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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쑥부쟁이가 사냥꾼을 보내는 건 ‘사랑은 이런 기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 명랑씨어터 수박
대학로에서 열리고 있는 젠더 크리에이티브 페스티벌 공연작 <쑥부쟁이>의 안내 책자에서 쑥부쟁이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곰이라도 잡을 덩치에 수세미 머리를 한 쑥부쟁이는 솥뚜껑 같은 손으로 쑥을 캐고 있다.'

한마디로 못생겼지만 심성만은 비단결처럼 고운 전형적인 못난이 캐릭터다. 곰이라도 잡을 덩치에 수세미 머리, 솥뚜껑 같은 손이라니! '주인공이 좀 심심한 거 아냐' 하는 우려가 슬쩍 고개를 든다. 그러면서도 쑥부쟁이 역의 배우가 과연 이 심심한 인물을 심심하지 않게 그려낼 수 있을지 호기심이 인다.

'쑥부쟁이가 하기 나름이다.'

당연한 사실을 중얼거리는 동안 연극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공연시간 60분이 금세 흘렀다. 열연한 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나는 그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난 15일 <쑥부쟁이> 공연이 끝난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쑥부쟁이 역을 맡은 장유경(25)씨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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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부쟁이> 그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며

"사랑은 이런 기 아니다"

"너무 착하죠, 그래서 답답하죠."

나는 지나치게 착한 쑥부쟁이의 성격도, 쑥부쟁이가 죽는 결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운을 떼었다. 장유경씨도 대뜸 말을 받는다. 그리고는 덧붙인다.

"착한 여자가 정말 복을 받을까 고민을 했어요. 이런 물음도 던져봤죠. 쑥부쟁이가 착해서 혼자 일하고 식구들을 거둬 먹일까? 쑥부쟁이가 착해서 사냥꾼을 보내는 건가? 쑥부쟁이가 사냥꾼을 보내는 건 '사랑은 이런 기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유경씨는 영악한 딸 쑥부쟁이가 등장하는 결말도 통쾌하다고 했다.

"노루도, 사냥꾼도 믿지 말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른 딸 쑥부쟁이는 얻는 게 있죠. 더 이상 착한 여자는 없어요."

착한 여자로서 어미 쑥부쟁이는 그래서 더 순박하고 착해야 했던 것일까? 현재와 분명하게 단절하기 위해서? 해석은 다를 수 있다. 근 반년동안 쑥부쟁이로 살아온 장유경이라는 배우와 단 한 번 쑥부쟁이의 삶을 훔쳐본 송민성이라는 관객의 시선이 같아야할 이유는 없으므로 물음을 돌리기로 한다.

▲ "요즘은 내가 했던 다른 어떤 역보다 쑥부쟁이가 내게 어울린다는 말을 듣고 있죠"
ⓒ 송민성
- 연기는 언제부터 했나?
"98년에 연기학원을 다닌 것이 시작이었어요. 원래는 미대에 가려고 했는데 재수를 하면서 전공을 바꿨어요. 그때까지 연극을 본 적도 없었고 해본 적은 더더욱 없었어요. 고등학교 방송부에서 말로 하는 연기를 해본 게 전부였죠."

전공을 바꾼다는 것이-그것도 미술에서 연기로- 쉽지 않았겠다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젓는다.

"공부하면서 연극·영화 쪽으로 진출한 선배들을 만났는데 그 분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확신 같은 게 들었어요. 나도 저런 걸 하고 싶다, 저런 걸 하면 잘할 수 있겠다 하는."

뒤늦게 진로를 틀었지만 그 해 유경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에 무난히 합격한다. 학교에서 했던 연극까지 포함해 예닐곱 편 정도의 작품을 했다. <쑥부쟁이>는 졸업 후 처음으로 하는 외부 작품이다.

사실 그는 대학 시절 이미 쑥부쟁이 역을 맡아본 경험이 있다. 연출과 학생이었던 추민주(<쑥부쟁이> 작가 겸 연출)씨가 쑥부쟁이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사람들이 의아해 했어요. 쑥부쟁이는 덩치도 크고 씩씩한데 저는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요. 그래서 더 열심히 했어요. 요즘은 내가 했던 다른 어떤 역보다 쑥부쟁이가 내게 어울린다는 말을 듣고 있죠."

쑥부쟁이, 관객들을 '찾아가다'

▲ 쑥부쟁이는 열한명의 동생과 홀어머니를 먹여 살리느라 쉴 틈이 없다.
ⓒ 명랑씨어터 수박
3월부터 본격적으로 <쑥부쟁이>를 준비하면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명랑씨어터 수박'이라는 극단도 만들었다.

"처음엔 30분 분량의 소극이었는데 춤과 음악도 넣고 한국적 형식도 따오고 해서 굉장히 풍부해졌죠."

그 사이 탈춤 등의 몸짓 워크숍과 판소리 워크숍을 받았다. 특히 지난 7월에는 단원들과 함께 고성까지 가서 무형문화재 선생님들로부터 오광대를 배우기도 했단다.

"단순한 기교로는 흉내낼 수 없는 위엄과 예술혼을 가진 분들이죠.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요."

올해에는 문화관광부가 후원하는 '찾아가는 문화행사'로 선정되어 익산, 합천 등 9개 도시 순회공연을 다녔다.

"정신지체장애인 재활원을 간 때가 많이 기억나요. 비장애인들은 우리가 예측한 타이밍에 웃고 멈춰요. 장애인들은 예측이 불가능하죠. 공연 내내 손뼉을 치세요. 박자도 안 맞게. 그게 실은 연기에 방해가 되는데도 좋았어요. 자신의 흥을 나름대로 표현하는 것이니까요. 공연을 하다보면 눈물이 글썽글썽해져요,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그런 모습이."

어느 학교에서 했던 공연도 기억에 남는다.

"이른바 문제아들만 모아놓은 학교였는데 아이들이 워낙 말이 없어서 긴장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점차 극이 진행될수록 애들이 집중하는 게 느껴졌어요. 끝나고 나가면서 한 학생이 '연극이나 해볼까, 재밌겠다' 그랬대요. 그럴 때 보람 느끼죠."

끊임없이 묻는다, 너는 왜 여기 있느냐고

유경씨는 지난 시간을 시종일관 밝은 목소리로 회상했지만 고된 순간이 그라고 왜 없겠는가.

"내가 들이는 노력과 시간에 비하면 돌아오는 것은 거의 '무(無)'에요. 연기를 통해 정기적인 수입을 버는 배우들이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 아르바이트를 겸하죠. 개인 레슨을 하거나 저처럼 청소년 수련원에서 연기를 가르치거나. 우리끼리 연습하다 우스갯소리처럼 그러죠, '자 이제 돈은 어디서 벌지?'

그만두려는 생각도 한 적 있어요. 배우가 되기 위해 해야할 것, 갖추어야 할 것이 너무 많은 거예요. 나는 이렇게 부족한데. 불안하고 두려워지는 거죠."

▲ 장유경씨는 사소한 질문 하나도 오래 생각하고 곱씹듯 천천히 말했다. 또 다른 '쑥부쟁이'의 모습이다.
ⓒ 송민성
그럴 때마다 유경씨는 자신만의 마인드 컨트롤을 시도한다.

"너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거냐고 물어봐요. 공부하기 귀찮을 때, 연습하기 싫을 때. 내가 선택한 길이 힘들 수 있지만 탈출구를 먼저 찾으면 뭘 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이걸 그만두면 나는 행복할까 떠올려봐요.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늘 내가 나를 이기는 수밖에 없어요."

연기 경력은 그리 길지 않지만 유경씨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무대에서 그리고 삶에서 자신을 일으켜줄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관객들이죠.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는 거잖아요. 관객들이 나를 주시하고 내가 기대한 반응을 보여줄 때, 그만큼 짜릿한 일도 없을 거예요.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거죠."

-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사랑할 줄 아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배우라는 삶 자체가 다른 사람의 속으로 들어가는 건데, 그 배우의 색깔과 그 역할의 색깔이 더해져 인물이 만들어지잖아요. 아무리 연기를 잘 해도 인간미가 없으면 매력이 없더라고요. 춤도 배우고 목소리도 더 가다듬어야겠고요."

당장 짜여진 일정도 만만치 않다. 오는 10월에는 <쑥부쟁이> 제주도 순회공연이 있다. 2004 실학축전의 행사로 공연될 <열혈여자 빙허각>의 무대 감독도 맡았다.

연기를 하면서 '누구보다 잘할 수는 없겠지만 누구보다 못할 수는 없다'고 결심했다는 유경씨의 눈빛이 언제나 연극과 관객에 대한 열정으로 빛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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