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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월남은 공산화되었고 그곳을 탈출했던 수많은 보트 피플이 한국에 몰려와 부산에 임시 거처까지 만든 적이 있었다. 당시 엄마는 보트피플에 대한 TV 보도를 유심히 보며 피난 나왔을지도 모를 그 아이들을 찾는다며 아버지와 함께 월남에 갔던 친구분께 수소문을 부탁하며 수없이 쫓아다니셨다.
이후 나의 엄마는 치매로 정신을 놓은 상태에서도 그애들을 찾아야 한다는 말을 몇 번씩 되뇌인 적이 있었다. 도대체 남편의 핏줄이 무엇이길래 당신을 배신하고 다른 여자랑 살림을 차려 십여 년씩이나 살았던 남편의 자식들을 찾겠다고 당신이 쫓아다니기까지 하다니….
아버지가 월남에 있는 동안 소위 '딴살림'을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와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할 무렵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날 영어로 주소가 씌어진 국제 우편 봉투가 집으로 날아 들었고 엄마는 직감이 있었던지 그것을 몰래 뜯어 본 것이다. 몇 장의 사진과 함께 꼬부랑 글씨로 씌어진 편지를 큰언니와 함께 종로에서 해석을 해 온 후 엄마는 몸져 드러누워 버렸다.
중학생이었던 내가 그때의 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 정도로 엄마와 자식들에 대한 아버지의 배신으로 우리 가족은 충격을 받았다.
'당신이 몹시 보고 싶다'고 아이들도 아버지를 그리워한다는 내용이 담겼다는 그 편지에는 사진 석 장이 들어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예뻤다. 여자는 엄마보다는 젊은 나이였는데 전 남편 소생의 아이들과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과 아들까지 자식이 모두 네명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엄마도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아버지가 보내준 월급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적었다. 십여 년 동안 휴가를 나오지 않았던 것 또한 휴가비마저 아껴가며 '독하게 돈을 모으려는' 강한 생활력이 아닌 두집살이를 하였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에 엄마의 배신감은 더욱 컸으리라.
아버지는 귀국 후 얼마간의 휴식 끝에 사업을 한다고 이런 저런 일을 벌이다가 결국에 돈을 다 날리고 몸은 서서히 나빠져 갔다. 아버지는 당뇨병으로 황달에 폐병까지 겹쳐 병원신세를 지다 결국 자리보존을 하더니 월남의 아이들의 이름을 한번도 불러보지 못한 채 쉰세살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내가 인생에 대한 이해를 조금은 할 수 있는 중년의 나이가 되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예쁜짓을 하던 서너 살의 아이들을 떼어놓고 왔을 아버지의 시린 가슴이 느껴지는 듯하다. 돌아가시기 전 숨쉴 힘도 없는 가여운 모습이었던 아버지는 그 아이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가슴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
월남의 토끼같은 자식들은 멀리 떨어져 볼 수도 없고, 십여 년이란 긴 시간의 벽을 쌓은 이곳의 자식들과는 서먹하기만 했던 아버지가 참으로 외로웠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또, 엄마의 삶은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많은 인생'이란 말이 떠오를 정도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술을 좋아하는 한량으로 살던 남편의 뒷바라지로 젊은 시절을 다 보낸 엄마는 아버지가 월남에서 다른 여자와 아이 낳고 알콩달콩하게 살고 있는 줄도 모르고 10여년의 세월을 여섯 아이들을 홀로 키우며 살아야 했다.
전쟁터인 월남에서 이미 쇠약한 몸으로 돌아온 남편은 함께 살아볼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몸져 누워버렸다. 이후 병수발로 또 몇 년을 보내야 했던 엄마의 삶은 청상 과부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게 외롭게 한평생을 살고 노년에는 치매까지 걸린 엄마의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난 눈물이 난다. 평생 남편의 사랑이라고는 받아 본 적이 없는 불쌍한 나의 엄마 - 혼자만이 겪었을 그녀의 고통과 외로움은 어떤 색깔이었을까? 인생을 모두 살고 난 지금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어떠했다고 말하고 싶을까?
또 베트남에서 혼자 아이들을 키웠을 그 여성의 삶 또한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리라. 아이들을 두고는 홀연히 한국으로 떠나 수십 년동안 연락 한번 없는 남자를 기다리며 혼자 아이들을 키웠을 그 여성의 기구한 삶 또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 돈을 벌러 월남에 갔던 그 시대의 한국 남자들에게 더 먹고살기 힘들었던 전쟁터의 여성들은 먹을 것과 자신들의 인생을 바꿨을지도 모른다.
두해전 내가 중국에 잠시 갔을 때 보았던 많은 한국 남성들은 그곳에서 '현지처'와 살고 있었다. 가족과 온 남성들의 경우도 '젊고 예쁜 중국 애인'을 하나씩 두고 있는 경우를 보기도 하고 또 많은 사례를 듣기도 하였다.
한국말을 조금 할 줄 아는 중국 여성들은 통역은 물론 현지의 사업을 보조해 주는 직원이 되기도 하고 사업 터전을 잡아주는 거간꾼에 중국어 가정교사 역할까지 일인 다역을 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집안 살림을 돌보아 줄 가정부로 그리고 밤에는 외로움을 달래줄 여성으로 얼마간의 돈만으로 일거다득의 효과를 누리고 있는 한국 남성들을 보며 난 우울했다.
어쩌면 나의 아버지도 중국에서 보았던 부끄러운 한국 남성들과 마찬가지 생각으로 월남의 그 여인을 만났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은 당시 나의 마음을 무척이나 혼란스럽게 했다.
엄마에 대한 배신보다 더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은 사랑 아닌 필요에 의한 만남이었을지도 모를 아버지와 그 베트남 여성과의 관계였다.
어쩌면 그러한 고민이 '아버지의 아이들'을 찾으려는 나의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들이 자신들의 아버지가 비정한 한국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을 몹시 그리워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엄마 역시 그런 이유로 그들을 찾으려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한국 이름이 적힌 어릴 적 사진을 가지고 있어 지금이라도 베트남 대사관에 연락을 하면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난 아직 그들을 찾으려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여자 혼자 그 많던 아이들을 제대로 공부시켜 키웠을 리 없었을 것이며 라이따이한으로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함께 힘겹게 살아 왔을 그들의 사는 형편이 그다지 좋을 것 같지 않을 터이다.
그러한 그들을 만난다면 내가 작은 도움이라도 주어야 하는 의무감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가신지 오래되었고 엄마도 정신을 놓아 내가 돌보고 있는 지금 그들을 찾아 내가 또 하나의 짐을 지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그들을 찾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엄마가 안쓰고 안먹으며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날리고 술로 지새우던 모습, 몸져 누워 병든 몸으로 기침과 가래를 수없이 내뱉으며 끝내 미이라처럼 말라 돌아가신 모습만이 떠오른다.
하지만 나에겐 예쁜 사진처럼 아버지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도 있다. 어느 날엔가 학교에 가는 나의 머리를 곱게 빗어 묶어주던 아버지 -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의 따스한 손길과 사랑을 느꼈던 그 짧은 순간을 나는 지금껏 잊을 수가 없다.
바로 그 한 순간이 내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유일한 기억일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헤어져야 했던 베트남의 아이들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한없이 미안해진다.
이렇게 아버지가 남긴 숙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빚으로 짊어지고 있는 나는 그런 숙제를 남겨놓은 아버지가 야속하기만 하다.
베트남에서든 중국에서든 다시는 이러한 시대의 불행을 겪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