주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가족의 불만을 잠재우곤 하셨다. 그러기를 벌써 12년이 지나갔다. 항상 다음 해를 기약하는 아버지의 약속이 지금까지 지켜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연탄집에는 연탄 보일러가 없다?

그래서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난 뒤 기범이를 비롯하여 형과 누나, 동생은 더 추워지기 전에 이번 겨울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연탄 보일러를 꼭 설치해 줄 것을 아버지에게 이야기하기로 하였다. 문제는 ‘누가 그 이야기를 먼저 하느냐?’였다. 처음에는 모두 서로 눈치를 살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누가 먼저 이야기를 할 건데?”

중학교 3학년인 형이 갑자기 기범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형, 나는 싫어. 아버지가 무서워.”
“그래 맞다. 누나가 이야기를 하면 되겠다.”

형의 말에 기범이도 거들었다.

“아버지가 누나 제일 좋아하잖아. 그리고 저번에 누나 보고 결혼하지 말고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살자고 했잖아.”
“자슥, 순진하긴. 그건 마음이 아파서 그런 거야. 결혼을 앞둔 자식에게 부모들은 다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누나, 정말 그런 거야?”

기범이 누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작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내년 봄에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옆에서 형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기범이를 바라보며 누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했다.

“누나가 결혼하기 전에 너희를 위해 아버지에게 한번 얘기를 해 볼게. 그런데 너무 큰 기대는 하지마. 알았지?”
"정말이지? 응?"
"누나 고마워. 이번 겨울에는 누나 때문에 따뜻하게 보내게 되겠네.”

형과 기범이는 마치 아버지의 승낙을 받아낸 듯 좋아하면서 누나의 손을 꼭 잡았다. 사실 아버지는 누나 부탁이면 들어주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난 뒤, 모두 누나를 따라 안방으로 건너갔다. 갑자기 들이닥친 아이들을 보고 아버지는 놀라신 듯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셨다.

“너희들 안자고 웬일이여? 무슨 할 얘기라도….”

먼저, 누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하였다.

“아버지, 이제 날씨가 추워질 텐데 우리도 연탄 보일러로 바꾸면 안 될까요? 저도 얼마 정도 낼게요.”

아이들 모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숨을 죽이며 사슴처럼 목을 쭉 내밀고 아버지의 답을 기다렸다. 이럴 때는 정말이지 아버지의 존재가 대단하다는 것을 기범이는 느낄 수가 있었다. 또한, 아버지의 작은 체구가 마치 거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버지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기범이의 입술은 바짝 바짝 타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긴장한 탓인지 옆에 있던 형은 침까지 삼켰다.

“연탄 보일러라고 했재.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하지도 말 거래이.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 나라에서 연탄 한 장이라도 아껴 쓰야재. 하므 그렇고 말고. 학교에서 선상님이 그런 것도 안 가르쳐 주더냐.”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를 했다. 지금까지는 늘 어떤 일이 있으면 아버지 편만 드시던 어머니가 오늘은 웬일로 아이들 편을 드는 것이었다.

“에구, 저놈의 황소 같은 고집 누가 막어. 우리 집에 애국자 한 분 났네. 얘들아, 얼른 방으로 돌아가 각자 할 일이나 해라.”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어 있던 아이들의 희망이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마치 공기 빠진 리어카 타이어처럼 주저앉는 순간이었다. 이번 겨울에도 땔감을 구하기 위해 매일 뒷산으로 올라가 솔가지, 죽은 나뭇가지, 장작 등을 창고 안에 가득 채워 놓을 생각을 하니 기범이는 괜히 화가 났다. 무엇보다 올해도 추위에 떨며 잠 잘 생각을 하니 벌써 몸이 오싹하고 소름이 느껴졌다. 작년 겨울에도 누나와 형, 동생에게 잠자리를 빼앗겨 고생을 많이 했던 기범이었다. 장작으로 불을 지피면 그 온기가 자정을 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방바닥이 빨리 식었다.

그래서 저녁을 먹고 난 뒤 아이들은 따뜻한 아랫목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항상 가위 바위 보를 했다. 이긴 사람이 먼저 제일 따뜻한 구들장을 차지하고 그 다음으로 이 긴 사람이 방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차례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 잠자리 싸움은 나이가 많고 적은 것과는 관계가 없었다. 기범이는 지금까지 이 내기에서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그래서 기범이의 잠자리는 항상 방문 바로 옆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기범이는 항상 겨울에 감기가 끊이지 않았다.

자정을 넘어서면 아궁이에 그나마 남아 있던 불씨마저 모두 꺼지게 된다. 새벽으로 갈수록 방바닥의 온기는 사라지고 방안에는 냉기가 감돈다. 방바닥이 식기 전까지는 처음에 정해 놓은 잠자리 배치가 잘 지켜지나 아침이 될수록 그 규칙은 깨어져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이불을 조금이라도 더 덮고 잔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새우잠으로 각기 다른 자리에서 아침을 맞이해야만 한다.

안방보다 조금 더 큰 기범이네 집 창고 안에는 늘 연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면 기범이 아버지가 제일 먼저 달려가는 곳은 연탄 창고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창고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지긋이 미소를 짓곤 하신다. 가끔은 자식보다 연탄을 더 애지중지하게 여긴다는 생각에 기범이는 아버지가 못마땅한 적도 있었다.

자식보다 연탄을 더 사랑한 아버지

간밤에 비라도 오려고 하면 아버지는 쓰다 버린 이불로 연탄을 덮어 주는 등 온갖 궁상을 떠신다. 그리고 비가 그칠 때까지 방으로 들어 오시지도 않고 아예 그날 밤은 창고에서 주무시기까지 한다. 비가 그치면 덮어 둔 이불 하나 하나를 걷어내면서 젖은 연탄을 닦아 줄 정도로 시커먼 연탄에 대한 애착을 보이곤 하신다. 어떤 때는 그런 아버지가 미워 어머니에게 불만을 늘어 놓기도 하였다.

“엄마, 아버지는 우리보다 연탄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애.”
“너희 아버지 천성이 그런 걸 어떡하니?”
“그래도 그렇지. 너무 심해.”
“아무려면 너희들 보다 더 사랑하려고.”
“그건 그렇지만….”

한번은 아버지가 이틀 동안 배달을 하지 않은 날이 있었다. 특히 연탄 주문량이 많은 겨울철에 아버지가 이틀씩이나 배달을 하지 않고 집에 계신 적은 거의 없었다. 기범이가 학교에 돌아와 방문을 여니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 내복만 입은 채로 술을 드시고 있는 아버지의 자그마한 체구가 눈에 들어왔다. 기범이가 인사를 해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줄담배만 피우셨다. 아버지의 그와 같은 행동에 어머니의 애간장은 타들어 갔다.

“엄마, 방에 들어갈 수가 없어. 담배 연기 때문에. 아버지하고 싸웠어? 오늘은 나보고 학교에서 무얼 배웠는지 물어보지도 않던 걸. 엄마가 방에 들어가 봐.”
“배달이 밀려서 큰일이란다. 언제까지 저러실 건지 모르겠구나. ‘그게’ 네 아버지 탓도 아닌데 말이다.”

기범이는 어머니의 ‘그게’라는 말에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라는 생각에 얼른 물어보았다.

“그게 뭔데요?”
“글쎄, 오늘 아침 윗집 김씨 큰아들이 연탄가스로 죽었다잖니. 하필이면 아버지가 연탄을 갖다 준 그 날에 죽을 게 뭐람. 재수가 없으려니, 나 원 참.”

기범이 아버지는 그 죽음이 당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며 마음 아파하셨다. 그리고 다음날 봉투에 돈 몇 천원을 넣어 그 집에 갖다 주셨다. 기범이는 아버지의 그런 행동에 화가 났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 집에 왜 돈을 갖다 주는지 모르겠어. 우리에게는 만날 돈이 없다고 하면서…. 우리 집이 뭐 부잔가?”

겨울철 연탄 배달을 하는 데 있어 제일 힘든 날은 간밤에 눈이 온 날이었다. 가족 모두는 아침도 걸러가며 집집이 대문 앞에 내다 버린 다 탄 연탄재를 수거하여 비탈길에 쌓인 눈을 치워가며 그 위에 연탄재를 뿌리는 등 야단법석을 떨어야 한다. 그리고 언덕 위에 있는 집까지 연탄을 배달하기 위하여 리어카 한 대에 온 식구가 매달린다. 앞에서 리어카를 끄는 아버지는 마음대로 리어카가 나가지 않는지 뒤에서 열심히 리어카를 미는 아이들에게 계속해서 주문을 하신다.

“더 세게 밀어야재. 아니야. 그쪽이 아니야. 오른쪽으로, 아니 왼쪽으로…”

어머니가 "조금 쉬어가면서 하세요"라고 하면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면서 오히려 어머니를 나무라신다.

"우리가 배달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밤사이에 추위에 떨어 감기라도 걸리면 어쩔 거여. 당신이 책임질 거여?"

무엇보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땀과 검은 연탄재로 뒤범벅이 된 옷을 세탁하는 일은 어머니의 몫이다. 어머니는 잘 지워지지도 않는 옷을 세탁비누를 칠해 가며 맨손으로 여러 번 비비며 차가운 물에 헹구어 보지만 그 검정 얼룩은 쉽사리 빠지지가 않는다.

“구정물이 왜 이리 많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어머니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 누나가 옆에서 지켜보다가 안쓰러워 한마디한다.

“더운 물 갖다 드려요?”
“아니다. 다했다. 나중에 너희 씻을 물도 없을 텐데. 연탄배달 하느냐고 피곤하지? 방에 가서 쉬렴.”

기범이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연탄 장사를 하는 이런 아버지가 싫었고 기범이를 아는 사람들 특히 친구들에게 아버지의 직업을 떳떳하게 얘기한다는 것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친구들과 동네에서 연탄 배달을 하는 아버지와 우연히 마주칠 때면 숨거나 내달음질 친 적도 있었다. 체구가 작고 늘 얼굴이 새까만 아버지를 친구들이 알아채는 것이 창피하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학교 1학년인 막내 동생이 책가방에서 가정 환경 조사서를 꺼내들고 기범이에게 물었다.

"형, 여기 아버지의 직업을 뭐라고 써야할지 모르겠어.“
“바보야, 그것도 몰라? 사장님이라고 써야지.”
"연탄 장사도 사장님이야?"
"안 그러면 친구들이 너를 우습게 봐."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가 쓴 용지를 보여 주었다. 동생은 기범이가 한 말을 이해 못한 듯 계속해서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옆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신문만 뒤척이고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보이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입학을 앞둔 어느 해 겨울이었다. 그 해는 눈도 많이 내렸고 날씨가 유난히 추웠다. 아버지는 불쑥 공부를 하고 있는 기범이에게 목욕을 하러 가자고 하였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기범이에게 목욕을 같이 가자고 청한 적은 거의 없었다.

"기범아, 너 오늘 할 일이 없재?"
"왜 그러세요?"
"그리고 너 목욕한 지 오래 됐재?"
"아니요."
“아무튼 목욕이나 하러 가자구나.”
“동생이나 형하고 같이 가면 안돼요?”
“왜? 가기가 싫으냐?”
“그게 아니고요.”
“그럼 얼른 준비하거라. 오늘은 꼭 너랑 같이 가고 싶구나.”

기범이와 꼭 같이 가고 싶다는 아버지의 말에 기범이는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겁이 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어투가 너무나 완강하여 기범이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잠깐만~요.”

기범이는 가기 싫어 계속해서 꾸물거렸다. 아버지는 기범이의 그런 모습에 멋쩍은 미소를 지으면서 재촉하듯 계속해서 눈을 끔벅거리셨다. 기범이는 장롱에서 갈아 입을 옷 몇 가지를 챙겨 똥 마른 강아지마냥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갔다. 기범이와 아버지는 목욕탕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기범이는 아버지의 알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항상 얼굴이 새까만 아버지이기에 온몸도 그러리라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몸은 기범이의 속살보다 더 하얗게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누나가 얼굴이 하얀 이유가 엄마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를 닮아 그렇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깡마른 아버지의 몸은 잎이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볼품이 없었고 말라 보였다. 특히 아버지의 무릎은 온통 멍과 상처투성이뿐이었다. 아버지의 손마디는 굳은살이 박혀 바늘로 찔러도 감각이 없을 정도로 무디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기범이의 등을 밀어 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셨다. 그 중에서 기범이의 마음을 제일 아프게 한 말이 있었다.

“아버지가 연탄 장사하는 게 창피하재. 아버지가 사장님이 아니라서 미안하구나. 그런데 아버지는 연탄 장사하는 것이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갖다 준 연탄으로 동네 사람들이 따뜻하게 겨울을 보낼 수도 있고 말이야. 아참, 그리고 요즘 나무하기 힘들 재.”
“아니요. 괜찮아요. 재미있는 걸요.”
“올해만 참그래. 아버지도 너그 마음 다 안다. 그렇지만 뱁새가 황새 쫓아가려고 하면 가랑이 찢어지재. 항상 우리보다 못사는 사람들보고 살아야재. 그리고 내년 봄에 누나 결혼시켜 놓고 꼭 연탄 보일러 놔 줄거구먼.”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기범이는 고개를 숙인 채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아버지는 연탄을 배달하는 것이 아니라 달동네 이웃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나눠 주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족들 마음까지 다 헤아리고 계신 듯하였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기만 하였다.

아버지는 기범이의 그런 마음을 아셨는지 기범이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등은 바람에 나뭇가지가 휜 것처럼 굽어 있었다. 오랫동안 연탄 배달로 축 처진 아버지의 양어깨를 보는 순간 기범이는 눈물이 핑 돌았다.

“때가 많이 나오재. 이제 우리 아들도 제법 컸구나. 내 등도 다 밀어 주고 말이야. 이렇듯 우리 사회는 상부상조하며 사는 거재. 요즘 사람들 어려운 일을 너무하지 않아 큰일이야. 모든 사람들이 쉽고 편한 일만 하려고 하면 어려운 일은 누가 해야 하는지 원… 쯧쯧.”

아버지는 지금까지 연탄을 배달하면서 그 누군가에게도 힘들다고 넋두리를 늘어 놓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언제나 기범이 가족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분이었다. 그런 것들이 기범이 가족들에게는 늘 불만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오늘 자기와 함께 목욕을 가자고 한 그 이유를 기범이는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 아버지는 기범이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해 항상 마음 아파하고 계신 듯했다. 그래서 그 이유를 기범이에게 해 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집 연탄 창고는 금은보화 보물상자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니 금세라도 눈이 내릴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옆에서 기분이 좋으신 듯 웃고만 계셨다.

“기범아, 오늘 눈이라고 왔으면 좋겠재. 그것도 함박눈이 펑펑…”

평소에는 눈이 오면 배달 걱정을 먼저 하시던 아버지가 오늘은 웬일로 눈이 오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기범이 하고 목욕탕에 갔다 온 것이 그렇게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이고 뒤를 따라가는 기범이를 보고 빨리 오라는 손짓을 하셨다.

“너도 기분이 좋재?”
“예.”
“오랜만에 우리 아들과 목욕을 같이 하니 기분이 너무 좋은 걸. 자, 우리 맛있는 거나 사먹고 가자구나.”

그리고 기범이의 손을 덥석 잡고 떡볶이를 팔고 있는 포장마차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버지는 포장마차 안에서 기범이가 좋아하는 떡볶이와 어묵을 시켜 주셨다. 그리고 포장마차 아주머니가 말을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버지는 기범이 자랑을 늘어놓았다.

“아줌마, 우리 아들 잘 생겼재? 이 놈이 또 공부는 얼마나 잘하는데. 나는요, 우리 애들 중에 요놈이 제일 안 좋은기요.”

기범이는 아버지의 말에 머쓱해져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날 아버지가 사 준 떡볶이와 어묵은 방과 후 친구들과 학교 앞에서 사먹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집에 거의 다 이르렀을 때 기범이는 슬그머니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의 손은 거칠고 무디었으나 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스함이 느껴졌다. 아버지는 멋쩍어 하는 기범이의 마음을 아셨는지 기범이의 손을 꼭 잡아 주셨다. 바로 그때 얼굴 위에 차가운 무언가가 와 닿았다. 눈이었다. 그것도 함박눈이 하늘에서 날리기 시작하였다.

“아버지, 눈이에요.”
“그래, 올해는 대풍이 되겠구나!”

그 이후로 기범이는 연탄을 배달하는 아버지가 너무나 자랑스러웠고 이 세상 어느 아버지보다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침마다 창고 문을 활짝 열고 연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마음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살 수 있을 만큼 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범이에게 있어 올 겨울은 그 어느 해 겨울보다 따뜻할 것만 같았다. 비록 기범이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연탄 보일러보다 더 따스한 아버지의 마음이 이 추위를 녹여 줄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기범이는 자기 집의 연탄 창고는 금은보화로 가득 찬 금고보다 더 소중한 아버지가 이웃들에게 나누어 줄 사랑과 행복이 가득 담긴 보물창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도 사랑이 담긴 연탄을 리어카에 가득 싣고 달동네 사람들에게 행복을 배달하실 아버지를 생각하니 기범이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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