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는 언제나 비누냄새가 난다
아니, 그렇지 않다. 언제나 라고는 할 수 없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와 욕실로 뛰어가서 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때면 비누냄새가 난다. 나는 책상 앞에 돌아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ㅡ 그의 표정이나 기분까지라도 넉넉히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 ('젊은 느티나무' 中에서)
이 소설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싱그럽기도 하고, 그 강도와 여운이 특별한 비누냄새가 먼저 던져져 있다. 비누냄새에 공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마치 독자들이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듯, 어떤 상황설명도 없이 전개되는 이 엉뚱한 시작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함과 동시에 긴장까지 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그'가 누구인지, 왜 그의 비누냄새에 '나'는 관심을 보이는지 궁금하게 한다.
작가 강신재는 작품의 흐름에 필요한 인물만을 등장시키면서도 지루하거나 단순해질 수 있는 단점을 보이지 않은 채 작품을 전개한다. 이러한 전개는 인물의 사소한 행동, 옷차림새 등을 독특하고 세심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에게 그저 풋풋한 이미지에만 심취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저 '풋풋한' 소설은 결코 아니다. 이 작품은 재혼한 남녀 사이에 존재하는 이복 남매간의 사랑을 소녀의 입장에서 독백과 대화라는 두 가지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우리의 통념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사랑에 빠져버린 청춘 남녀 두 사람의 갈등을 윤리의 측면이 아닌 미학의 측면에서 그려나가고 있다.
두 남녀는 사랑이라는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소해 나갈 수 있을까? 작가는 사회의 규범, 혹은 우리의 통념을 넘어서는 사랑의 순수함을 보여준다.
자칫 신파조로 흘러가기 쉬운, 이복 남매의 사랑. 그러나 작가는 두 남매 '숙희'와 '현규'의 애정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두 사람의 감정을 감각적 이미지와 세련된 문장으로 써 내려감으로써 신파의 함정에 빠져들지 않는다.
또, '나'의 내적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소설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은 간직한 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마음 속 '나'만의 언어들을 잘 드러낸다. 이러한 작품의 면모는 인물의 생각들을 아무런 여과장치를 거치지 않은 채 독자에게 접하게 함으로써 작품 속에 더 빠지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간결하고 빠른 템포의 문체, 사건보다는 '나'의 심리 묘사에 더욱 치중된 이 작품은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심리적 갈등을 섬세하고 명확하게 묘사해 내고 있으며 '나'의 눈을 통해 현규의 마음을 헤아리게 함으로써 감정은 일관성을 지닌 채 흘러간다.
| | | 하나의 예술품을 빚어낸 소설가 강신재 | | | 감각적 포착으로 개성적인 작품들 남겨 | | | | 1943년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재학 중 결혼함으로써 당시 학칙에 따라 중퇴했다. 이후 소설 창작에 몰두하다가 1949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 <얼굴>과 <정순이>를 발표하면서 등단한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표 선생 수난기>, <젊은 느티나무>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불륜을 그린 애정소설을 발표하여 대표적인 여성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힌 작가이다. <젊은 느티나무>는 당시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 중 하나이다.
미학적 측면에서 탁월한 감각의 단편소설들을 많이 남겼으며, 통속적 내용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후기에는 독특한 역사소설의 면모를 지닌 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1983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정회원을 지냈으며,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를 역임하였다. 3·1문화대상·예술원상·중앙문화대상·여류문학상·한국문인협회상 등을 수상하였다. 주요 저서로 《임진강 민들레》《파도》 《명성황후》 등 80여 편이 있다. 2001년 2월 12일 7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 박성필 | | | | |
특히 <젊은 느티나무>가 '잘 만들어진 예술품'으로 남게 하는 것은 가장 극적인 장면인 '나'와 '그'가 숲길을 산책하는 시간들이다. 작가는 숲길에서 오갔을 수많은 대화들은 모두 생략한다. 이 작품은 이러한 과감한 생략을 통해 오히려 감정의 절제와 극적 효과를 갖는다.
다시 소설의 첫 머리를 떠올려보자. '비누냄새'는 무엇일까? '그'에게서 비누냄새를 맡을 때마다 '나'는 가장 슬프고 괴로운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가슴속으로 저릿한 것이 퍼져나감을 느낀다.
'그'의 비누냄새는 민감한 감수성을 지닌 18세 소녀로 하여금 첫 사랑에 눈뜨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그'에게서 풍기는 비누냄새는 실제로 맡을 수 있지만, 형체도 없고 피부로 느낄 수도 없는 것이다. 그 냄새는 바로 그녀의 안에서 감도는 실체 없는 사랑의 아련한 아픔이다.
한 그루의 느티나무처럼, 그들은 사랑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섣부른 행동으로 옮기지도 않는다. 어느 날 마음을 달래러 찾은, 젊은 느티나무가 있는 뒷산에 현규가 찾아온다. 그 젊은 느티나무는 두 연인 사이에 이뤄진 약속의 증인이 된다. 또, 바람 앞에 굳건한 줄기로 서 있는 느티나무의 모습처럼 사회적 통념에 굴하지 않고 사랑을 지켜가는 젊음을 상징한다.
엄마의 또 다른 아들, 즉 이복남매를 사랑하고 있는 '나'는 비록 엄마에게 "엄마의 아들을 사랑하고 있어요"라고 말하지 못했지만 그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에도 쉽게 인정받기 어려운 사랑을….
나는 젊은 느티나무를 안고 웃고 있었다. 펑펑 울면서 온 하늘로 퍼져가는 웃음을 웃고 있었다. 아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젊은 느티나무'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