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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자 씩씩하게 대한 소년아 태극기 높이 들고 앞장을 서서
우리들은 용감한 대한에 아들 딸 무찌르고 말테야 붉은 무리들.”
이 노래는 초등학교 5~6학년 때 배운 <대한의 아들>이다. 약 20여 년 전의 노래 가사(그것도 널리 알려진 동요가 아닌)를 정확하게 기억할 정도라면 이 노래를 부르며 지낸 내 유년 시절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한때 75년생들이 ‘대포세대(대한민국이 포기한 세대)’ 불려진 적이 있다. 93년 대입학력고사가 수학능력시험으로 바뀌면서 수능시험을 두 번 치러야 했다. 또한 남자들의 경우 방위제도가 사라지면서 방위에 해당하는 이들은 상근예비역 제도를 신설하여 현역복무를 최소 1년 이상 경험해야 했다. 또 대학 졸업을 앞둔 시점부터 IMF 경제위기로 인한 취업난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다른 세대들도 75년생 이상으로 한국현대사의 굴곡과 아픔을 겪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75년생들이 ‘대포세대’라고 불릴 정도라면 또 다른 측면의 문제들이 내재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글을 시작하면서 <대한의 아들>이란 노래 가사를 소개한 이유는 ‘또 다른 측면’에 대해 필자 나름의 의견을 말하고자 한다.
75년생들은 치밀한 반공교육으로 사고가 경직되어 있고, 반공이데올로기가 심각하다고 말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일까?
나의 초등학교 시절 가을운동회마다 빠지지 않았던 종목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허수아비에 불을 지르거나 몽둥이로 허수아비를 때리는 경기였다. 뚱뚱한 외형에 빨간색 모자를 쓴 모습을 한 허수아비는 누구라고 딱 꼬집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경기를 지켜보는 모든 관중들은 그 대상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매년 한 두 차례씩 있었던 대간첩작전 모의훈련(정확한 훈련명칭은 기억나지 않는다).
서산의 한 시골마을에서 성장한 우리는 여름이 되면 담임선생님에게 특별 지시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수상한 사람이 다가와서 이상한 인쇄물을 나눠주거나 군부대 등을 물으면 지서에 신고해라”는 것이었다. 또한 마을마다 훈련 상황에 동원된 동네 아저씨들은 허름한 참호N 속에서 간첩을 잡겠다고 날밤을 보내야 했다.
그 때마다 나는 아버지에게 “정말 간첩이 나타난 건가요?”라고 물으며 불안해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진짜 간첩은 아니고 그냥 훈련이야”라고 설명해 주셨지만 나는 마치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을법한 ‘훈련용 간첩’ 때문에 여름밤을 공포에 떨어야 했다. 물론 훈련기간이 끝나고 학생들 중 신고한 친구가 있으면 교장 선생님에게 그럴싸한 상장과 상품을 받게 되었다.
매년 6월마다 있었던 반공웅변대회, 반공글짓기대회, 반공표어, 반공포스터….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에 대한 기억은 온통 ‘반공’으로 붉게 물들은 듯 하다.
하물며 캄보디아 내란을 취재하던 <타임즈>지의 특파원 기자 시드니 쉴버그(Sydney Schanberg)와 공산화된 캄보디아에 홀로 남겨진 친구 디스 프란(Dith Pran)과의 인종과 국경을 뛰어넘는 우정을 감동적으로 그린, 84년 아카데미 촬영, 편집, 남우조연상 등 3개 부문을 휩쓴 <킬링필드>라는 영화는 그저 반공교육용으로 상영된 영화에 불과했다.
83년 1월 9일의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 1987년 11월 29일의 KAL기 폭파사건(아직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하지만) 등은 반공교육의 좋은 사례로 여겨졌고, 우리들은 어느새 ‘대한의 아들 딸’로 만들어져 갔다.
94년 대학 신입생 시절, 김일성이 사망하고 그에 이은 ‘주사파’ 파동 등은 조용하던 캠퍼스를 다시 뜨겁게 달궜다. 철학과 모 교수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배령이 떨어졌고, 나라 전체는 ‘주사파’와 ‘한총련’ 논란에 휩싸였다.
이런 상황들은 반공교육에 익숙해진 필자의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기에 충분했다. 또 다시 10년이 흐른 지금, 한국사회는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고 정주영 회장이 소 때를 끌고 휴전선을 넘었고,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고, 역사적인 남ㆍ북 정상회담 및 6ㆍ15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이제 더 이상 가을 운동회에서 김일성 허수아비가 등장하지 않고,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반공’이라는 용어도 사라졌다.
그런 상황에서 ‘국가보안법’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법에 대한 전문가가 아닌지라 법리적인 문제에 대해선 왈가왈부할 처지가 못 된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이 마치 성경말씀이라도 된 듯 “한 구절이라도 삭제될 수 없다”는 보수 세력들(?)의 주장은 답답하기만 하다.
그들에겐 국가보안법이 마치 국보(國寶)법이라도 되는 것 같다.
지난 금요일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한 한나라당 모 의원은 국가보안법의 존속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만약, 동해안에 간첩이 나타났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는 모습을 보았다. 아무래도 그 의원은 군복무를 안 했거나 아니면 짧게(?)했을 거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전방이나 해안초소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이 국가보안법을 읽으며 그 법률대로 보초를 선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에게는 교전수칙, 즉각 조치 등 나름의 상황대응에 대한 수칙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고, 그것은 국가보안법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나라를 지켜야할 군인의 신분이기 때문에 그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국보(國寶)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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