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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고서는 정부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뉴질랜드 인권위원회가 지난 2000년 발표한 보고서 서문에 씌어 있는 글귀다. 비록 단 한 줄이지만, 국가인권기구의 성격과 위상을 예리하게 포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대다수 국가행정기관의 운영이 정부와 맥을 같이하는 게 ‘상식’인 시각에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을 문구이기도 하다.

전 세계 100여 국가에서 다양한 형태로 운영하고 있는 국가인권기구는 기존 ‘상식’을 깨는 기반에서 출발해, 새로운 상식을 만들며 활동하고 있다. 지난 14일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열리는 제7차 세계국가인권기구대회 역시 그런 자리가 될 전망이다.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으로 논의 물꼬 열어

국가인권기구의 필요성을 주창한 최초의 기록이 1946년 유엔 보고서에 남아 있다. 1946년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서는 “유엔 인권위원회의 활동을 촉진하는 과정에서 각국과 협력하기 위한 정보 집단 또는 국가 단위의 인권위원회를 설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국가인권기구 설립을 권유했다.

당시 인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무참히 짓밟히는 상황을 겪었다. 이에 유엔은 인권 보장을 위한 노력으로 1948년에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했다. 국가인권기구가 세계인권선언에서 명시한 보편적인 인권 원칙이 각국으로 확산되도록 하는 수단으로 되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유엔이 초반에 구상하던 국가인권기구는 현재 각 국가에서 운영되는 국가인권기구와는 개념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즉, 초반에 구상한 국가인권기구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각 국가에서 인권 보장과 향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모든 기관을 포함했다.

그후 인권침해 문제를 다루는 기관이 몇몇 국가에 만들어지면서 국가인권기구의 개념에도 변화가 생겼다. 1957년 미국에서 시민권법에 의해 설립된 시민권위원회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시민권위원회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면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 대우를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졌다. 이런 기구들이 모델로 제시되고, 각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국가인권기구의 개념 역시 인권 교육 및 인권 향상, 인권침해에 대한 조사와 구제, 인권 현안에 대한 자문 등의 기능을 추가하게 되었다.

유엔의 국가인권기구 설립 의지가 더욱 구체화된 것은 1960년에 유엔 인권위원회가 발표한 국가인권기구 설립 권고였다. 이 권고에는 국가인권기구가 인권 보호와 향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인정하는 한편, 국가인권기구의 설립과 유지를 회원국들에게 촉구하고 관련된 모든 정보를 사무총장에게 통보하도록 했다.

이어 1978년에는 국가인권기구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지침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이 지침은 이보다 2년 앞선 1976년에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A규약)과,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B규약)의 효력이 발생하게 된 것과 연관이 깊다.

유엔은 A규약과 B규약이 각국에서 효과적으로 이행될 수 있도록 하는, 즉 개별 국가 안에 존재하면서도 국제규약이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는 국가인권기구의 설립에 관심이 더욱 깊어졌다.

이는 1978년 유엔이 연 세미나에서 지침을 마련하는 것으로 집중됐다. 이 지침은 국가인권기구의 기능을 정부와 국민을 위한 인권 관련 정보 창구 역할, 인권 의식 형성을 위한 여론 형성 지원 등으로 보았다.

아울러 국가인권기구의 구조에 대해서는 헌법과 법률에 따라 조직되며 자율적이고 공정한, 법률상의 기관으로 설립하는 것 등을 원칙으로 정했다.

유엔을 중심으로 한 국가인권기구 설립 논의는 1976년 호주 기회평등위원회 설립, 1977년 뉴질랜드 인권위원회 설립, 캐나다 인권위원회 설립으로 가시화 되었다.

국가인권기구의 바이블, ‘파리원칙’

전 세계적으로 국가인권기구의 발전에 큰 획을 그은 것은 1993년 12월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국가인권기구의 지위에 관한 원칙’이다. 1991년 파리에서 열린 제1차 국가인권기구 국제워크숍에서 제정돼 통상 ‘파리원칙’으로 불린다. 이 원칙은 1992년 유엔 인권위원회를 거쳐 1993년 12월 유엔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이런 결실은 그해 6월에 열린 비엔나 세계인권회의가 한몫했다. 이 회의에서 세계인권회의가 비엔나 선언 및 행동계획을 마련하고, 국가인권기구가 인권 향상과 보호를 위해 권한 있는 당국에 자문기구 역할을 하며, 인권 침해 구제와 인권 정보 확산 및 인권 교육 등의 활동을 펼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아울러 이 대회를 계기로 국가인권기구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제인권법과 제도에 대한 인식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파리원칙은 국가인권기구의 권한과 책임, 구성과 독립성 보장, 운영 방식, 준사법적 권한에 관한 원칙 등을 담고 있다. 이에 의하면 국가인권기구는 인권을 보장하고 향상하는 데 필요한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헌법 또는 법률에 근거하되, 그 구성과 권한을 가능한 한 광범위하게 부여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그에 따라 △ 정부나 국회 등에 인권 보장과 향상에 관한 의견·권고·제안 및 보고서를 제출하거나 발표하는 자문 기능 △ 인권 교육 및 연구 프로그램 작성 지원 및 인권에 대한 대중적 인식 확산 등의 인권교육 기능 △ 유엔 관련 또는 각 국가의 인권기구와의 국제협력 기능 등이 필요하다고 열거했다.

또 국가인권기구를 구성하는 데 있어 △ 인권위원 선정 과정에서 인권 향상과 관계된 사회 세력의 대표성을 갖는 협력관계 필요 △ 정부로부터 독립되어 활동할 수 있게 재정적 독립과 독자적인 인력 및 공간 확보 보장 △ 독립성 확보를 위한 인권위원 임기 보장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 밖에 운영방식에 대해서는 권한에 속하는 모든 사안을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조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을 제시했다.

파리원칙이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것을 계기로, 국가인권기구에 대한 인식이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어서 지역별로 국가인권기구간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아프리카 지역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95년에 인권위원회를 설립했다. 또한 이듬해인 1996년 2월에 카메룬에서 아프리카 지역 인권위원회 모임을 갖고 아프리카 국가인권기구 조정위원회를 결성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1993년 인도와 인도네시아에서 인권위원회가 설립됐다.

또 1996년 7월에는 이보다 앞서 설립된 호주와 뉴질랜드 인권기구 등이 함께 모여 제1차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인권기구 워크숍을 열었다. 이 워크숍에서 아시아·태평양 국가인권기구 포럼(APF)을 조직했다. APF는 현재 한국을 비롯한 피지, 네팔 등 14개국(2개국은 준가입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오는 9월 13일 서울에서 제9차 아시아·태평양지역 국가인권기구 연례회의를 연다.

파리원칙은 전 세계에서 국가인권기구를 설립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각국이 국내 상황에 따라 적절하고 효과적인 인권기구를 만드는 데 필요한 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각국에 설치된 국가인권기구는 각국의 인권상황을 개선해 나가는 데 실질적인 기능과 권한을 가질 수 있는 형태로 정할 수 있게 했다.

국내법상 기구지만, 국제인권규범에 따라 판단

이에 따라 현재 각국에 설립된 국가인권기구 역시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설립 근거를 기준으로 보면 대부분의 국가에서 법률에 의해 설립돼 있지만, 필리핀·남아공화국 인권위원회와 스웨덴·덴마크의 옴부즈만은 헌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설립 형태 또한 유럽과 남미 지역에서는 옴부즈만 형태가 많다. 스웨덴이 이미 1809년에 의회 옴부즈만을 도입한 것을 비롯해, 영국은 1976년 인종평등위원회를, 프랑스는 1986년에 인권자문위원회를, 네덜란드는 1994년에 평등대우위원회를 구성했다.

반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는 위원회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이 밖에 예산 형태 면에서 보면 남아공화국, 호주, 덴마크,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서는 독립적으로 예산을 편성하고 있다.

국가인권기구가 각국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지만, 파리원칙의 핵심은 국가인권기구가 인권 향상 활동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 B.V. Somasekher는 “인권위가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그동안 아무도 풀지 못했던 인권 숙제를 독자적으로 해결하는 본보기를 보여 줘야 한다. 정부에 대한 발언에서 주저함이 없어야 하고 어디든지 대담하게 접근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국가인권기구는 형식적으로는 국내법상 기구이지만, 내용상 국제인권규범에 있는 만큼 국가가 주체가 된 인권 침해에 대해서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하여 국민을 인권 침해로부터 구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입법·행정·사법부의 3권 분립이 상식인 사회에서는 한동안 낯선 국가기구로 존재하게 마련이며, 국가기관(입법·행정·사법부)을 끊임없이 견제해야 하는 임무 때문에 국가기관과의 거리도 유지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폴란드의 인권학자인 Ewa Letowska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인권기구는 체제가 도저히 환영할 수 없는 뜻밖의 것임이 판명되었다. 인권기구의 본질로 인하여, 어떤 권력에게든지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는 인권기구는 불편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제7차 세계국가인권기구대회의 주제는 ‘분쟁과 대테러과정에서의 인권보호’다. 유엔에서 국가인권기구 설립을 논의한 지 채 60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국가인권기구는 전 세계에서 양적·질적 성장을 이뤄왔다.

그럼에도 약 60년 전 국가인권기구 논의의 시발이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이었고, 2004년 현재 세계 국가인권기구가 모여 논의하는 주제가 ‘분쟁’이라는 점은 지구촌 인권의 현 주소를 가늠케 한다. 여전히 ‘할 일’이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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