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릉(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은 인조(1623-1649)와 인열왕후(1594-1635) 한씨의 합장릉이다. 장릉에 들어서면 시원하게 뚫린 신도와 어도가 왕의 능답다는 생각이 저절로 난다. 능을 둘러싼 소나무가 울창하게 하늘로 뻗어있고 한눈에 들어오는 깨끗하게 정돈된 능의 모습에 '과연 왕의 무덤답다'는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공릉이 조선초기의 능이라면 장릉은 조선 중기의 능이다.석물을 보면 문인석과 무인석, 석마, 석양과 석호 등에 초기에 비해 표정이 뚜렷해 사실감과 생동감이 있다는 변화를 볼 수 있다.
아기자기하고 고아한 왕비의 품위가 느껴지며 자연미가 잘 살아 있는 공릉과는 달리 장릉은 홍살문을 들어서는 순간 웅장한 왕의 기상이 뿜어져 나온다. 10만여 평에 달하는 규모의 장릉은 홍살문도 공릉 보다 크고 정자각도 더 크다.
쭉 뻗은 어도를 걸어 주위를 둘러보면 감탄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풍광이 웅장하다. 옛날 능의 수호군이 능침을 청소하거나 능을 지키기 위해 거주했던 수복방도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도 공릉과 다르다.
석물을 봐도 문인석과 무인석이 아주 잘 생겼다. 병풍석의 연꽃 문양도 섬세하고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하다못해 석마도 눈을 부라리며 당장 뛰어나갈 듯 생동감이 있으며 석양과 석호도 선명한 표정을 가지고 있다.
선조가 잠든 동구릉의 목릉과 인조의 장릉은 비공개 능이다. 두 능의 공통점은 비공개라는 것 외에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전란시대의 왕이라는 것과 병풍석을 둘렀다는 점이다.
풍수에 일가견이 있던 세조가, 이후의 능에는 시신이 빨리 썩어서 뼈가 흙의 생기를 받아야 왕기를 흡수해 후손에게 감응해서 발복이 된다는 이유로 석실과 석관, 병풍석을 두르지 말라 명한 이후에도 병풍석을 두른 왕릉은 몇몇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조선왕조의 악녀라고 불리는 문정왕후가 남편인 중종을 천장한 정릉이고, 문정왕후 자신의 능인 태릉, 인종과 아들 명종의 능까지 병풍석을 둘렀다.
조선중기부터 절대왕권의 상징인 왕릉의 구조와 택지가 변하게 되는 것은 문정왕후로 인해 시작된다고 봐야 한다. 이는 왕권이 흔들리고 신권(臣權)이 높아지면서 왕의 외척들이 국장에 감놔라 배놔라 관여했던 결과다.
왕릉을 하나 조성하려면 백성들의 등골이 휘어지는 부역을 치러야 한다. 풍수적인 이유에서건 세조가 병풍석과 석실, 석관을 사용하지 말라한 것은 백성들의 부역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장과 국장에 국고를 탕진했던 문정왕후 이후로 조선의 절대왕권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백성들의 고초가 심해졌다.
선조와 인조의 병풍석은 의미가 좀 다르다. 병란을 겪었던 왕은 사후에도 똑같은 운이 따른다는 해석으로 병란을 누른다는 의미로 병풍석을 쓴 것이라 한다. 인조와 인열왕후의 합장릉인 장릉의 병풍석은 웅장하고 아름다웠지만 당시 민초들의 피땀어린 부역으로 조성된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왔다.
원래 인조의 능은 이곳이 아니었다. 인조14년 인열왕후가 죽자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에 능을 잡고 자신도 나중에 이곳에 안장된다. 인열왕후의 능으로 운천리가 결정되자 756 기에 달하는 백성들의 묘는 강제로 이장을 당해야 했다. 이중 무연고가 667기이고 연고가 89 기라 하나 이장할 비용이 없던 백성들의 묘가 많았을 것이란 추측이다.
당시 이곳에선 '왕비를 묻는데 수백 무덤이 옮겨야 하느냐'는 원망이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임진왜란의 상처가 가시지 않던 당시의 민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4경(새벽2-4시) 무렵에 대궐을 출발한 인열왕후의 장례에 상여군을 포함해 6770명이 따라갔다고(인조실록권32) 전한다.
조선의 국장제도를 보면 밤중에 발인한 경우가 많아 횃불을 들고 가는 사람수가 500명으로 정해져 있다. 그밖에 말을 탄 이, 기를 든 이, 등등 아주 거창하다. 이렇게 거창한 장례를 치른 지 1년도 되지 않아 병자호란을 맞게된다.
이후 인조의 무덤에서 풍수에서 충렴(蟲廉)이라 하는 뱀과 벌레가 나오자 10세 아들을 영릉에 묻고 후손을 얻지 못했던 영조는 이곳으로 1731년 천장을 단행한다. 아들 못 낳는 것도 조상무덤 탓으로 돌리는 영조의 천장으로 합장릉으로 새 단장해서 잠들어 있는 것이다.
천장할 당시 먼저 능에서 쓰던 석물과 병풍석을 더러 이용하기도 했지만 맞지 않아 쓰지 못한 것도 있어 17세기와 18세기의 왕릉석물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왕릉은 도성에서 백 리 안에 조성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왕이 능에 행차했을 때 국가의 변고가 생기면 하루만에 되돌아오는 거리를 계산한 것이다. 이것이 경기도에 조선왕릉이 몰려있는 이유다. 도성 동쪽에 9개 능이 있다해서 동구릉이고 서쪽에 3개의 능은 서삼릉, 5개의 능은 서오릉이 된다.
파주시에는 조리읍 봉일천리에 사적 205호인 공·순·영릉이 있고 탄현면에 사적 203호인 장릉이 있다. 그밖의 사적으로 수길원과 소령원이 있다.
장릉이나 목릉이 비공개인 이유는 목릉은 공개로 인한 몸살을 치유하고 안정을 갖기 위한 휴식년을 취하고 있는 중이고 장릉은 주차장이나 도로의 미비로 공개가 어렵기 때문이다. 장릉은 비공개지만 문화재청에서 관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말끔하게 단장하고 있다.
장릉에 올라 무덤을 한 바퀴 돌아본다. 능상을 두른 병풍석은 12면이고 자, 축, 인, 묘 등 12지가 새겨져 있다. 무덤을 보호하고 운이 오는 것을 기원하는 의미다. 무덤 뒤편 병풍석이 깨져 떨어진 곳이 두 군데 보인다. 수리를 마치긴 했지만 깨진 흔적이 남아있다. 아마 도굴을 하려다가 실패한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곡담 뒤로 유난히 솟아있는 언덕이 보인다. 명당에서 보인다는 잉(孕)이다. 조선왕릉 중에서 제일 높게 불쑥 솟은 잉이라 하니 명당임에는 틀림없을 터이지만 인조를 생각하면 공릉처럼 애정이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아니, 광해군을 생각하면 장릉을 보는 심정이 울화통 터진다.
보기 드문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참나무와 수백년 수령의 느티나무들이 남아있는 장릉 숲이 공릉 숲처럼 마음이 끌리지 않는 것도 남한산성에서 치욕의 무릎을 꿇었던,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인조에 대한 선입견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곳에도 청설모들이 나무를 타고 오르내리는 것이 보인다.
재위 15년만에 폐위되는 바람에 유배지 제주도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광해군은 능도 원도 되지 못하고 경기 남양주시에 묘로 초라하게 남아있다. 인조반정 이후 언론인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사관이 쿠데타 성공세력 편에 서서 고치고 왜곡한 광해군일기가 실록이라는 이름대신 남아있는 것을 보면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인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서인은 친명 사대주의자들이었다. 그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본다면 어찌 그리 닮은꼴인지?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재조명돼야 한다는 소리에 절대동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