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윗보다도 더 대단한 일을 해낸 한국 시위대?
우리나라 일간 신문의 보도로 우리나라 학생들이 졸지에 돌멩이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린 위대한 다윗 취급을 받게 되었다.
주한미군 기지 앞에서 시위 중이던 학생이 던진 돌이 반세기 동안 이 땅에 주둔해 오며 넘볼 수 없는 특혜와 성역의 울타리 안에서 절대 움직일 것 같지 않던 거대한 권력체, 주한미군의 조기 감축을 이끌어 냈으니 이것은 다윗보다도 더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이 아닌가.
지난 8월 27일 문정인 대통령자문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은 전경련 초청 조찬회 중에 작년 12월 30일 미국 NBC 뉴스가 3~5초 가량 방영한, 한국 학생의 돌에 맞아 미군 헌병이 피를 흘리는 장면을 보고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이 격분해 주한미군을 한국에서 빼라고 지시를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사소한 실수로 지상군 감축 논의가 앞당겨졌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럼스펠드의 발언은 내용의 진위조차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못했고 실제 미국의 중요한 정책이 우연한 방송 시청에 따른 감정적인 대응으로 결정될 사항도 아니었기에 단순한 가십성 기사로 취급해주면 충분하였다.
실제 럼스펠드 장관의 발언 내용도 “God damn it!(제기랄), Get them out!(그들을 빼내와)”처럼 국방장관의 공식적인 지시라고 보기 힘든 감정적인 차원에서 일순간 내뱉은 짤막한 발언 토막에 불과하다.
게다가 주한미군의 감축과 이동 사항은 유럽, 중동, 중앙아시아, 동북아시아 등 세계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미군재배치계획(GPR : Global Posture Review)의 일환으로 실행되고 있는 것이며 이 계획은 당초 부시 행정부 출범 후부터 럼스펠드 장관의 주도로 이미 구상되고 논의되어 온 매우 치밀하고 전략적인 방침인 것이다.
럼스펠드의 입을 빌린 언론의 질타와 위협성 발언
그러나 우리나라 언론은 단순한 가십성 기사에 불과한 문 위원장과 럼스펠드 장관의 발언을 매우 비중있게 다루며 한국 학생의 돌멩이 하나가 마치 미국의 GPR과 주한미군의 감축 결정에 결정적인 작용이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8월 28일자 1면에까지 3단 박스 기사로 이 기사를 배치하였고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각각 2면과 5면에 비중있게 이 기사를 게재하였다.
럼즈펠드 “제기랄! 주한미군 당장 빼내” (조선일보 8월 28일자 1면)
작년말 TV서 한국 시위대에 돌 맞는 미군 보고 럼즈펠드 “주한 미군 빼라” (중앙일보 8월 28일자 2면)
럼즈펠드 “제기랄! 주한미군 빼내” (동아일보 8월 28일자 5면)
조선·중앙·동아의 이같은 보도가 의도하고자 하는 바는 어렵지 않게 추론해 낼 수 있다. 럼스펠드 장관의 분노가 잔뜩 담긴 격정적인 발언의 표제가 보여 주듯이 이것은 국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진 반미시위와 감정에 대한 럼스펠드의 입을 빌린 질타이면서 동시에 위협인 것이다.
효순·미선 사망 사건과 부시 정권의 파병 압력으로 일었던 반미시위와 감정에 대해 ‘거 봐라, 그렇게 반미 이야기하니까 군대 빼가지 않느냐’는 식으로 노골적인 비난의 화살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미군 감축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이 결정한 행동
이 같은 의도는 뒤이어 이어진 사설 속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중앙과 동아는 사설에서까지 이 문제를 다루며 국민들의 반미시위와 감정을 강도 높게 질타하고 있다.
"문 위원장의 발언은 정부 고위당국자로서는 처음으로 주한미군 감축시기에 반미감정이 작용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미군 감축은 미국의 세계전략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일 뿐'이라는 정부의 설명은 허언(虛言)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결국 반미데모가 감축의 촉발제가 된 것이다." (중앙일보 8월 30일자 [사설] '반미 데모하며 미군 붙잡을 수 있나' 중에서)
문 위원장과 신문 사설 모두 주한미군 감축 시기 결정에 한국의 반미 시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미군 감축에 대한 우려와 불안감이 너무나 앞선 나머지 황당한 논리를 들어 시위대를 꾸짖고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 감축은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미국의 장기적인 세계전략의 일환인 GPR의 하부 조치로서 행해진 것이며 명백히 미국의 국익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는 행동이다.
사설의 논리대로라면 천여 명 가까이 미군이 사망했고 수천여 명의 미군이 다쳤으며 매일 반미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에서는 미군이 철수했어도 백번도 더 했어야 말이 되지 않는가.
오히려 우리는 미군의 재배치계획이 가져올 새로운 동북아 지역 긴장 조성 문제에 대해 우려하고 문제 제기하는 모습이 한반도의 평화를 걱정하는 정상적인(?) 한국 국민의 모습이 아닐까.
게다가 다른 나라 일개 장관의 심기가 불편해질까 두려워 목소리를 낮추고 있어야 한다는 식의 발언도 매우 사대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중앙일보 사설 <반미 데모하며 미군 붙잡을 수 있나>는 미군을 붙잡기 위해 반미 시위도 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데 효순·미선 사건과 미국의 파병 압력에 대항해 거리로 나섰던 수많은 우리 국민들은 앞뒤도 재지 못한 채 감정에 이끌려 다닌 경솔한 정치적 미숙아라도 된다는 말인가.
언론이 나서고 미군이 말리는 황당한 상황
우리는 미국의 입장에 서서 우리나라 언론이 키운 사태를 오히려 미군이 나서서 진압하려는 황당한 모습까지도 보게 되었다. 문 위원장의 럼스펠드 발언에 대해 주한미군사령부가 31일 공식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미군은 중요하고 복잡한 결정이 5초의 비디오 뉴스로 내려질 수 없다며 럼스펠드 장관의 감정적인 정책 결정 과정을 부인하였다. 하지만 조선과 동아는 이러한 사실을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언론은 럼스펠드의 입을 빌려 한국의 반미 시위대를 꾸짖고 있는데 오히려 주한미군은 한국 국민의 반미 감정이 오히려 높아지는 역효과를 우려해 적극적으로 부인 입장을 밝힌 것이다. 미국의 편에 서서 열성적인 대변인으로 나선 언론을 오히려 미군이 뜯어말리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상식상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논리도 신문 지면 위에 버젓이 올려놓고 다른 기사나 사설을 통해 지원·옹호해 주면 대중에게도 먹히는 훌륭한 논리로 포장·둔갑되는 경우가 다반사처럼 있었다. 럼스펠드 발언 기사도 미군 철수를 막아보려는 지나친 욕심에 평범한 조찬회 강연 내용 중 가십성 발언 일부를 끄집어내어 숭미 신문들이 벌인 해프닝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의 처절한 행동도 미국에게는 더 큰 이득을 위해 움직이려는 자신의 발목만 잡는 귀찮은 행동에 불과한 것이다. 민족적 자존심마저 팽개친 채 외국 군대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이들의 처절한 행동을 진정 ‘우리나라’ 신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