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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안개로 희뿌연 태백산 천제단. 해발 1567m.
구름 안개로 희뿌연 태백산 천제단. 해발 1567m. ⓒ 곽교신
구름 사이로 간간히 주먹만한 하늘이 보이는 유일사 매표소를 통과하며 봉우리 쪽을 올려다 보니 보이는 봉우리란 봉우리마다 시커먼 구름이 다 차지했다. 은근히 올라갈 길이 걱정이다.

그러나 저 구름 속에서 천제단이 빗물에 눈물을 감추고 홀로 울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하루 아침에 고구려를 내놓으라는데 '조용한 외교'를 명분으로 마냥 조용한 후손들을 내려다 보며 천제단은 회한의 분한 눈물을 흘릴지 모를 일이다.

올라가자. 비가 억수로 뿌려도 허위허위 올라가 안부를 여쭙고 싶은 백성이 이 땅에 무수히 많음을 올라가서 고하자. 이럴 때일수록 천제단에 찾아가고 싶은 백성이 많음을, 마음은 천제단에 가있는 백성이 많음을 올라가서 고하자.

뭐가 어째?

털끝 만큼의 의심도 없이 우리 역사로 알고 달달 외운 고구려가 우리 것이 아니란다. 수 양제가 135만 군사를 동원해서 세번이나 쳐들어 와서도 고구려를 멸하지 못하고 죽었고, 대를 이어 당 태종도 어쩌고 저쨌다고…. 나쁜 머리 가다듬으며 정성껏 외웠어도 시험 점수는 바닥이던 그 추억의 고구려가 우리 것이 아니란다.

중국 정부의 이런 황당한 주장에 대해 우리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잘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오늘부터 저 사람은 네 아버지가 아니란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에 많은 우리 백성들이 유독 고구려를 그리워 한다. 그러나 그 그리움은 연약한 그리움이 아니다. 북한 지역이어서 접근이 힘들다는 희소가치도 한몫 하지만, 사진으로나마 접해 본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느껴지는 웅장한 말발굽 소리와 고구려인의 강인한 기상은 늘 우리 가슴을 뛰게 만든 '도전적 그리움'이었다. 잦은 외적의 침입을 굳건히 물리쳤다는 고구려인들의 숱한 무용담은 그대로 국산 황금 박쥐요, 국산 마징가 제트요, 로보트 태권 브이였다.

그렇게 고구려는 우리의 마음 속에 살아 있는 우리 정신의 아버지요, 우리의 혼이다.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 거침없이 만주를 휘달리던 독립군들의 그 웅혼한 기상도 바로 그 땅을 호령하던 고구려의 정신에서 기를 얻은 것이 아닐까. 거칠것없어 보이는 고구려의 기상이 서린 땅이었기에 청산리대첩의 거짓말 같은 전적도 가능했을 것이다.

말 타고 달리며 시위를 당기는 무용총 벽화는 우리에겐 더 이상 무덤 속의 죽은 그림이 아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처음 그 그림을 본 이래로, 그 꼿꼿한 기상은 우리에게 민족혼으로 박혀 있다.

전광석화란 게 저걸 말하는구나 싶었던 문대성의 발차기 한 방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던 여자핸드볼의 끈질긴 승부 근성에, 바늘 끝에 서 있는 초긴장 상태에서도 결승 화살을 동전 크기로 보인다는 10점 동그라미에 꽂아 넣던 배짱에, 바로 엊그제까지 감격에 겨워 울고 웃으며 본 것이 바로 그 혼이다. 우리 모두에게 녹아 있는 혼이다.

그런데 그 역사가, 그 혼이 우리 것이 아니란다.

완전히 죽은 듯 보이는 나무 밑둥 한 켠에 건강하게 살아 있는 주목의 푸른가지 하나.
완전히 죽은 듯 보이는 나무 밑둥 한 켠에 건강하게 살아 있는 주목의 푸른가지 하나. ⓒ 곽교신
천년 주목의 바다

평범한 운동화에 우장도 없이 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정성을 갸륵하게 보셨는지, 아니면 한심하게 보셨는지 잔뜩 흐리기만 할 뿐 비는 내리지 않는다. 하늘의 배려가 산행에 힘을 준다. 1500고지 주목 자생군락지까지 다 오르도록 땀방울보다 더 적은 수의 빗방울을 맞았을 뿐이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의 주목(朱木)이라지만, 솔직히 천년 연세야 잡숫지 않았겠어도 이삼백 년은 족히 잡수었을 고목이 저리 묵묵할진대, 나무에 안 달린 입 달렸다고 내가 감히 이 땅 오천년 역사의 깊이를 떠들려함은 당치 않은 교만이 아니고 무엇이랴.

백년 먹은 주목쯤은 어린 나무 축에 들 것 같은 주목의 바다. 이 땅의 풍상 다 지켜봤을 세상의 대선배 '주목나무님'들을 똑바로 쳐다 보기가 어려워 사진 몇 장 찍고 쫒기듯 지나간다. 유장한 세월의 한 터럭을 사는 쪼잔한 백성이 오천년 역사 무서운 줄 모르고 깝쭉대고 올라와 선배님들 앞에 세상 먼지 뿌리며 지나갑니다 하며 말이다.

오천 년은 우리에게 세상의 어느 길이와 견주며 감각으로 느껴지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그냥 우리의 혼이다.

동북공정. 정확히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鉉象系列硏究工程). 이 긴 이름의 중국제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이미 한반도 평양 대동강 이북을 표적으로 일차 예광탄을 날렸다. 그 예광탄은 융단 폭격의 예고편인 듯하다. 학자들의 연구임을 내세우며 순수한 학문적 연구임을 표방하지만, 중국의 뻔한 그 주장에 우리 초등학교 학생들도 쓴웃음을 짓는다.

고구려 정벌에 국력을 쏟아 붓고도 거듭된 대규모 원정에 실패해 수 나라가 망하고, 수 양제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정벌을 소원하다가 죽어가며 "고구려를 깔보지 말라. 다시는 고구려를 치지 말라"던 당 태종의 유언을 오늘의 중국은 잊었는가? 대 고구려 전쟁의 결과가 수나라의 멸망이고, 당 태종의 비참한 죽음이었음을 중국은 잊었는가? 당 태종의 유언을 까맣게 잊고, 이젠 살아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역사 속에 잠든 죽은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인가? 그것이 중국의 진정한 모습인가?

2002년 초에 5년 기한의 학문적 연구임을 공식 발표한 동북공정의 시발이 사실은 1980년 즈음이라고 보는 것이 우리 사학계의 지배적 견해라고 한다. 수십 년에 걸친 집요한 학문적 융단 폭격으로 티베트의 과거(역사)와 현재(영토)를 통째로 집어 먹었고, 이젠 티베트를 무력으로 위협하는 중국의 다음 목표는 한반도라는 섬칫한 예단을 보도한 매체도 있다.

그렇다면 동북공정은 최소 백년을 내다보고 두는 기나긴 바둑판에 중국이 놓은 첫 수다. 우리에게 대국 의사는 묻지도 않고 펼쳐 놓은 바둑판의 첫 수를 중국은 천원(바둑판의 한 가운데 화점)에 "딱!" 소리를 내며 두었다. 천원에 첫 수를 놓음은 노골적이며 건방진 도전의 뜻이다.

이 도전에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또 19세기 말, 20세기 초를 겪을 것인가. 우리는 또 다른 명성황후를 잃고 또 다른 송병준을 낳을 것인가.

의미의 중압감에 비해 너무도 단촐해 오히려 서기가 느껴지는 천제단 내부의 제단.
의미의 중압감에 비해 너무도 단촐해 오히려 서기가 느껴지는 천제단 내부의 제단. ⓒ 곽교신
천제단은 흔들리지 않았다

주변의 돌을 손에 잡히는 대로 엉성히 쌓은 것으로 보이는 천제단 외벽이었지만, 그 날따라 세찬 바람에도 미동조차 없었다. 근처 백엽상의 온도계가 17도를 가리키는 추위마저 느껴지는 기온이었으나 돌담 바깥과는 달리 천제단 내부는 아늑했다.

그 아늑함은 역사의 온도이다. 우리 혼의 온도이다. 혼을 에너지로 삼은 우리의 체온이다. 그 혼을 잃으면 우리의 몸은 싸늘히 식을 것이다. 몸이 식음은 다름 아닌 죽음이다. 고구려를 잃음은 우리에겐 혼의 일부를 잃음이다. 우리 신체의 일부가 죽음이다.

그 아늑함에 취해 제단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어떤 기운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머리 속 어디론가 진인사(盡人事)하고 대천명(待天命)하라는 정확 간결한 소리가 들린다. 하늘에서 천언(天言)을 내리심인가.

그러나 어디까지 진인사하고 어디서부터 대천명해야 맞는지, 팬티엄급으로 내리는 하늘의 소리가 386용량의 머리로는 그저 왱왱거릴 뿐이다.

필요없다. 대다수 우리 백성은 조용한 외교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대책 없는 흥분도 원치 않는다. 감정에 들떠 맞대응하기엔 현실적으로 중국은 너무 큰 나라다. 그러나 방법은 많고 많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매서움을 반드시 보여 주어야한다.

일본이 독도를 놓고, 러시아가 북한을 놓고, 미국이 남한을 놓고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우리를 지켜볼 것이다. 일본, 러시아, 미국이 보기에 그 대응이 시원치 않으면, 백년도 안된 한일합방의 망령은 다시 현실이 되어 우리의 턱 밑에 칼 끝을 들이댈 것이다.

우리가 결코 만만치 않은 백성임을 반드시 보여야 한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 유능한 개가 무수히 많이 사는 이 땅임을 보여야 한다. 오천년 역사의 기운이 서린 땅에서 먹고 자는 혼령의 힘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어야 한다.

주먹돌을 엉성히 쌓은 듯이 보이는 천제단은 매서운 기세의 바람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염려와 달리 태백산 천제단은 울고 있지 않았다. 지레 눈물을 흘린 것은 나였다. 그러나 천제단을 내려온 나는 울지 않는다. 우리는 울지 않을 것이다. 울고만 있을 시간이 없다.

천제단 외벽 돌담처럼 엉성해 보이는 우리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전혀 흔들림이 없이 손에 손을 맞잡았다. 우리는 살기등등한 군사 정권을 서울시청 앞마당에서 깨끗이 굴복시키지 않았던가. 그것도 맨손으로.

이젠 밖이다. 중국이다. 아니 일본, 러시아, 미국도 있다. 독립군을 먹이고 입힌 군자금은 기생조합에서, 보부상의 등짐에서,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그렇게 저렇게 식민지 백성의 피가 모인 혈전이었다. 가까이는 IMF 구제금융의 환란 때도 무수한 금붙이가 피처럼 모였었다. 우리 백성은 반드시 해낸다. 꼭 해낸다.

천제단은 울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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