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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못다 한 말 있네> 표지에 실린 임찬일씨 모습
시집 <못다 한 말 있네> 표지에 실린 임찬일씨 모습 ⓒ 문학촌
그날의 약속(2001년 늦봄의 어느 날)은 대학의 문예창작과 은사님인 중진소설가 최창학 선생님(대표작 <창> <아우슈비츠>)의 환갑 기념 헌정 문집을 만들기 위한 제자 문인 몇몇의 만남이었다. 소설가 이나미씨는 바로 그 편집위원 가운데 홍일점이었으며, 러시아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모교에 강의도 나가고 있는, 헌정 문집 편집위원들 가운데 가장 선배문인이었다.

"찬일씨 말예요."
"예."

그녀가 말하는 찬일씨라면 바로 문단 데뷔 5관왕 임찬일씨를 말함이었다.

그는 1986년 한 해 동안 <월간문학> 소설 부문 당선, <중앙일보> 전국시조백일장 장원, <스포츠서울>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함으로써 3장르 3관왕에 올랐었다. 게다가 1992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하였고, 1996년에는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하였다.

대학 재학 시절에 나보다 한 해 앞에 학보사 편집장을 맡았었던 형.
전남 나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군대에 다녀와서 뒤늦게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입학했기 때문에 다른 현역 동기생들보다 나이가 일곱 살이나 많았다.

"찬일씨가 위독하대요."

서울예술대학 재학 당시에 학보사 살림살이를 맡았던 그녀의 목소리는 몹시 떨리고 있었다. 1996년부터 앓아온 만성 신부전증 때문에 현대자동차서비스 홍보실 과장 일을 그만둔 지가 꽤 오래인데, 그 병세가 악화되었단 말인가. 건강하였다면 지금쯤 홍보담당 이사 정도 되었을지도 모를 만큼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간암 말기예요."

신장염 전에 간이 좋지 않았었는데, 그것이 상당 분량의 소설 집필(2000여매)로 더 나빠진 모양이었다.

"예?"
"부인이 오늘 묘자리 보고 왔대요. 아마 오늘 아니면 더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저는 찬일씨 소설 원고도 가지러 가야 하고 그래서, 오늘 편집회의에 불참해야 하겠어요. 편집회의에서 결정하는 대로 따르겠어요."
"나도 간다 간다 그러고 형한테 문병 한번 못 갔었는데…."

나는 좀 허둥거렸다.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을 좀 가다듬은 뒤, 그날 편집회의 참석 예정자들에게 잇달아 전화를 넣었다. 그러고서 편집회의를 찬일형이 입원해 있는 부평성심병원 중환자실에서 만난 뒤에 약속장소를 급하게 바꾸었다. 그래서 헌정문집 편집위원 모두가 찬일형의 문병을 가게 되었던 것이다.

헌정문집의 주인공인 은사님이 학보사 주간을 맡아 오셨기 때문에 헌정문집 편집위원은 소설가 김기우씨를 빼놓고는 자의반 타의반 소설가 박관식, 이용원씨 등 역대 학보사 편집장 출신 문인이 맡고 있었고, 찬일형은 갑자기, 그동안 죽 자신의 바통을 이어받아 왔던 직계 후배 편집장 여러 명의 병문안을 받게 되었던 셈이다(말이 문병이지, 임종 전에 얼굴 한 번 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5기생의 리더로서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검정고시를 거쳐야 했을 정도로 가난한 집안사람이면서도 넉넉한 마음과 고도의 유머 감각으로 많은 후배들의 맏형 역할을 톡톡히 해주던 친형 같은 찬일형. 길을 가다 마주쳐도 "신춘문예 준비 잘 돼가냐?"며 마실 만큼 술을 사주던 믿음직한 형이었다.

병원에 도착해 보니 찬일형의 동기생들이 꽤 많이 와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움에도 우리들은 웃음을 나누지 못했다.

찬일형의 얼굴은 말 그대로 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머리도 많이 빠져 있었으며, 얼굴 곳곳에는 검버섯이 퍼져 있었다. 50을 세 해 남겨 놓은 나이인데 그랬다.

"너, 선영이지?"

찬일형은 몹시 반가워하며 말했다. 나는 그 동안의 무심함을 속죄라도 하듯이 찬일형의 손을 두 손으로 꼬옥 쥐어주었다. 밤낮없이 먹고 살 일 걱정하느라 문병 한 번 가지 못했던 못된 후배였다.

"소설만 쓰니? 너 혹시 드라마 안 쓰니? 드라마 작가 김선영이라고 나오던데?"
"소설만 씁니다. 그 드라마 작가는 동명이인이에요."
"그것만 써서 먹고 살 수 있니?"

찬일형은 어쨌든 반가웠는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근데 왜 이렇게들 부산을 떨고 그래? 이러다 아무 일도 아니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 되겠어?"

찬일형은 고통이 심할 텐데도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는 듯하며 말했다. 얼마나 쥐어 주었을까, 찬일형의 시들어버린 손에서 땀이 흥건하게 배어나왔다. 순간 나는 찬일형이 살아나고 있다는 직감을 받았다.

"이제 그만 나가셔야 해요."

면회 시간이 30분이나 지났다며 간호사가 와서 떼어 놓았다. 그런데 이튿날 찬일형은 중환자실에서 일반 환자실로 옮겨갔으며, 얼마 뒤에 퇴원을 하는 날에는 소설책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그 동안 거의 모든 문학 장르에 당선한 천재 문인으로서 시집 세 권을 출간했는데, 이번엔 자신의 선대조인 임제의 생애를 그려낸 소설 <임제>를 퇴고하여 완성한 것이다. 그 동안 꾸준히 모아둔 취재자료를 가지고 2000년 10월부터 쓰기 시작했다는데, 만성신부전증에 겹쳐진 간암 말기 증세로 퇴고를 하지 못한 채 묵혀 두고 있던 2000여매의 원고를 중환자실에서 임종 직전에 다시 살아나 퇴고하였으니 얼마나 무서운 생명력이요 집중력인가.

죽음 직전에 다시 살아나 퇴고해낸 소설 <임제>
죽음 직전에 다시 살아나 퇴고해낸 소설 <임제> ⓒ 창해
(소설의 주인공 백호 임제(1549~1587)는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하는 기생 황진이를 추모한 시조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그 시가 천박한 기생을 추모했다는 이유로 봉고파직을 당한다.)

찬일형은 그렇게 살아났다. 수백 명의 하객들에게 일일이, 책 면지에다 붓으로 묵향(墨香) 그윽하게 서명을 해주었으며, 출판기념회가 끝날 때까지 세 시간 넘게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 동안의 무관심을 후회하며, 일을 버리고 중환자실로 달려간 후배들의 사랑의 힘이 이만큼 크구나.'

그러나 아무리 정신력과 신념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영원히 살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얼마 뒤, 찬일형의 부음(訃音)이 들려왔다.

그날은 하필, <내게로 온 것들은 눈이 슬퍼라>라는 슬픈 제목의 첫 임찬일 시조집이 나오는 날이었다. 찬일형은 자신의 첫 시조집은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아니, 어차피 시조집을 보지 못할 것을 미리 알고 제목을 그리 정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시집은 그가 사랑해 주었고 그를 사랑해 주었던 사람들에게 찬일형이 마지막으로 건네준 '마음 깊은' 선물이 되었다.

'소설가 최창학 선생님께 드리는 제자문인들의 헌정문집' <마음의 연인>(2001년 발간)에 담겨 있는 그의 시 '누이가 있는 강'을 여기에 옮겨 본다.

'강가에서 나는 또 어지러웠다
포플러 나무로 둘러싸인 큰집 누이의 빈혈처럼
물살 위로 날던 한낮의 도깨비불
들깨불 자주빛으로
산국화 주황색으로
강물에 몸을 풀던 누이 같은 해

저물어 가는 포전에서
누이의 허벅지처럼 희고 긴 무를 뽑아
손아귀로 비틀어 내어 남몰래
감추듯이 강물에다 내던지면
시퍼렇게 입술을 물고 쳐다보던
강의 눈빛
허기를 타고 올라오는 무트름에
내 가난한 시절은 진저리쳤다

늙은 갈대꽃이 우우 소리내어 우는
강의 등줄기를 타고 헐떡거리며
통통통 올라오는 멸치젓에
누이는 석양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나와
몰래몰래 개짐을 빨았다
강물에 풀린 노을은 갈수록 붉어지고
나는 또 그 풍경에 휩싸이며
이마에서 반짝이는 현기증을 앓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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