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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봄에 만든 연못
2004년 봄에 만든 연못 ⓒ 박건
연못물이 넘쳐 흐르는 도랑이 심심해 보여 미나리도 심었습니다. 그래도 허전해 보이는 도랑에는 때마침 동네에서 모내기하고 남은 모를 주워다 한줄로 심어 놓았지요.

도랑물에 모를 심다
도랑물에 모를 심다 ⓒ 박건
도랑물은 흘러 가면서 모를 키우고, 버린 모들은 물을 만나 뿌리를 내리니 둘 다 제 노릇을 하게 된 겁니다.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서로 세월 동무 하면 한여름 몰아치는 소낙비도 덜 두려울 겁니다.

게다가 가을에는 곡식을 머금을 것을 생각하니 두둑한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이렇게 댓걸음 길이에 몇 포기 안되는 벼를 심으며 모심기에 의미를 부여하고는 금방 잊어 버렸습니다.

올 해는 예기치 않던 일들이 줄줄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주말마다 오던 작업실도 한달에 한번 오기 일쑤였습니다. 자라는 풀들도 올 해는 묵히는 셈치고 내버려 두었더니 당연 풀농사를 한 셈이지요.

추석 다음날 보름달
추석 다음날 보름달 ⓒ 박건
추석 다음날, 코스모스와 함께 말라 죽은 잡초들을 베어 뉘어 놓으니, 나몰라라 하고 버려둔 벼들이 드러나며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잡풀에 가려 제대로 자라지 못할 줄 알았던 벼들이 싱싱한 푸른빛 늘씬한 잎맵씨로 황금이삭을 매달고 있는게 아닙니까!

ⓒ 박건
손길 눈길 제대로 주지 않았거늘 저홀로 건강하게 자란 벼들의 모습에 미안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습니다. 잡풀들을 뒤늦게 베어 내고 햇살을 쪼여 주면서 미안한 마음도 덜고 그나마 다행이다 싶습니다.

ⓒ 박건
바람의 덕도 크지요, 살랑살랑 부는 바람으로 잡풀들이 흔들려 햇살이 드문드문 비쳤을 테고, 구름과 비의 덕으로 샘물은 마르지 않고 흘렀을 테고, 새벽 이슬과 벌레들도 희생을 무릅쓰고 이삭들을 지켰을 테니까요.

ⓒ 박건
뿌리를 감싸준 흙과 보이지 않은 미생물들도 한 몫을 거들었겠지요.

ⓒ 박건
이렇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조용히 제 몫을 하는 자연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설 차례상에는 몇 그릇이나 될까마는 이 벼들로 밥을 지어 고마운 뜻을 되새길까 합니다.

ⓒ 박건
자연의 생명력에 새삼 놀랍고 베품에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를 해치지 않으려면 스스로 겸손하고 욕심을 줄여야 할 듯 싶습니다. 없고 모자란 듯하여도 두루 풍요로운 가을이 되길 빕니다.

ⓒ 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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