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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표지
시집 표지 ⓒ 문학과 지성사
작품 속에 들어가면 마치 정육점에서 날카로운 칼에 붉은 피를 쏟아내면서 잘리는 고기 덩어리, 응급실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환자, 그리고 짙은 화장에 마치 본연의 얼굴을 잊어버린 거리의 여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원색으로 도배된 짙은 유화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거미는 다각형의 착시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거대한 엉덩이가 샌드위치를 삼키고
웅덩이를 핥던 개는 슬픈 트림을 했다
김을 뿜는 지하철 환기통 위에 잠든 부랑아
구름에 총구멍이 슝슝 뚫리고 가는 비가 내린다
우아하게 달려오는 자동차마다
낯설고 행복한 먼지의 거실, 성탄의 전나무
一群의 행인들이 도형수처럼 횡단보도를 건널 때
가로등은 필라멘트를 드러내며 천천히 달아오르고
천사가 늙은이를 벼랑으로 떠민다
(중략)
거미는 세계의 저쪽 편으로 빠져나와
이제, 영영 돼지를 만나지 못한다
(p18 겨울비)

이질적이고 낯선 단어들이 서로 조합되어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의미 상실을 초래하고 있다. 이는 단적으로 우리 삶의 해체와 깊숙이 타자화 돼버린 우리 삶의 파편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미는 세계의 저쪽으로 빠져 나와 이제는 그것의 또 다른 모습인 돼지를 영영 만나지 못하는 단절된 세계의 모습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곱추 여자가 빗자루 몽둥이를 바싹 쥐고
절름발이 남편의 못 쓰는 다리를 후리고 있다
나가 뒈져, 이 씨앙-놈의 새끼야
이런 비엉-신이 육갑 떨구 자빠졌네
만취한 그 남자
흙 묻은 목발을 들어 여자의 흰 등을 친다
부부는 서로를 오래 때리다
무너져 서럽게도 운다
아침에 그 여자 들쳐 업고 약수 뜨러 나고
저녁이면 가늘고 짧은 다리 수고했다 주물러도
돌아서 미어지며 눈물이 번지는 인생
붉은 눈을 서로 피하며
멍을 핥아줄 저 상처들을
목발로 몽둥이로 후려치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얼마나 어렵고 독한 것인가?
(p71 사랑)

이 시집 전체에서 유일하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나마 우리의 보편적인 정서에 기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서정시에서는 볼 수 없는 극단적이고 기형적인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극단적이고 기형적이기에 더 애처롭고 슬픈 우리 사회의 파편화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旣生現實에서는 서유기라는 제목으로 연작시가 등장한다. 서유기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일당이 구도의 길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인데, 일반적으로 우리 삶에서 구도의 길을 찾아 떠날 때 많이 인용되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도 그런 부분을 반영하고 있다.

책의 한 귀퉁이, 도서관에서는 늘 한 권의 책만을 읽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건 ‘창백한 불꽃’이건, 한 권의 책은 이들에게 기적이었다. 책-기적은 두툼하고, 먼지 냄새를 짙게 풍기며, 서가의 어딘가에 꽂혀 있는, 평범하고 구체적인 사물일 뿐이다. 사물-그러나-그리하여-기적! 오직 한 권의 책만을 읽는 사람들이 책을 펼 때 진부하게도, 책은 백지다. 믿을 수는 없지만……자신의 손으로 문자의 길을 내어, 그 門을 나간 자들이 제법 있다는 풍문을 들었다. (p102 서유기 3 -도서관-)

작가는 마지막 부분에서 부정적이고 절망적이고,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말의 모습을 서유기라는 일련의 작품을 통해 조금씩, 그리고 조심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책을 통해 뭔가 삶의 다른 이면을 찾아가려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시는 완전하게 그 의미를 드러내면서 읽히기 힘든 면모를 가진 갈래이다. 특히 초현실주의 시나 해체시, 나아가서 무의미시는 의미 대신 시의 형식적 면모에 치중하는 경우도 많다. 이 작품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계열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의 열정과 힘이 그대로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때론 난해한 상징성이 의외로 쉽게 다가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공포와 엽기로 가득한 시인의 작품들의 틈에서 그와 같은 서정성과 시대적 아픔을 읽어 낼 수 있다면 이 가을에 미술관에서 형형색색의 원색 유화를 한 편 보러가는 수고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미는 이제 영영 돼지를 만나지 못한다

김중 지음, 문학과지성사(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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