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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바이올리니스트 안용구(오른쪽) 교수와 아내 김정현씨.
재미 바이올리니스트 안용구(오른쪽) 교수와 아내 김정현씨. ⓒ 오마이뉴스 강이종행
"사상이 없으면 진정한 예술가가 아닙니다. 상아탑에 앉아 음악에만 취해 있는 것은 마약에 취해 있는 것과 같아요. 한 사람의 음악 안에는 그의 교양, 취미, 사상까지 표현됩니다. 교회와 귀족들로부터 밥벌이를 했던 음악가들 중 베토벤과 모차르트가 반항적으로 뛰쳐나와 음악을 대중화시켰어요. 그들은 당시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음악가였던 것이죠."

정경화, 강동석, 김영욱, 강효, 김민 등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가들의 스승인 안용구(76) 교수. 줄리어드음대 등과 함께 최고의 고전음악 양성학교인 피바디(Peabody)음대 교수로 재직(1968-2002년)했던 안 교수는 우리 음악계의 '이단아', '반체제인사'로 일컬어졌다. 지난 1968년 도미하기 전까지 최고의 제자들을 길러내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는 음악인으로서는 드물게 '통일운동'의 선봉에 섰기 때문이다. 특히 보수적인 우리 고전음악계에서는 경계대상이었다고 한다.

음악계 '통일운동가'로 알려진 고 윤이상(전 독일 베를린국립음악대학) 교수가 '동백림 사건'과 뛰어난 작곡능력으로 국내·외에 유명세를 타는 동안 안 교수는 국내에서 전혀 조명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2003년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이해 선정된 '한인사회를 빛낸 100인의 인물' 중 정경화, 강효, 장영주 등 후배 바이올리스트와 함께 이름이 올랐을 만큼 오히려 국외에서 더욱 알려져 있다.

최근 안 교수가 회고록 <한 마리 새가 되어>(한길아트)을 펴냈다. <오마이뉴스>는 안 교수가 머물고 있는 소공동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지난 7일 그를 만났다. 그는 뛰어난 연주력과 탁월한 지도능력, 게다가 '통일을 향한 강한 집념'으로 살아왔던 자신의 굴곡 많은 삶을 2시간 여에 걸쳐 들려줬다.

"사상 없으면 진정한 예술가 될 수 없어"

최근 안용구 교수가 펴낸 회고록 '한 마리 새가 되어'.
최근 안용구 교수가 펴낸 회고록 '한 마리 새가 되어'. ⓒ 한길사
유복한 집안(그의 아버지는 당시 드물게 독일 유학파 의사였다)에서 태어난 안 교수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으면서 왼쪽 다리를 절게 된다. 이후 집안 식구들의 유무형의 차별을 받았던 안 교수는 외삼촌의 권유로 바이올린을 접한다. 독학으로 바이올린을 익힌 그는 우연히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듣고는 "피하려고 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바이올린에 미쳤다고 한다.

"돈도 안 되는 '깽깽이'를 한다"며 아버지의 반대가 계속됐지만 해방 직후, 안 교수는 서울대 음악대학의 전신인 '경성음악전문학교'에 첫 기수로 입학을 했다. 그러나 이내 6.25 전쟁이 발발하고 부산 피난지에서 우여곡절 끝에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은 그는 전쟁 뒤 대학을 졸업했고 바로 서울대에서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후 독일, 영국 등에서 유학을 한 뒤 60년대 '국내 실내악 운동'을 일으키며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로 명성을 드높였다. 또 68년 피바디 음악대학에서 초청을 받아들여 도미하게 된다.

"많은 제자를 두고 떠나기 힘들었지만 그때 떠날 수 있었던 건 음악 하는 나를 인정하지 않은 아버지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이다. 또 당시는 박정희 정권이 들어와 군사독재가 싹틀 무렵이었는데 사회는 불안하고 언론이나 예술활동이 크게 제재 받았다. 마지막으로 음악계에서는 좋은 제자들을 둔 나를 질투하며 좋아하지 않았다."

당시 국내 교수가 외국대학 정교수로 간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안 교수는 그를 발탁한 피바디 음악대학을 실망시키지 않았고 여러 차례 훈장이나 표창을 받았다. 특히 지난 1986년엔 미국 내 '올해의 현악 교수'로 선출됐다. 그는 이에 대해 "이 상이 가장 자랑스러운 까닭은 내가 일생을 바친 일을 사회가 인정하고 치하한다는 일종의 증거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장애 -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 계속한 '깽깽이'

9일, 11일 '안용구' 연주회 계속해서 열려
안용구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용구 교수의 회고록 '한 마리 새가 되어' 출간 기념 연주회가 9일 오후 5시 파주 통일동산 헤이리 '북하우스'에서 열렸다.

이날 연주회는 안 교수의 77년 음악일기 출간기념과 동시에 원산 출신의 실향민이며, 1960년대에 실내악 운동에 불을 댕기고, 80년대 이후 미국에서 통일운동을 펼쳐온 그의 삶을 돌아볼 기회였다.

이번 연주회는 김진(바이올린) 서울대 음대 학장, 이종영(첼로) 경희대 음대 교수, 윤진원, 박성희(이상 비올라)씨, 임미정 울산대 교수(피아노) 등 그의 제자들과 함께 했다. 이밖에 그와 함께 실내악 운동을 펼쳤던 박병훈 동의대 음대 겸임교수 등이 무대에 올랐다.

안 교수는 11일 오후 3시에는 서울대 예술관(49동)에서 연주회를 갖는다. 이날 연주회에서 안 교수는 임미정 교수 등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

프로그램 :

모차르트 디베르티멘토 내림마장조 K.563
안용구 violin 윤진원 viola 이종영 cello

쇼팽 야상곡 Op.48 제1번 다단조
전권 아리랑(북한음악)
임미정 piano

브람스 현악6중주곡 제1번 내림나장조 Op.18
안용구·김민 violin 박성희·윤진원 viola 이종영·박병훈 cello
안 교수는 다른 고전음악가들과 다르게 '통일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까지 4번에 걸친 북한 공연과 미주 순회 공연으로 '통일문화운동'의 선두에 서있다.

- 통일 운동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라도 있는지.
"몇 가지가 있는데 우선 '혁명투사가 돼 항일운동을 하라'는 어릴 때 이모님의 말씀은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만난 한국인에게 점심식사를 사주겠다고 했더니 경계를 했다. 내 소개를 하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해외 여행자들에게 '외국에 나가서 한국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별 이유 없이 말을 붙이고 친절하게 굴면 일단 의심하고 경계하라'고 했다더라.

오로지 음악만 해왔던 나는 이 때서야 비로소 '왜 우리나라는 민주주의라고 하면서 이러한 비인간적인 사고방식을 국민에게 요구할까', '우리는 도대체 어떠한 역사와 전통과 가치관을 갖고 있는가' 고민하게 됐다."

곧바로 한국역사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글로 쓴 책은 북에서 발간된 것이라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동아일보>가 한국 정부의 탄압으로 폐쇄 위기를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뒤,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는 언론 자유에 있다"고 믿었던 안 교수는 동아를 돕기 위한 작은 음악회를 개최, 수익금을 동아로 보냈다고 한다.

"한 신문사를 간접적으로 도와주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체제비판자가 됐다. 이때부터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지만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마음이 통한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이 거리감을 두고 피할 때는 마음이 좋을 리 없었다. 굉장히 외로운 삶이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안 교수에게 한 번은 FBI 직원이 찾아와 '공산당'이냐는 질문을 하기도 한다. 또 이후 연주회 때문에 국내에 들어오면 언제나 검은 복장의 남자 두 명이 그를 미행했고 그가 만난 사람은 취조를 당하기도 했다.

반체제인사로 낙인 찍혀 FBI 조사도 받아

FBI 요원이 다녀간 뒤 그가 존경해오던 윤이상 교수로부터 '제1회 윤이상 음악회'를 평양에서 여는데 함께 가자는 부탁을 받았다.

"부산 피난 시절에 만난 적이 있던 윤 교수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이후 북한에는 3번을 더 다녀왔다. 가장 마지막이 2002년 태양절 음악회에 초청 받아 갔던 것이다."

전문가가 느끼는 북한 음악은 어떨까?

"북한 음악가는 음악을 위해 있다기 보다 대중들의 즐거움의 수단을 제공하기 위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놀랐던 것은 윤이상씨의 어려운 곡을 빈틈없이 연주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어릴 때부터 준비가 잘 됐다고 느꼈다."

재외 교포로서 북한을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던 그에게 최근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국가보안법'에 대해 물어봤다.

"아주 잘 된 법이라도 맹점이 있기 마련이다. 더구나 이런 법은 국민의 사상적인 억압 뿐 아니라 통일을 방해하고 있다. 이 법은 국민이 원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당당하게 없애야 할 법은 없애야 한다."

고 윤이상 교수(가운데)가 1974년 미국 안 교수 집을 찾았다.
고 윤이상 교수(가운데)가 1974년 미국 안 교수 집을 찾았다. ⓒ 회고록
"통일을 방해하는 국보법 없어져야"

정권이 바뀐 뒤, 김포공항 검사원이 여권과 신상조사 컴퓨터 화면을 보고 '선생님, 그 동안 고생이 많으셨군요'라고 말했을 때, 흐르는 눈물을 꾹 참았다는 안용구 교수. 그는 지난 일을 회상하며 자신의 꿈에 대해 고백했다.

"전쟁 뒤 방송국에서 바이올린 독주를 해달라고 해 폴란드 출신 비니아프스키의 '레전드'란 곡을 연주한다고 했더니 관계자가 '-스키'가 붙었기 때문에 소련사람으로 오해해 방송에 못 내보낸다고 하더라고요. 그에 대해 설명을 하고 그 곡을 연주했는데 결국 방송에는 '비니아프'라는 이름으로 소개가 됐어요.

그랬던 때와 지금은 정말 다르죠. 나는 많은 꿈을 이뤘어요. 하지만 더 큰 꿈은 우리 민족이 중국, 일본, 미국에 예속되지 않고 스스로 설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죠. 그 때까지 '한 마리 새'가 돼서 남과 북을 오가면서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의 이번 회고록 제목은 '한 마리 새가 되어'(한길아트 출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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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동안 한국과 미국서 기자생활을 한 뒤 지금은 제주에서 새 삶을 펼치고 있습니다. 어두움이 아닌 밝음이 세상을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실천하고 나누기 위해 하루 하루를 지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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