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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도로 옆에 있는 황 할머니의 초가.
강화 도로 옆에 있는 황 할머니의 초가. ⓒ 김진이

"지나가다 들어와 초가집이라고 사진 좀 찍자고 해요. 어떤 사람은 안에도 좀 찍자고 그러고, 또 어떤 사람은 말도 않고 나를 짐승맨키로(처럼) 생각하는지 마구 사진을 찍어대서, 내가 가라고 하면 인심 야박하다고 막 해요. 생각을 해봐요. 그럼 내가 그러지. 이렇게 하구 살 때는 오죽하면 그러겠냐고. 어여 가시라고. 그제서야 미안하다고 하고 가지."

강화 중앙대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면 화도면이 나온다. 그 길가에 자리한 초가 한 채. 아무 생각 없이 지났다면 나라도 사진 한 장 찍자고 덤볐을 것이다. 주인 할머니의 푸념에 가만히 얼굴이 뜨거워진다.

금세 쓰러질 것 같은 초가는 진흙 사이사이로 기둥을 세운 나무들이 드러나 있다. 지붕에는 짚이 삭아 군데군데 무너져있다. 3평이나 될까. 나무를 때는 아궁이와 가스레인지 하나가 있는 부엌과, 장정은 절대 들어갈 수 없는 작은 방이 이 집의 전부다. 화장실은 방 안쪽에 놓인 요강이 대신하고 수도도 집 밖에 있다.

50년 된 초가에 30년째 살아

황영희 할머니
황영희 할머니 ⓒ 김진이
화려한 전원주택에 요사스런 카페, 식당들까지 곳곳에 늘어서 있는 강화에서 초가의 풍경은 오히려 너무 낯설다. 지은 지 50년이 되었다는 이 초가에는 황영희(75) 할머니가 30년째 살고 있었다.

"이 집은 50년 됐어. 그때 피난 나온 사람들이 이 일대에 다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그 때 지은 거야. 나는 30년 살았지. 내 원 고향은 강화군 교동인데 남편이 죽고 살림이 다 박살이 났어. 여기 와서 포구에서 물건 받아다 팔면서 애들 키우고 했지. 30년 전 3만원을 주고 샀어. 건물 값만 주고 산 거지. 땅은 안 동네 김서방네 종중 땅이야."

포구에서 꽃게, 새우, 밴댕이 같은 걸 받아다 40리씩 걷는 곳까지 가서 팔아다 자식들을 가르쳤다. 자식 넷을 다 인천, 서울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게 했으니 할머니의 세월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자식들은 다 어디에 갔을까? 아들 둘에 딸 둘, 4남매를 두었으나 다들 도움을 줄 수 없는 형편이란다.

"작은 아들은 떠댕기면서 돈벌이 했는데 전과 13범이라는 깡패한테 칼에 찔려 일도 못하게 됐지. 지금은 연락도 끊어지고 어디에 사는지도 몰라요. 큰아들은 의정부에 사는데 사람 자체가 못된 것이 아닌데 돈을 못 벌어. 7년 전부터 웬일인지 정신이 오락가락 해서 의정부 정신병원에 넣었지. 나랑 지 처랑 돈을 댔는데 결국 병원비가 없어 도로 끄집어냈어. 며느리는 애들 데리고 친정 가고 큰아들은 자취를 감췄어.… 내가 눈물을 흘린 게 강을 이뤘을 것이여."

딸들도 시집가서 사는데 다들 자기 집도 없이 어렵게 산다고. 말문이 터진 할머니의 살아온 세월이 봇물이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내가 강화 교동 황씨네 최고 종갓집에서 났어. 손이 모자라 친정아버님이 나를 아들 보듯이 했지. 우리 집이 얼마나 부잣집이었냐면 결혼식 때 일하는 사람인 '하님'이랑 소잡고 돼지 잡는 사람은 1년 내 항시 두었어요.

그런데 왜정 때 처녀 공출한다고 해서 잘못 시집을 보낸 거지. 사위를 3년을 데려다 가르치고 땅을 1만평을 해줬어요. 1만평 땅 해주면서 우리 아버지가 사위한테 당신 자식 고생시키지 말라고 당부를 했지. 우리 딸은 검부락지(검불) 하나 만지지 않은 애라고."

그렇게 많은 땅을 시동생이 다 날리고 남편은 울화병에 걸려 죽었다. 형이 죽자 시동생은 살고있던 집까지 내놓으라고 해서 할머니는 입던 옷 하나만 가지고 이곳으로 왔다.

초가집 안쪽.
초가집 안쪽. ⓒ 김진이
'고무 다라이(함지)'를 500원 주고 사서 포구에서 생선을 받아다 팔았다. 호미도 없이 남의 집 사기 깨진 걸 주워다 초가에 흘러내린 흙을 덧발라 집 꼴을 만들었다. 행상을 다니며 일도 많고 눈물도 많이 흘렸다. 할머니는 그때 기억나는 일을 하나 들려주었다.

"선원리라는 곳에 부잣집 할아버지가 자꾸 나한테 성명을 대라고 해. 나는 안 댔지. 우리 아버지가 교동의 황인영씨라고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유지였거든. 그게 창피해서 그랬지. 그 할아버지가 밴댕이를 좋아하셔서 내가 포를 잘 떠서 항상 그 집 우물 두레박에 잘 넣어드리곤 했거든. 그때는 냉장고가 없었으니까.

가을에 내 이름을 물었는데 봄에까지 안 가르쳐드렸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됐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일러드렸더니 이 할아버지가 이북에서 당신이 교감할 때 우리 아버지가 교장이셨다는 거야. 나를 붙잡고 얼마나 우시는지. 그러고는 바로 돌아가셨지."

자식들 다 키워서 시집장가 보내고 나서도 할머니는 혼자 이곳에서 사셨다. 그래도 음식점에 나가 혼자서 3명 몫을 해내는 실력으로 회를 떠서 한 달에 1백만원 벌이는 쉽게 하셨단다. 2년에 한 번씩 올려야 하는 초가도 4년 전까지는 별 어려움 없이 새로 엮어 올리고 했다. 그런데 3년 전 바로 앞 도로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취로사업 갔다가 미나리를 했는데 4관에 조금 모자라. 그걸 채우려고 다시 미나리를 하러가다가 자가용에 치었는데 허리뼈가 네 조각이 났어."

병원에서는 걷지도 못한다고 했는데 할머니는 기도 덕분으로 일어서게 됐단다. 그러나 물리치료 받느라 돈은 다 들어가고 초가도 새로 올리지도 못했다. 게다가 아들 둘이 다 병원을 드나들다 연락이 끊겼으니, 주머니 돈이 자식들에게도 들어간 모양이다.

요즘엔 초가를 하는 집이 없어 사람 구하기도 쉽지 않고 기계로 벼를 베기 때문에 짚도 비싸게 사야한다. 초가 한 번 올리는데 드는 비용은 1백만원 정도. 일주일이나 걸린다.

"예전에는 내가 했지. 일주일동안 짚 얻어다가 새끼 꼬고 이엉 엮어서 올릴 때만 사람을 불렀는데. 짚만 500뭍(단) 가져야 하고 엄두가 안나 이렇게 줄줄 흘러내리지."

작은 컨테이너 박스 하나가 소원인 할머니

무너져 내릴 듯한 천정 모습.
무너져 내릴 듯한 천정 모습. ⓒ 김진이
올해 여름 비왔을 때는 방 옆의 진흙이 무너져 할머니가 벽돌을 가져다 새로 발랐다. 이렇게 사는 할머니를 보고 다들 안타까워 하지만 그때뿐이다.

면사무소, 군청에서 다 사람이 왔다갔지만 "위험하게 도로변에 왜 이렇게 사시냐"는 얘기만 들었다. 낡은 집을 다시 지어주기도 하지만 나중에라도 갚을 능력이 있어야 한다며 할머니는 해당이 안 된다고.

방송사의 집 지어주는 프로그램에 누가 연락을 해주기도 했다. 역시 땅이 당신의 소유가 아니어서 안 된다는 답을 들었다.

"내 소원이요? 별거 없어요. 초가 새로 얹어도 2년마다 해야하니까 여기다가 작은 컨테이너 박스라도 하나 갖다놓고 죽을 때까지 살았으면 해요. 그래서 땅주인인 종중에 나 죽을 때까지만 살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있는데, 요 앞 도로 때문에 자꾸 팔려고 하나봐요."

작은 컨테이너 박스 하나가 소원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식들이 있다는 이유로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에도 해당이 되지 않고, 나이가 많아 취로사업에도 나갈 수 없고, 융자를 갚을 능력이 없어 군에서 새로 집 지어주는 대상도 안되고. 도대체 할머니에게 해당되는 도움은 무얼까.

도움이 될만한 아무런 얘기도 드리지 못했는데 할머니는 그저 연신 "고맙다"며 배웅을 했다. 식사 대접을 못한 것이 너무 미안하고, 자신이 너무 푸념만 늘어놓은 것 같아 또 미안하다고. 마구잡이로 사진 찍어대는 구경꾼들과 우리가 별로 다른 것 같지 않아 너무 미안하기만 했다.

ⓒ 김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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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 대안언론이 희망이라고 생각함. 엄흑한 시기, 나로부터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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