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19일) 아침부터 나가는 준비가 바빠졌다. 임금님의 제사를 보러 간다는 마음 때문에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공릉·순릉·영릉이 있는 이곳 공릉(이곳에선 공릉이라 부른다)에서는 1년에 한번 왕과 왕비의 제례를 지낸다. 오늘은 영릉의 진종(사도세자 이복형)과 효순왕후의 기신제가 있는 날이다.
왕의 제사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제물은 무엇을 올려놓는지 보고 싶었다. 임금의 제사상을 구경하는 일이 쉬운 기회는 아니다.
문화유산해설사인 강근숙씨는 영릉 기신제에서 꼭 음복주를 마셔야겠다고 며칠 전부터 벼르기도 했고 나도 기회가 있으면 어주(?)를 마셔볼 기회를 놓치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염불보다 잿밥에 더 마음이 있다더니 내가 그런 짝이다.
어제부터 제관들이 와서 준비를 했다. 현재는 문화재청 관리소지만 예전에 능참봉이 머물며 능을 관리하던 이곳 재실에 오후 5시부터 노란 보자기에 싼 축문과 노란 촛불을 양쪽에 켜고 시작했다. 왕의 색이기 때문에 황초와 노란 보자기와 노란 초롱을 쓴다. 1년에 세 능 제사 때만 딱 세 번 연다는 재실 중앙 대문도 활짝 열리고 노랑 천을 씌운 초롱이 길게 걸렸다.
예전에는 초하루와 보름, 봄, 가을, 기일에 제례를 지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왕이 친히 주관하는 제례는 무희와 악단을 동원하고 제사상의 차림새가 복잡했다. 솔직히 그 절차를 읽으면서 저 제례 한 번 치르려면 몇 시간 족히 잡아먹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그 많은 능을 일일이 왕이 다니면서 치를 수는 없는 노릇. 지난 조상들은 대개 종묘에서 지내고 능마다 제례가 있으면 초헌관(나라 제향의 초헌을 맡은 임시 벼슬)은 판서 이상 관리가 맡았고 당상관과 당하관이 참석했다. 제관으로 뽑히면 당일까지 몸가짐을 엄숙하게 하고 형벌집행이나 재판도 피했다.
일제 때까지 내려오던 능의 제례가 중단된 건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을 치르고 사회혼란을 겪는 시기였다. 나라에서 치르던 제례를 지금은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경기도지원 분원 봉향회마다 맡아 45개의 능에서 1년에 한 번 날을 잡아 지낸다. 영릉기신제는 매년 9월 19일에 있다. 진종은 추존왕이지만 다른 왕릉과 똑같은 제례를 받는다.
사가에서는 제사를 자시에 지내지만 왕과 왕비, 성씨의 시조는 불천(不天)이라 해서 대낮에 지낸다고 한다. 150여 명의 이씨 문중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홍살문으로 축문을 든 제관을 중심으로 양쪽에 노란 초롱을 든 제관이 참도를 걸어 들어오면서 기신제는 시작됐다.
활짝 문이 열린 정자각을 향해 축문을 든 제관은 신계를 걸어 올라가고 나머지 제관은 동계로 올랐다. "국", "궁" 집례가 하는 소리에 절하고 머리를 일으키고 다시 절하고 잔을 올리는 절차가 반복됐다.
카메라를 들고 슬그머니 정자각 뒤편으로 향했다. 엄숙하게 제례가 진행되는 정자각으로 올라가는 것을 제지할 듯싶었고, 제물이 진설된 왕의 제사상을 찍으려면 뒤편이 더 가까워서좋으리라 생각했다.
능의 제례엔 육류를 쓰지 않는다. 맨 앞줄에 보통약과 둘과 좀 더 큰 색약과 하나 등 약과와 백다식, 흑다식, 백산자와 홍산자가 올라간다. 둘째 줄에는 마른 밤(황율), 호두, 비자나무 열매, 잣, 대추 등 주로 견과류가 많다. 또 꿀(백청)과 찰떡을 올린다. 왕과 왕비의 수라(밥)가 두 그릇, 특이하게 삶은 국수도 올라간다.
제례가 시작되기 전 이 모든 제물은 흰 한지로 싸고 제례를 치르면서 벗긴다. 신이 들어오시라고 미리 열어뒀던 뒷문에서 사진을 열심히 찍다가 분홍색 산자(홍산자)에 눈독을 들였다. 기신제 끝나면 저걸 꼭 먹어봐야지. 핑크색 예쁜 산자가 어떤 맛일까?
"잔이 왜 이리 커?"
축문을 예감에 놓고 불사르자 제례가 거의 끝났다. 이번 기신제는 파주시분원에서 봉향했고 참석한 사람들에게 준비한 도시락을 나눠줬다. 도시락을 펼치니 분홍색 산자가 눈에 아른거려 밥을 뜰 기분이 아니다. 기껏 왕의 제사를 지내고 고작 도시락을 먹다니.
깨지락거리면서 젓갈을 뒤적이고 있다가, 제물이 있는 정자각에 가서 음복주를 먹자는 강근숙씨의 꼬임에 기꺼이 넘어가 두어 술 뜨던 도시락을 내팽개치고 달려갔다.
공릉을 관리하는 아저씨들이 상을 치우고 있다 음복주를 먹어보라고 내민다. 분홍 산자는? 일을 도우러왔던 아주머니들이 벌써 한지에 싸서 다 치우고 없다. 꿩 대신 닭이라고 음복주라도 마셔야지.
능에서 지내는 기신제에 올리는 제물은 예전엔 직접 만들었다 하나 현재는 종묘에서 지정한 곳에서 음식을 만들어 보낸다. 모든 능이 똑같다. 쌀도 청정미로 주문재배한 곳에서 거둔 햅쌀로 밥을 짓는다. 잣이나 밤, 대추 등도 엄하게 고른 신토불이만을 쓴다고 한다. 제주도 이날을 위해 손수 빚은 것을 사용했다고 한다.
임금님 젯밥을 담은 놋쇠 그릇은 엄청 크다. 알라딘 램프를 닮은 잘 닦은 노란 놋쇠 잔을 양손에 쥐고 음복주를 입에 댔다. 임금님 제사상의 술이니 건강에 좋을 거야. 이걸 아무나 먹어보겠어?
청주 비슷하면서도 노리끼리한 맑은 술은 맛이 좋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지? 보기와 달리 엄청 들어가는 잔인 줄 미처 모른 거다. 꿀꺽꿀꺽 마시다 보니 한도 없다. 중간에 숨을 돌리려고 입을 떼자, "그거 한 번에 다 마셔야 하는 거야" 소리에 진짠 줄 알고 넘어가 마저 마셨다.
술잔에서 입을 떼는 순간, 머리가 팽 돈다. 알고 보니 꽉 채우면 무려 3홉이 들어가는 잔이란다. 미련하게 왕의 술잔으로 마신다는 허영심과 음복주 욕심에 정신 팔려 아저씨들이 놀리는 것도 모른 것이다.
바보 꼴이 된 나를 보며 웃던 오씨 아저씨가 놋쇠종지에 담긴 꿀을 주며 이건 진짜 토종꿀이고 좋은 꿀이니 먹으라는 바람에 안주 삼아 꿀을 절반씩 근숙씨와 나눠 마셨다. 어주에 꿀이라.
자리로 돌아와 도시락을 다시 먹으려니 하도 배가 불러서 먹을 생각이 없어졌다. 곳곳에 한지에 싼 떡과 흑임자, 약과, 분홍 산자가 놓여 있다. 제상에 있을 때는 그리 예뻐 보이던 산자가 막상 대하니 평범한 산자로 보여 먹을 생각이 싹 가신다. 이래서 젯밥에 눈이 어두우면 벌을 받는다.
독하지 않은 술이라 취하지는 않았지만 왕의 잔으로 마신 욕심 탓에 배가 불러 종일 속이 거북했다. 왕의 것이라고 술이나 음식에 무조건 탐낼 일이 아니다. 그래도 건강에 좋을지 누가 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