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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 속에 세워진  인공섬
서호 속에 세워진 인공섬 ⓒ 김정은
느릿느릿 흘러가는 유람선에 올라타 사방을 둘러보니 여기가 바다인가 호수인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특별히 사람의 눈을 자극시킬 만한 볼거리는 없을지 모르지만 호수 위에 떠 있다 보면 옅은 안개 낀 호수의 수면 위로 호수 주위의 각양각색의 신비스러운 그림자가 마치 비밀스러운 귓속말을 내게 들려줄 듯 농밀한 느낌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였을까? 서호를 바라보면 오랫동안 고이 간직해둔 산수화 족자 한 폭을 아버지 몰래 살짝 펼쳐보았을 때 손끝에서부터 전해오던 은밀한 짜릿함이 느껴진다. 은밀한 짜릿함이라, 그런 느낌이 나만의 느낌은 아니라는 듯 서호의 탄생에는 이런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일찍이 손오공이 몰래 따먹었다는 불로장생의 영약인 천도복숭아의 주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왕모가 어느 날 천하(天河)를 지키는 옥룡과 금봉황이 가지고 있던 진귀한 구슬을 훔쳤는데 그 사실을 안 옥룡과 금봉황이 반환을 요구하자 거절했다. 이들이 구슬을 빼앗으려고 서로 옥신각신하는 동안 구슬이 지상으로 떨어져 변한 호수가 바로 서호라는 것이다.

호수 양쪽에 있는 옥룡산과 봉황산은 바로 옥룡과 금봉황이 변한 산이라는 말을 듣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신들도 남의 것을 탐하는 욕심이 있고 욕심 때문에 남의 구슬을 훔치고 서로 구슬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기까지 한다니 평상시 그처럼 세속을 초탈한 것처럼 행동하던 중국 신선들이 구름 속에서 구슬 하나를 두고 싸우는 형상을 만일 손오공이 보았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여의봉을 휘두르며 "너희들은 조그만 구슬 하나 가지고 이리 싸움질인데 고작 천도복숭아 몇 개 따먹었을 뿐인 나를 큰 도둑으로 몰 자격이 있느냐"고 호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왕모와 구슬, 천도복숭아와 손오공이 시대를 초월한 채 서로 뒤엉키면서 말도 안 되는 우스운 상상을 내 멋대로 하다보니 배는 어느덧 인공 섬 주위를 돌고 있었다.

삼담인월, 호수에 12개의 달이 뜨고

삼담인월의 배경이 되는 탑, 저 탑구멍 속으로 비친 달이 호수 위에 12개가 된다고 한다.
삼담인월의 배경이 되는 탑, 저 탑구멍 속으로 비친 달이 호수 위에 12개가 된다고 한다. ⓒ 김정은
인공 섬 주위에는 서호 10경 중 하나인 삼담인월의 주인공인 석탑 세 개가 보인다. 달이 뜨면 이 세 석탑의 탑 구멍에 달이 비쳐 호수 속에 총 12개의 달이 뜬다는 삼담인월(三潭印月)은 서호 10경 중 으뜸으로 치는 풍경이다. 달 얘기를 하다보니 호수에 비친 달을 따기 위해 물 속에 빠져 자살했다는 시인 이백이 생각난다.

한없이 맑은 유리알, 싸늘한 구슬 하나(極目琉璃一璧寒)
구름 사이에서 반은 내밀고 반은 숨었네(半生雲外半雲間)
어여쁘게 새 단장 끝낸 서시와도 같고 (況如西子新粧罷 )
교태로이 비단결 잡고 옥 같은 얼굴 가리네 (嬌把輕紈掩玉顔)
雲間月/ 이백


삼담인월의 세개의 석탑과 저멀리 뇌봉탑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
삼담인월의 세개의 석탑과 저멀리 뇌봉탑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 ⓒ 김정은
달을 유난히 사랑해서 달과 관련한 많은 시를 남긴 이백, 만약 그가 자살하기 직전 이곳 서호에 있었다면 도대체 이 많은 달 중에 어떤 달을 따야 할지 몰라 물에 뛰어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물에 빠져 죽지는 않았으리라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음력 8월 15일 추석(중추절)이 되면 1년 중 가장 둥근 보름달이 어김없이 두둥실 뜨고 이 서호의 세 탑구멍에도 비춰 서호 속 12개 보름달이 둥둥 뜰 것이다. 그러고 보면 중국인들이 중추절이라고 일컫는 우리 한가위는 우리나 그네들이나 멀리 떠나가 있는 고향의 가족과 친지들을 다시 찾는 커다란 명절임이 틀림없다.

중추절과 중국인 스님의 15년만의 귀향

문득 유람선을 타기 전 우연히 만난 중국인 스님이 생각난다. 쉴 새 없이 떠드는 중국인 가이드의 메가폰 소리와 가이드의 깃발 따라 움직이는 수많은 관광객들의 소음 때문에 유람선 탈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줄곧 머리가 지끈지끈할 정도였는데 마침 주위 관광객들과는 달리 혼자 온 듯한 중국인 스님 한 분이 조용히 앉아 있기에 무심코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뉴욕에서 왔단다.

호텔 말고는 간단한 영어단어조차 통하지 않는-알면서도 일부러 대꾸를 안 하는지는 모르지만-이 무뚝뚝한 중국인들 사이에서 영어가 통하는 중국인, 그것도 일반인이 아닌 스님을 만난 느낌은 참 색달랐다. 미국에 건너가 산 지가 15년이나 되었다는 이 스님은 지금 15년만에 고향을 방문하는 거라고 했다. 스님 또한 얼마 안 있으면 중추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 어쩌면 스님은 중추절을 맞아 일부러 고향방문을 하기 위해 온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왜 그는 고향을 떠나 낯선 외지에서 수도를 하고 있을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5년만에 다시 서호를 바라보는 그의 감회는 과연 어떨까? 지긋이 서호의 풍경과 시끄러운 관광객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을 쫒으며 나 혼자 이런저런 상상에 빠져드는 것도 잠시, 빨리 유람선을 타라는 독촉에 밀려 변변한 작별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채 쫓기듯이 유람선을 탈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 스님도 유람선을 타고 이곳을 구경했을까? 15년만에 큰 맘 먹고 다시 찾은 고향의 풍경은 예전과는 분명 다르겠지만 이 서호의 풍경과 물빛은 그 스님의 예전 기억대로의 넉넉한 모습이길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원해본다.

이런 저런 상상을 하다보니 어느덧 유람선의 예정된 시간은 다 지났고 유람선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쫓기듯이 버스에 올라 다음 예정지인 영은사로 출발했다.

서호 10경


중국인들은 서호의 아름다움을 서호 10경이라고 해서 10가지 절경으로 꼽았는데 서호 10경은 다음과 같다.

1. 단교잔설(斷橋殘雪): 겨울에 눈이 녹으면서 마치 다리가 끊어진 것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다고 함
2. 평호추월(平湖秋月): 백제라는 제방 서쪽끝에 호수면과 거의 같게 만든 조망대에서 바라본 가을 달의 모습
3. 곡원풍하(曲院風荷),:서북쪽 에 있는 정자, 비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호수에 친 그윽한 연꽃 향기
4. 소제춘효(蘇堤春曉): 시인 소동파가 만든 제방인 소제에 비친 봄 햇살
5. 화항관어(花港觀魚) : 5백여 그루의 모란뿐 아니라 2백 종 1만 5천 그루의 꽃에 둘러싸여 홍어지(紅魚池)에서 노는 분홍빛 잉어를 바라 보는 즐거움
6. 유랑문앵(柳浪聞鶯) : 서호의 동남쪽에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들리는 고운 꾀꼬리 소리
7. 쌍봉운(雙峰雲) : 호수 서남쪽에 있는 남고봉(南高峰)과 서북쪽에 있는 북고봉(北高峰)에 구름이 걸린 운치 있는 모습
8. 삼담인월(三潭印月) : 서호 안에 만든 인공섬으로 이 섬 남쪽에 있는 높이 2m의 석탑에 난 구멍으로 비친 12개의 달의 아름다움
9. 남병만종(南屛晩鐘) :정자사(淨慈寺)와 영은사(靈隱寺)에서 울려오는 운치있는 저녁 종소리
10. 뇌봉석조(雷峰夕照) : 뇌봉산(雷峰山) 꼭대기에 있던 뇌봉탑(雷峰塔)에서 비치는 석양의 모습 /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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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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