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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신칸센역
히로시마 신칸센역 ⓒ 유용수
히로시마 시내 풍경
히로시마 시내 풍경 ⓒ 유용수
신칸센(일본의 고속전철)이 말로만 듣던 도시, 히로시마의 전철역에 정차했다. 신칸센을 타고 도쿄에서 5시간 걸리는 '히로시마'는 많이 들어 보긴 했지만 이렇게 발을 디딘 것은 처음이었다. 히로시마하면 버섯구름이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원폭 투하 장면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

1940년 8월 6일, B-29 한대가 히로시마 창공에 나타났다. 그리고 '리틀 보이'라고 이름 붙여진 농축우라늄 핵폭탄을 투하했다. 그 폭탄 하나가 당시 34만이던 히로시마 인구 중에서 7만명이 넘는 사망자와 13만에 이르는 부상자를 남기며 도시를 불지옥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후 우리는 광복절이 가까워질 때마다 도시의 창공까지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흑백 사진을 보게 됐다.

원폭 투하 후 반세기의 시간이 흐른 히로시마의 거리 풍경은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 시내는 도쿄와는 달리 널찍한 도로가 펼쳐져 있었고,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으며 여기저기 전차가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도시 사람들은 잊혀지지 않는 비극의 상처를 안고 지금까지 살아 오고 있다.

히로시마 원폭돔의 풍경
히로시마 원폭돔의 풍경 ⓒ 유용수
저녁 무렵의 히로시마의 원폭돔
저녁 무렵의 히로시마의 원폭돔 ⓒ 유용수
히로시마역에서 출발한 노면전차는 '원폭돔'이라는 이름의 정거장에 섰다. 비극의 현장을 눈앞에서 보니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넘어서 이렇게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생명에 대한 연민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건물과 사람이 일순간 흔적도 없이 재가 된 이 도시의 중앙에는 당시 산업장려회관이 서 있다. 기적적으로 지붕과 건물 형체가 그대로 남아 있는 이 회관은 인류가 저지른 가공할 살상 현장의 목격자처럼 굳게 서 있었다. 증언자들에 의하며 원폭돔 바로 앞에는 넓은 개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당시 이 개천에 수천명이 불이 붙은 채 뛰어들어 온통 피로 덮였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고 한다.

한국인 희생자 위령탑
한국인 희생자 위령탑 ⓒ 유용수
원폭 당시 풍경을 그린 그림
원폭 당시 풍경을 그린 그림 ⓒ 유용수
"한가지 특이한 사실은 이 히로시마 인구의 10분의 1은 '조선인'이었습니다. 대개 그들은 군수공장에서 부려 먹기 위해 조선에서 '강제연행'('징용'이라는 의미의 일본식 표현)되어 온 사람들인데 말하자면 소·말과 같은 가축과 동일하게 여겨진 노예들이었습니다. 히로시마 희생자의 10%로 그들도 최소한 2만명 이상 죽었습니다. 살아서 조선반도(일본인들은 한반도를 '조선반도'라고 지칭한다)로 돌아간 사람은 한국 정부로부터 거의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일본에게 보상 요구를 해 왔지만 일본 정부는 이미 한일정상화 때 배상을 끝마쳤다며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여하튼 계속 문제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자국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열심히 해설하고 있는 가이드의 말을 들으며 히로시마가 단지 과거 역사 속에 고정된 사건이 아니라 한민족과 여전히 깊은 연결고리를 가지는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히로시마는 우리에게 과거를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말대로 소말과 같이 가축과 같은 신세였던 우리 조선인들은 남이 일으킨 전쟁의 한복판에서 무참한 희생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히로시마의 비극은 일본인들에게도, 그리고 조선인들에게도 현재 진행형이다.

희생자탑 앞에 전시된 남북한 통일을 염원하는 작품
희생자탑 앞에 전시된 남북한 통일을 염원하는 작품 ⓒ 유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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