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68년에 <인간> 1집으로 시작해 <인간> 시리즈를 12집까지 냈다. 그의 주제는 '인간'이다. 지난해 말 국가인권위가 연 인권사진전 <눈·밖에·나다>에서도 가난과 소외를 주제로 했듯이 그의 사진은 오롯이 가난하고 소외받은 서민들의 삶에 바쳐졌다. 젊은 날 카메라를 잡으면서부터 그의 시선은 바로 그들에게 꽂혔다.
"내 눈은 항상 그들을 향해 있지요. 가난한 사람들, 지울 수 없는 얼굴입니다."
최 선생의 사진 속에는 가난해서 웃는 사람, 가난해도 웃는 사람, 웃어서 가난해진 사람들이 있다. 지게꾼들의 이야기꽃, 망치를 어깨에 올린 막노동자의 고단한 응시, 국수를 말아 올리는 길가의 아이들, 동냥하는 늙은 거지 등 남루한 삶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 사진들이 아니면 사람들은 그냥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말 대상들이다. 하지만 최선생의 사진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한다. 당신은 이들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원하는 것은 이들에 대한 동정심이 아닙니다. 가난한 소녀의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내적인 고통에 직면한 이들의 모습을 통해 삶의 존엄성을, 우리의 의식을 일깨우자는 것이지요."
'인간'을 주제로 한 끈질기고 치열한 사진작업은 한마디로 가지지 못해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과 함께 하자는 외침이다. 같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는 되묻고 있다. 그야말로 아주 일찍부터 인권을 얘기해 온 인권운동가인 셈이다.
"사진은 왜 찍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떻게 찍느냐의 문제가 아니지요."
'인간'에 접근하려는 그의 목표는 처음부터 매우 야심차고 거시적인 것이었다. 동시대에 함께 호흡하고 있는 '인간' 전체를 사진에 담으려 하는 그는 자신의 사진이 역사적 증언으로 기록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거짓말 안 해요. 있는 그대로 찍지요. 사진은 사실적, 현실적, 현장감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투철한 역사의식이 사진에 있다고 그는 자부한다. 그의 다큐멘터리 사진 정신은 그 맥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유진 스미스, 베르너 비숍, 도로시아 랭에 닿는다. 모두 사실주의에 입각해 인간이 처한 현실을 누구보다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본 사진가들이다. 휴머니즘을 내건 사진으로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고발하여 사회적 양심을 일깨우고자 했던 선배들의 뜻을 최 선생은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그는 서민들의 어려운 삶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때 자신을 찍는 기분이 든단다.
"사진은 적당히 이뤄지는 게 아니지요. 예술은 쓰라린 체험입니다. 내 어릴 적 경험을 떠올려 보면 자연히 감정이 잡히지요. 그런데 요즘 학생들에게 말해 주면 어떻게 모든 경험을 해볼 수 있겠냐며 선배들의 가르침을 지루해해요."
"거지 사진만 찍어 나라 망신시킨다"
황해도 연안이 고향인 그는 처음에는 그림에 관심이 있었다. 화가가 되고자 일본으로 밀항하여 그림공부를 하다가 어느 날 사진에 빠진 것이다. 에드워드 스타이켄의 <인간가족>이라는 사진집이 그를 붙잡았다. 7명의 사진작가가 세계 각국의 사진을 편집하여 만든 이 사진집은 당시로서는 고전이었다. 그는 지금도 이 사진집을 꼭 안고 산다.
"동경시내 헌책방에서 우연히 사진집을 보았는데 마치 감전된 것 같았어요. 그후 이날 이때까지 단 하루도 사진을 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어요. 사진은 내게 생명이에요. 사진이 내게 가져다준 게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나의 사진은 가치 있는 사진, 힘 있는 사진이길 원해요."
그의 사진공부는 순전히 독학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에서 귀국하여 생계를 위해 잠깐 다른 일도 했지만 곧 사진에 전념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사진이 그에게는 종교 이상의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사진 때문에 그 자신이나 가족의 삶이 힘겹고 고달팠다는 말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은 것은 1960년대. 거리에는 거지와 같은 모습의 사람들이 넘쳐나던 시대였다. 파인더 안으로 그들을 완전하게 감싸안는 이 사진가가 당시 독재정권의 눈에 곱게 보였을 리 만무하다.
"잡혀가는 일도 허다했지. 나더러 거지 사진만 찍어서 나라 망신시킨다고 그러는 거야."
사실 그의 사진은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았다. 사진을 공부한 지 딱 10년만의 일이다. 1967년 영국 <사진연감>에 사진이 실리면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스타 사진가'라고 불렀다. 빛의 명암을 이용한 그의 사진을 보고 '카메라의 렘브란트'라는 말도 붙여졌다. 미국, 독일, 일본 등의 연감뿐만 아니라 세계 유수한 사진잡지에 작품이 실리면서 그는 바야흐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사진의 주제 때문에 독재정권에 밉상을 보인지라 주인 없이 사진만 해외전시회로 보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뒤에 세월이 좋아지면서 비로소 사진과 주인은 온 세상을 함께 주유할 수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시대였어도 찍는 자유는 어쩌지 못했지요. 표현의 자유는 없었어도 나를 막을 수는 없었지요."
'카메라의 렘브란트'와 '자갈치 아저씨'
부산에 사는 그는 자갈치 아저씨로 불리기도 한다. 자갈치시장 사람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카메라로 기록해 오면서 붙은 별명이다. 장성한 자녀들이 출가한 집에는 포도넝쿨이 드리워져 있었다. 사진에만 몰두한 삶을 증명하듯 집의 살림살이는 검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그의 서재는 여전히 가장 풍성한 곳이었다. 사무실을 겸해 쓰는 방에는 벽면이 모자랄 정도로 책과 음반과 사진집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얼마 전에 대학에다 책을 기증했는데도 아직 이렇군요. 책을 읽어야 사진을 연구할 수 있는 겁니다. 사회학, 인간학, 문학이 모두 나의 장르예요. 책을 읽지 않으면 무식한 사진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 만 권의 책을 읽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 독서는 순전히 좋은 사진을 내기 위한 것이지요."
그는 거의 인공조명을 쓰지 않는다. 자연광을 이용해서 스냅 사진을 찍는다. 그는 스냅 예찬론자다. 그의 사진 중 98%가 모두 연출하지 않은 스냅 사진이다. 하품하는 할머니, 좌판에서 한술을 막 뜨려는 아지매, 구석에서 젖을 물리는 엄마, 말끔하고 안정된 스튜디오보다 그는 거친 현장을 사랑한다. 욕을 얻어먹는 경우는 다반사다. 그 옛날에는 '수상한 사람'으로 신고도 숱하게 당했다.
"끝까지 따라와서 필름을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카메라가 박살난 적도 있지요. 요즘은 스냅 찍기가 더 어려워졌어요. 초상권 침해라고 해서 전시회나 사진집에 나와도 문제가 되기도 하니까…."
내년 5월쯤에는 사진집 <낙동강>을 펴낼 예정이다. 이번에는 환경문제를 다룬 사진이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의 사진작가 최민식은 사진에 관한 한 아직도 짱짱한 젊은이다. 그는 고백한다.
"나는 이대로 행복합니다. 사진이 있으니까."
그가 평생 추구해 온 '인간'의 모습, 운명과 대결하여 승리하고만 그 모습이 바로 그의 얼굴 안에서 빛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