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작가들은 언제나 '인물'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그 인물이 독자들의 뇌리 속에 생생하게 남기를 바란다. 쉬운 일은 아니다. 웬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지 않으면 인물은 책 속에서 죽어버린다.

배수아도 그랬을 것이다. 그녀 역시 작가로서 인물에 대한 욕심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동시대의 주목받는 여작가들에 비해 배수아의 소설 속 인물은 물론, 작품도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했다. 너무 독특하다는 인상 때문에 배수아의 작품은 독자들보다 평론가들의 시선을 끌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의 신작 <독학자>는 다르다. 배수아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든 아니든 <독학자>의 등장하는 주인공 ‘나’의 생각과 행동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그만큼 ‘나’는 독특하며 시선을 끈다.

“마흔 살까지는 생계를 위해서 필요한 돈을 버는 이외의 시간은 오직 혼자서 책을 읽으며 공부할 것이다. 마흔 살까지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한눈팔지 않고 공부할 것이다. 마흔 살까지 나는 오직 공부에만 미칠 것이다. 마흔 살까지의 내 삶은 언제나 내가 꿈꾸던 교통수단이 없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으리라. 구술언어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으리라. 스무 살, 이제 그곳으로 나는 배를 타고 떠난다. 저녁의 광장에 희미한 불이 켜지는 시간이면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책을 펼칠 것이다. 신문이나 방송도 멀리할 것이다. 사람을 만나거나 직접 대화하는 것도 피할 것이다.”<독학자 中>

<독학자>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80년대의 어느 날 대학에 꿈을 갖고 있던 몽상가(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 많은 대학생들이 그렇듯이 ‘나’도 대학과 사회에서 실망감을 맛보고, 유일한 친구이면서 유일한 사랑이었던 S와 헤어짐과 동시에 대학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한국 문학에서 ‘80년대’와 ‘대학생’을 연결시킨 소재는 많았다. 너무 빈번해서 이제는 식상하다고 여길 정도였다. 그런데 배수아의 <독학자>는 진부함이 아니라 놀라움을 준다. 전혀 다르다.

‘독재정권의 80년대에 항거한 대학생’이라는 진부한 줄거리가 아니라 그것에서 비껴서 그것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시각을 취하고 있다. 아무리 소설이라 할지라도 상당한 논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예감이 들 정도로 날카로운 비판이 <독학자>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열심히 수업을 듣고 청강을 위해 다른 교실마저 기웃거리는 나보다도 그는 더욱 대학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중간시험 성적이 거의 영점에 이르렀던 그를 유급시키고자 했던 한 교수에게 보여준 그의 항의는 광란에 가까운 것이었고 비록 그가 원하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으나 나중에 그 교수를 군사독재정권에 빌붙어서 그들이 흡혈귀처럼 민중의 피를 빠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가증스런 지식인의 리스트-그와 같은 저항운동을 하느라 미처 시험 준비를 착실히 할 시간이 없었던 학생들을 고려해주지 않는, 그리하여 학점이라는 명분으로 이 사회의 궁극적으로 폭발적인 에너지인 모든 학생 계층을 꽁꽁 동여매어버려 결과적으로는 폭정을 일삼는 독재자들을 도와주게 되는….”<독학자 中>

물론 <독학자>에 숨겨진 비판의 펜은 그러한 학생뿐만 아니라 지식인, 대학, 사회 곳곳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복선과 같은 배경으로 ‘나’가 대학을 떠나 마흔 살까지 ‘스스로 만든 대학’에서 공부하겠다는 의지를 만들고 있다.

모든 얽매임을 훌훌 털어버리고 자유로움을 찾아 떠나겠다는 80년대의 몽상가를 보여주는 배수아의 신작 <독학자>. 극단적인 정신의 자유를 찾아 떠나는 캐릭터의 등장은 사건 중심의 흐름으로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던 책들과는 전혀 다른 즐거움을 주고 있다.

독학자

배수아 지음, 열림원(2004)

이 책의 다른 기사

더보기
사심 없이 <독학자> 읽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