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문장. 그것을 나는 맨 처음 토마스 만의 <베니스의 죽음>에서 발견했다.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익숙하지 않았던 그 긴 문장을. 오직 선택된 문장과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진 푸르고 인상적인 풍경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세계로부터 격리당하고, 그리고 동시에 어느 한 세계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 도시, 그 거리, 너무나 특별했던 어느 한 시기, 그리고 ……라 불리는 한 작가 ……에 대한 풍경. 두세 번을 반복해서 읽고서야 나는 그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 '그는…… 멀고 먼 산책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윽고 나는 나 자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모든 것에 대해서 내가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198x년, 네 번째 학기의 시작을 눈앞에 두고 나는 대학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내가 대학에 등록하지 않을 생각임을 눈치 챈 주변 사람들은 아마도 내가 일 년이나 이 년 정도 공부를 보충한 다음 다른 대학을 찾아가리라고 짐작하는 듯 했고 나는 그런 생각을 굳이 수정시킬 마음이 없다.
- 9~10쪽, 몇 토막
2001년 여름, 독일어 연수를 위해 베를린으로 건너간 뒤 지금까지도 베를린과 서울을 시계추처럼 오가며 자신만의 독특한 소설의 텃밭을 가꾸고 있는 작가 배수아(39)가 장편소설 <독학자>(열림원)를 펴냈다. 이 소설은 2003년 겨울부터 2004년 여름까지 계간 <문학 판>에 연재되었던 소설.
소설의 시점은 6월항쟁이 끝난 뒤 한창 사상적 논쟁에 불이 붙었던 80년대 후반이며, 장소는 대학생들의 시위와 정치적 논쟁이 계속되는 대학이다. 주인공 '나'는 "거대한 정치 집회장"이자 "더 이상 공부하는 장소"가 아닌, 그 대학에 다니는 스무 살 먹은 청년이다.
"그가 80년대와, 특히 당시의 대학에 심하게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개인으로서 정신적인 독립을 최고의 가치로 평가하는 한 인간이 어떠한 시대정신과 어울릴 수 있다고 하는 말은 언제 어디서나 모순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사라짐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80년대의 대학에 있다고는- 비록 그가 기록으로 많은 비판을 퍼붓기는 했으나- 말할 수 없다." - '작가의 말' 몇 토막
'나'는 고등학교 시절 가정교사 김영주 선생님으로부터 "좋은 교사란 결국은 좋은 토론자를 뜻한다", "토론이 아닌 것은 수업이 아니다"라는 말을 듣는다. 대학에 갓 들어간 '나'는 그 선생님의 말처럼 대학이란 곳은 진정한 의미의 모든 진화가 이루어지는 곳, "정신과 지성의 진화"가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밤이나 낮이나 토론이 이루어지고 그들은 읽은 것을 서로 나누고 그들이 아니면 성취할 수 없었던 사유를 교환하고 서로에게 서로의 좋은 토론자가 되어주며 그곳은 천박하고 상업적인 것과 일정연봉의 직업을 구하려는 실리적인 목적에서 벗어난 영역으로, 오직 정신만을 위하는 정신, 그 자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지상의 유일한 장소"라고 생각한다.
그런 '나'의 기대는 대학이 들어간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서 산산조각이 난다. 그리고 대학을 '나'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단 두 명뿐이다. 그 두 명은 '나'를 포함해 같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S. 그 "S는 참을성이 강하고 책을 일단 한번 잡으면 주변을 모두 잊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공부벌레"다.
그때부터 '나'는 S의 지성적이고 정신적인 강인함과 독창성에 점점 끌리게 된다. 심한 근시를 콘택트렌즈로 숨기고 있는 S는 비록 둔하고 거대한 몸집에 "거무스럼한 피부를 하고 땀이 많으며 중요한 순간에 코를 훌쩍거리거나 트림"을 하기도 하지만 그의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번역문장은 세련되지 못한 외모와 태도를 능가하는 힘이 있다.
| | | 작가 배수아는 누구인가? | | | 자신의 작품을 습작품이라고 말하는 작가 | | | |
| | ▲ 작가 배수아 | ⓒ열림원 | | "<독학자>에서 작가가 하고 싶었던 것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세상을 향한 직설적 발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배수아는 의도의 차원에서 타동사적인 것을 자동사적 글쓰기로, 오늘날 한국 사회 자체와 그 구성원들을 향한 발언을 개인의 관찰과 고백과 사색으로, 글쓰기의 사회적 책임의식을 그것의 성실성으로 전환시켜놓고 있다." -권오룡(문학평론가) '해설' 몇 토막
작가 배수아는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3년 <소설과 사상>에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푸른사과가 있는 국도> <바람인형> <심야통신> <그 사람의 첫사랑>이 있으며, 중편소설 <철수>, 장편소설로는 <랩소디 인 블루> <부주의한 사랑> <붉은 손 클럽>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이바나> <동물원 킨트> <일요일 스킨야키 식당> <에세이스트의 책상>이 있다.
2003년 <한국일보> 문학상 수상.
/ 이종찬 기자 | | | | |
하지만 대학은 강의실 안이나 강의실 밖이나 늘 '나'의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든다. 명강의로 소문난 강사들의 수업교재는 "진주만 침공 이전에 나온 일본의 교과서를 말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고, "유머가 있고 점수에 후한 교수일수록 학생들의 인기를 끌었으며 대개 그런 경우가 능력"이 있는 교수로 인정받는다.
캠퍼스는 거대한 정치 집회장이었으며 성적이 부진한 학생들을 낙제시킨다는 정부의 협박이 공염불이 되리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노골적인 비밀이었다. 대학은 더 이상 공부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아니 내 눈에는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는 장소처럼 보였다.
대학은 공공연하게, '젊음과 청춘을 불태우는 장소'쯤으로 대외적으로 평가받고 있었고- 그 문구가 표면적으로 디스코클럽의 광고문안과 닮아 있는 것처럼 속 내용도 닮아 있었으며- 당사자들도 그런 평가에 만족해 했다. 대학원 학과장실에서 면담을 요청해 만난 늙은 교수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조차 싫다.
그들은 명성이라는 더러운 스타킹을 뒤집어쓴 부패한 관료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도 세무서나 소방서보다 더 심하게 말이다. 그들이 여기저기 짜집기하여 만든 교양수업 교재는- 교양수업 교재라니, 어째서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우리가 읽을 만한 고전이나 교양서적이 없어서란 말인가?- 수십 년간 변함 없이 채택되는 대학가의 베스트셀러였으며, 그 책상 밑에서 더 이상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것이다.
- 37~38쪽, 몇 토막
이는 강의실 밖도 마찬가지다. '나'가 바라보는 캠퍼스는 지성으로 가득찬 대화와 토론이 자유스럽게 이루어지는 그런 곳이 아니라 서로의 정치적 노선만을 고집하는, 그리하여 서로 뜻이 맞지 않으면 금세 적과 동지로 나뉘어지는 그런 거대한 정치 집회장처럼 보인다. 교수 또한 "명성이라는 더러운 스타킹을 뒤집어쓴 부패한 관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때부터 '나'는 S만을 유일한 정신적 동지로 삼아 책 속으로 점점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런 어느날, S가 아버지의 사촌형제인 P교수를 '나'에게 소개해 준다. '나'는 P교수의 얼굴에서 "아직 내가 만나보지 않은 어떤 세계, 아직 읽지 않은 한 권의 책"처럼 싱싱한 새로움을 느낀다.
P교수에게 그동안 꽤 여러 통의 편지를 썼으나 그는 한 번도 답장을 보내주지 않았다. S를 통해서 그의 주소를 알아내는 것조차 나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S는 내가 그에게 보내는 관심을 질투하여 갑자기 나에게 더할 수 없이 냉담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가을이 다 가고, 이른 회색빛 겨울이 찾아올 때 즈음에야 나는 그의 주소를 얻을 수가 있었다…
매번 편지를 쓸 때마다 나는 그를 한번 방문해도 좋겠느냐고 끈질기게 물었으나 역시 아무런 대답을 받지 못했다. 마침내 나는 혹시 S가 일부러 엉뚱한 주소를 전해준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S는 나와 마찬가지로 그를 흠모하고 있음이 분명했고, 자신이 나보다 더 그럴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편지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세상의 모든 책에 대해서 그에게 편지를 쓰게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가 젊음에 대해서 암시한 대로, 세상의 모든 일을 경험한 다음, 세상의 모든 장소에서 그에게 편지를 쓰리라 생각했다.
- 74~76쪽, 몇 토막
'나'는 여행지에서 P교수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를 다시 만나기를 원한다. 그러나 P교수에게서는 답장조차 한 번 없다. 마침내 긴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S에게서 "P교수가 백혈병을 앓다가 내가 여행을 떠난 직후 죽었으며, 그를 기리기 위해 백일 동안 검은 양복을 입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듣는다.
'나'는 큰 충격을 받는다. 게다가 그동안 영혼의 동반자로 여기고 있었던 S조차 같은 대학에 다니는 한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때부터 '나'는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다가 마침내 S와 대학을 떠나 독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마흔 살까지는 생계를 위해서 필요한 돈을 버는 이외의 시간은 오직 혼자서 책을 읽으며 공부"에만 매달릴 것이라고 선언한다.
작가 배수아의 장편소설 <독학자>는 스무 살 청년이 대학에서 지독한 환멸을 느끼고 마침내 대학을 떠나 '스스로 만든 대학'을 찾아가는 성장소설이자 1980년대 후반에 바라본 우리 나라 대학의 현주소다. 물론 그 당시 사상논쟁을 벌이고 있는 대학생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아주 위험하긴 하지만.
그래서였을까. 배수아는 작가의 말에서 주인공 '나'가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무시무시한 또 하나의 독재로 보일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애정을 기울여서 쓰고자 했던 것은 섬세한 영혼을 가진 한 고독한 젊은이의 내면세계였을 뿐, 마치 펜을 칼처럼 휘두르면서 남을 야단치는 식의 글쓰기는 할 생각이" 없었다고 덧붙여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